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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21

고구려국본기-21 21. 고구려의 개국 공신 연타발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曷思*(북갈사는 만주 우수리강 일대이고, 남갈사는 혼춘琿春지방)를 오가면서 이재理財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지금의 대요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訥見*(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 지금의 만주 장춘 북쪽 주성자朱城子)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坐原*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에 죽으니, 때는 평락平樂*.. 2024. 3. 3.
고구려국본기-요서 10성 20. 요서 지방에 10성을 쌓음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安市城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遙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豊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 2024. 3. 3.
고구려국본기-19 19. 요동과 요서의 고구려 영토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6세, 단기 2386, 53~단기 2479, 146)께서 쌓으신 것이다. 안시성의 위치: 하북성 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다. 조선시대 실학사상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이른바 옛 안시성은 개평현開平縣 동북 70리에 있다[古安市城, 在蓋平縣東北七十里]"라고 하였다. 이 개평현을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으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개평현은 바로 요서에 있는 개평부이다. 지금 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으로 70리쯤 가면 천령天嶺 또는 천산天山이라 불리는 언저리에 탕지보湯池堡가 있.. 2024. 3. 3.
고구려국본기-18 18. 중국 본토까지 뻗었던 백제, 신라의 영토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遙西*, 진평晋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지금의 절강성 소옹현)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진나라 때 설치한 현으로 지금 절강성 소홍현),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지금의 상해)· 회계會稽(지금의 절강성 소홍현)· 오성吳城· 좌월· 산월· 천주泉州(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 서남쪽, 진서晉書 지리지에 진안군晉安郡에 속한 현 가운데 신라현이 명확히 기재되어 본문의 내용을 입증함)라 하였다. 명치 12년(단.. 2024. 3. 3.
고구려국본기-안시성 전투, 고당전쟁 환단고기에 기록된 고당전쟁은 지금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역사상식으로는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당전쟁, 특히 안시성 전투의 상황과 이후 이세민의 후회와 기타 정황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해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축소시키고 연개소문을 폄하한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사료만으로 그 당시의 정황들을 객관적으로 유추를 해보면, 오히려 환단고기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병법의 달인인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전략적으로 유린해 안시성에서 충분히 고통을 주었으며, 전쟁에 패해 달아나는 당태종 이세민을 끝까지 추격해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공포심을 주어, 끝끝내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입성해서 당태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었.. 2024. 3. 3.
고구려국본기-16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패망의 역사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일어난다. "나라 바깥의 변화가 외환(外患)로 다가올때 그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서로 분열되는 내우(內憂)가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문제이며, 내우외환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거기엔 더 근원적인 원인, 즉 이전부터 내부를 조금씩 썩게 해온 시스템의 한계와 더불어 시스템을 무너뜨리려 열망하는 매우 강한 원한(怨恨)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 9월26일. 이보다 4년 전인 664년에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세상을 떠났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고구려 사람들에겐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 2024. 3. 3.
고구려국본기-15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묘사하기를 "그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몸가짐이 웅장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서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고, 또한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따랐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고 묘사한다. 이 글로 유추해보면 연개소문은 도량이 넓고, 매우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극찬하며.. 2024. 3. 2.
고구려국본기-14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는 연개소문이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도록 왕에게 주청했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고구려의 1백 여명의 대신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또한 왕을 시해해 그 시신을 토막내어 버린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는 영류왕이 친당 정책을 펴, 점점 고구려의 주체성을 상실했고, 당나라의 도교를 수입해서 노자의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으며, 수십만의 백성들을 장성축조에 동원하여 국력을 소진시키니, 연개소문이 이를 왕에게 중지하도록 주청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다 연개소문을 주멸하려던 왕과 뜻이 맞았던 소수의 여러 대신들이 연개소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왕의 계획이 틀어지자 영류왕은 평복으로 도망가다 백성들에게 조칙을 내렸으나 아무도 따르는 이가 없.. 2024. 3. 2.
고구려국본기-13 13. 고구려·백제의 통치 영역과 수 문제의 대침략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摠菅 위충韋冲*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연태조淵太祚: 연개소문의 아버지, 중국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를 태조라 하였고 그 벼슬이 막리지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연태조를 동부 혹은 서부 대인 대대로라 하였다. *등주登州: 지금의 산동성 봉래蓬萊, *위충韋冲: 수나라의 등주총관]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王爵]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 2024. 3. 2.
고구려국본기-12 12.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대영절大迎節)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수양제의 대침공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침]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려)으로 돌아간.. 2024. 3. 2.
고구려국본기-11 11. 선비족 후손인 수양제의 침략을 격퇴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26세 영양제, 단기 2923~2951, 590~ 618) 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隋나라 왕 양광楊廣*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上國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양광楊廣: 수隋(569~618)의 2세 왕 양제楊帝의 이름, 문제文帝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고구려 원정 실패와 지나친 토목공사 등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결국 당唐에게 명망당하였다. [수양제의 피격 사건] 홍무弘武*(영양제의 연호) 25(단.. 2024. 3. 2.
고구려국본기-10 10.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중국 양자강 남쪽까지 지배]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20세 장수제, 단기 2746~2824, 413~ 491)는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熊津江*(지금의 금강)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 되었다. 그리고 북연北燕*(북연 407-436: 중국 5 호16국 시대 때 16국 중의 하나 후연後燕에서 벼슬하던 고구려 사람 고운高雲이 광개토열제에게 대패한 후 연나라의 왕 모용희慕容熙를 살해하고 북연을 세움), 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또 신라의 매금寐錦*(신라국 왕을 말함)과 백제의 어하라於瑕羅*와 함께 남평양(지금의 서울)에서 만나,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 2024. 3. 2.
고구려국본기-9 9. 회계산의 역사적 의의와 방사 서복의 일본 이주 과정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神市中經' 소장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 우禹가 석 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禹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오吳· 월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고, 산월山越· 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갈라져 옮겨 살던 땅이다. 늘 왜와 더불어 왕래하고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奏나라 때 서불徐市*이 동야東冶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나하)에 이르고, 종도種島*(다네시마)를 거쳐 뇌호내해懶戶內海(세도나이카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에 도착하였다. 이세伊勢에는 옛적에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단주亶洲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라 .. 2024. 3. 2.
고구려국본기-8 8. 일본 큐슈에 다라한국을 건국한 협보 [일본에 세워진 고구려 분국] 이보다 먼저 협보陜父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서 마한산(지금의 평양) 속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陜父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대통강 어귀의 진남포鎭南浦를 말한다.)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狗邱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聯政]을 세워 다스렸다. 이때 세 나라는 바다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에 .. 2024. 3. 2.
고구려국본기-7 광개토열제는 고구려 19세 태왕으로 재위기간은 391~413까지이다. 비록 22년간의 짧은 통치기간이었지만, 광개토열제는 배달·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했던 영토와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多勿 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이다. 광개토열제는 38세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거란· 평량(감숙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북아 국가를 조공국으로 복속하여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신교 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이다. 지난 1976년 12월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굴된 '덕흥리 고분'은 광개토열제 때 이미 요서를 비롯한 하북성 북부까지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는 확실한 고고학적 물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2024. 3. 2.
고구려국본기-6 6. 역대 성군, 영걸의 역력한 자취 책성栅城(연해주를 말함)에 태조무열제(6세)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紀功碑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蹟碑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淵蓋蘇文頌德碑가 있다. 평양 平壤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朝天石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東川帝를 또한 단군이라 하였다. 해마다 한맹寒盟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箕林窟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大迎祭典은 처음 동굴[隧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 2024. 3. 2.
고구려국본기-5 5. 을지문덕의 호쾌한 심법 세계 [도통의 요체] 을지문덕이 이렇게 말하였다. "도로써 천신(삼신상제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氣]을 받을 때,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로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 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感應하고, 이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道를 통한다. 도를 통하는 것은, 삼물三物인 덕[德]과 지혜[慧]와 조화력[力]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三家인 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三途인 느낌[感]과 호흡[息]과 촉감[觸]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2024. 3. 2.
고구려국본기-4 4. 을파소가 전한 참전계 을파소가 국상國相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叅佺이라 하는데, 무리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皁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神市 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寒盟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 2024. 3. 2.
고구려국본기-3 3. 고주몽 성제의 통치 영역과 대도말씀 [道言] [고구려의 천도 과정] (고주몽 성제) 평락平樂 11년 갑오(단기 2307, BCE 27)년 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訥見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 (2세) 유리명제琉璃明帝 21년(단기 2335, CE 2),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 안에 환도산丸都山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 (3세)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20년(단기 2370, 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고구려)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10.. 2024. 2. 21.
고구려국본기-2 2. 북부여의 국통을 계승한 고주몽(고추모) 해모수의 현손 고리군槀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이요, 한漢나라 왕 불릉弗陵 원봉元鳳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 부인이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가섭원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마침 부여 .. 2024. 2. 20.
고구려국본기-1 1. 고구려 국통의 뿌리 - 북부여 해모수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고구려地名)이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熊心山(검마산)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 도읍(백악산 아사달)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저물면 등천하셨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단군께서 처음 내려온 .. 2024.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