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열제는 고구려 19세 태왕으로 재위기간은 391~413까지이다. 비록 22년간의 짧은 통치기간이었지만, 광개토열제는 배달·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했던 영토와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多勿 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이다. 광개토열제는 38세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거란· 평량(감숙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북아 국가를 조공국으로 복속하여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신교 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이다.
지난 1976년 12월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굴된 '덕흥리 고분'은 광개토열제 때 이미 요서를 비롯한 하북성 북부까지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는 확실한 고고학적 물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332~408) 은 13군郡을 관할했다. 태수太守의 내조하례도來朝賀禮圖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영토는 북경을 비롯한 중국 대륙의 북서부 일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이것은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선까지라는 종래의 날조된 통설을 완전히 뒤엎는 획기적인 증거인 것이다. 13군은 연군, 범양, 어양, 상곡, 광염, 대군, 북평,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비[永樂紀功碑] 비문에도 열제가 거란, 후연, 백제, 왜(일본)를 정벌한 업적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비문이 발견된 뒤에 곧바로 중국 측과 일본 측에 의해 주요 부분이 모두 깎여 버렸고, 일부 변조되어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덕흥리 고분 벽화는 광개토열제가 숙적이던 모용씨의 후연後燕을 복속시킨 사실을 방증한다. 고국양열제 당시 고구려와 후연은 일진일퇴의 대격전을 벌였고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한 적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열제의 고구려군은 먼저 서북으로 염수鹽水 [내몽고 자치주 파림좌기 일대]를 정복하여 거란을 복속시켰다. 태백일사에 따르면 고구려는 감숙성의 평량平浪까지 수중에 넣었다. 이어 고구려는 거란병을 동원하여 후연의 후방인 연군 지역을 공격했다. '진서'에는 "會高句麗寇燕郡, 殺略百除人"이라 하여 고구려군이 연군燕郡, 즉 연나라 후방인 하북성 지역을 습격한 사실을 전한다.
이것은 후연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기 위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후연군이 고구려·거란 연합군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간 동안에 고구려군은 대릉하 지역을 습격하였다. 거란병이 퇴각하자 후연은 3천 리를 다시 행군하여 고구려와 싸워야 했으므로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고구려에 대한 후연의 공격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407년에 북위가 후연을 공격하자 후연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무력해진 후연 조정을 대신하여 진鎭을 유주자사로 파견하였다. 북연 13군의 태수들은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관 진鎭에게 복종했고 후연 조정은 지방 통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얼마후 후연은 내부 정변까지 일어나 고운高雲(慕容雲)이라는 고구려계 인물이 왕이 되어 북연을 세웠다. 고구려는 북연의 왕 고운을 예우하면서 북연의 영토(대릉하~하북성 지역) 전체를 지배하였다. 북연은 고구려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북조北朝 여러 나라가 동쪽을 침범하는 것을 막는 완충지대가 되었다.
7 광개토열제의 성덕과 동방 문명의 종주권 장악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烈帝(위대한 황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光明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天樂을 연주하게 하셨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일본 본토 정벌과 동방 대통일의 위업]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熊津 · 임천林川 · 와산蛙山 · 괴구槐口· 복사매伏斯買· 우술산雨述山 · 진을례進乙禮 · 노사지奴斯只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百濟·신라新羅·가락駕洛(가야)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契丹과 평량平凉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任那· 이국伊國· 왜倭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海東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7. 廣開土烈帝의 聖德과 東方 文明의 宗主權 掌握
廣開土境好太皇은 隆功聖德이 卓越百王하사 四海之內에 咸稱烈帝라
年十八에 登極于光明殿하시니 禮陳天樂하시고
每於臨陣에 使士卒로 歌此於阿之歌하사 以助士氣하시며
巡騎至摩利山하사 登塹城壇하사 親祭三神하실새 亦用天樂하시니라.
[日本 本土 征伐과 東方 大統一의 偉業]
一自渡海로 所至에 擊破倭人하시니
倭人은 百濟之介也라 百濟가 先與倭로 密通하야
使之聯侵新羅之境하니 帝躬率水軍하사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하시고
路次俗離山이라가 期早朝祭天而還하시니
時則百濟· 新羅· 駕洛諸國이 皆入貢不絕하고
契丹· 平凉이 皆平服하고 任那· 伊· 倭之屬이 莫不稱臣하니
海東之盛이 於斯為最矣라.
천악天樂: 단군조선 때의 어아가를 말한다. 광개토열제 때는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군가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아가: 단군세기 2세 부루단군 조에 나오는 어아가 참조(클릭)
참성단塹城壇: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 제천단'으로 단군조선부터 근세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주재자이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온 한민족의 고유한 제천 성소다. 단군세기 초대 단군왕검 조에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는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을 만든 것을 천단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단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거란契丹: 당시에 송막지역에 있었다(수서의 거란전). 송막은 지금의 하북성 위장현 극십극등기와 대흥안령 남쪽 일대이다.
임나任那: 지금의 대마도
이국伊國: 이세라고도한다. 왜와 인접했고 지금의 일본 미에현 지방에 있었다.
왜倭: 연나부부여(서부여)왕 의라(일본서기에 나오는 15세 오진 왕)가 건설한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인 야마토 왜이다.
평량平凉: 고구려는 거란을 복속시킴으로써 그 세력권 내에 있던 평량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평량은 감숙성 평량현平凉縣 서북이다. 남북조 시대에 전前· 후後· 서西· 북北· 남南 5량五凉의 나라가 있었다. 평량 이 수중에 들어오자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렸다. 이것은 감숙성에 있는 돈황 석굴의 고구려계 벽화에서 확인된다. 평량을 평정했다는 사실은 어떤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직 환단고기에서만 알 수 있다.
광개토열제의 백제 점령 지역
웅진은 충남 공주, 임천은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으로 충남 부여군 임천면 지역이고, 와산은 충북 보은, 괴구는 충북 괴산, 복사매는 충북 영동永同로 일명 심천현深川縣이다. 우술산은 대전광역시에 있는 보문산이고, 진을례는 진례군進禮郡으로 지금의 금산·무주·진안이며, 노사지는 대전광역시 유성이다(삼국사기 지리지 3.4 고구려 참조).
광개토태왕비 비문 왜곡 사건
일본 군부는 명치 정부에 의해 이른바 정한론이 대두된 뒤로 많은 밀정을 조선과 만주 지방에 보냈다. 이 무렵(1880년 전후) 만주 지방의 산간 벽지인 길림성 집안集安시 통구通溝에서 일본 군부의 밀정들에게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첩자에 의해 만들어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비문이나 탁본에 종이를 대고 그린 후 먹을 칠하여 탁본처럼 만든 것)에는 "왜가 신라성에 가득차고 그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新羅城 □城 倭滿倭潰城□□□]"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00년 뒤 1981년 중국 주운대周雲代가 정밀하게 탁본한 본에는 "신라성에 들어온 왜구가 (고구려 원정군에게) 크게 궤멸되었다[新羅城 □城 倭寇大潰城□□□]"라고 되어 있어, 쌍구가 묵본과는 완전히 상반된 뜻을 가진 글자가 나왔다. 100여 년 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석회가 떨어져 나가자 원래의 글자 가 되살아난 것이다. 쌍구가묵본을 만들 때 원래의 글자인 '왜구대궤倭寇大潰에 석회를 발라 왜(일본)에 유리하도록 '왜만왜궤倭滿倭潰'로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36쪽).
참고자료: 덕흥리 벽화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