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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20

도전 속 상제님 신원(神元) 관련 말씀 정리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도전 2:40)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야말로 '광인의 언어'로 치부될 수 있는 선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춰 깊이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단순한 미치광이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격을 지니신 분이었을까? 강증산 상제님께서는 스스로 "광인은 입경(立經)도 못 하고 건사(建事)도 못 하나니 때가 오면 나를 헐뜯는 자들의 눈에 먼저 눈물이 흐르고, 나를 헐뜯는 자들이 먼저 나에게 절하리라.” (도전 2:149) 라고 단언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한 자기변호가 아니다. 만약 상제님께서 정말 광인이었다면, 1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2025. 6. 4.
차경석과 보천교의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국권 회복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민족 종교의 저항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줄기입니다. 특히 보천교(普天敎)와 그 중심 인물인 차경석의 활동은 당시 민중들의 정서와 열망이 어떻게 항일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아래 참조 자료들은 보천교의 항일 투쟁이 조직의 체계를 갖추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핵심에는 강증산 상제님이 예언했던 '후천 선경 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신국가 건설'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보천교의 역사는 차경석이라는 인물 없이는 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본래 동학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로, 부친 차치구는 동학 농민 전쟁 당시 정읍의 접주였으며 공주 전투 참여 및 전봉.. 2025. 5. 25.
동학농민 혁명의 핵심 내용과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 혁명은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조선 후기 민중들의 대규모 봉기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지만 오늘날에는 **'동학 농민 혁명'**이라는 표현이 그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됩니다. 이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념과 농민들의 참여가 결합되어 조선 왕조 체제를 뒤엎으려는 혁명의 이념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민란을 넘어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팟캐스트로 듣기 6분] 클릭 1. 혁명의 배경 동학농민 혁명은 복합적인 내부 및 외부 요인이 누적되어 발생했습니다. • 내부적 요인: 조선 후기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탐관오리들의 횡포 및 수탈이 극심했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며 관료들의 부패는 일상.. 2025. 5. 20.
독립운동사-8 사회주의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에 펼쳐진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는 남북 분단 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과 그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감정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 못지않게 일본과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인물들이었기에, 그 역사를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주의 운동사는 갈래가 매우 복잡하고 계보도 뒤얽혀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큰 틀에서 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팟캐스트로 듣기 7분] 클릭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국내파'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제3 국제 공산당)**의 영향을.. 2025. 5. 20.
독립운동사-6 아나키즘 독립운동 우리가 흔히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대해, 이덕일 박사는 그것이 단순한 '운동'이 아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용어의 재정의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보다는 '독립전쟁사', '일제시대'보다는 '대일 항쟁기'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던 아나키즘 독립전쟁은 우리 독립전쟁사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며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팟캐스트로 듣기 6분] 클릭 아나키즘(Anarchism)은 종종 '무정부주의'로 알려져 많은 오해를 낳았지만, 이는 일본 유학생이 그리스어 '지배자가 없다'는 뜻을 잘못 번역한 결과입니다. 이덕일 박사는 아나키즘이 정부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 2025. 5. 19.
독립운동사- 4 만주지역을 휩쓴 치열한 독립운동의 바람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다양한 투쟁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익히 배운 실력 양성을 강조한 애국 계몽 운동과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으려 했던 외교론,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던 자치론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인식이 있었고, 결국 직접적인 무력 투쟁인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과거 군 출신들이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팟캐스트로 듣기 6분] 클릭 무장 투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의열 투쟁은 개인이 폭탄이나 권총을 들고 적 기관이나 요인을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의열 투쟁을 감행한 .. 2025. 5. 18.
독립운동사-2 삼일 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삼일운동은 독립운동사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1919년을 독립운동의 전환점이자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게 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운동은 민족 자결주의의 확산,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 고종 황제의 서거, 2·8 독립선언 등 국내외 여러 요인이 맞물려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주체가 소수 양반 지식층에서 민중 전체로 확대되었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공화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중국의 5·4 운동의 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세계사적으로도 의의도 남겼습니다. 아래는 이성우 교수의 삼일 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강연의 핵심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팟캐스트로 듣기 9분] 클릭 삼일 .. 2025. 5. 17.
독립운동사-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덕일 소장의 유튜브 강의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단순히 '나라를 되찾는 투쟁' 으로 보지 않고, 어떤 나라를 새롭게 세우고자 했는가 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왕정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국', 즉 민주공화국 이었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민주공화제의 이념이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민족 내부의 양명학, 단군 신앙 등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실천과 해방 이후 친일 세력 청산의 역사적 과제를 역설합니다.[팟캐스트로 듣기 8분] 클릭독립운동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 그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2025. 5. 16.
요하 문명,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고향인가? 다음은 아래 KBS 다큐 영상을 바탕으로 정리된 내용입니다. 광활한 만주 벌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요하. 이 강은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며, 최근 이곳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적들로 인해 전 세계 역사가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팟캐스트로 듣기] 클릭(7분)5천년 전 문명의 신호탄, 홍산 문화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에 위치한 홍산(붉은 산) 지.. 2025. 5. 9.
금나라와 신라, 그리고 동북공정 아래 다큐 영상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의 기원이 신라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상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 출신 김한보이며, 청나라 황실의 성인 '아이신주어러'가 '금의 부족들' 또는 '김씨 집안'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소개하며 이러한 연결고리를 제시합니다. 또한, 금나라 지배층에 발해 유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금나라가 여진족과 발해인의 연합 정권 성격을 띠었음을 시사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겼던 금나라의 인식을 언급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간과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한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팟캐스트로 듣기] 클릭(7분)KBS에서 제작한 "금나라의 초대 황제 '아골타', 사실은 신라인의 .. 2025. 5. 9.
세종대왕과 단군세기의 특별한 만남 세종장헌대왕 실록 제1권, 즉위년(1418년) 기사“세종장헌대왕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공정대왕의 셋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閔)씨이다. 태조 6년(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시었다. 태종 8년(1408년) 2월에 충녕군으로 책봉되고 우부대언 심온의 딸과 결혼하니 이가 훗날 소헌왕후 이시다. 태종 17년에 충녕대군으로 진봉되고 이듬해 태종 18년 6월에 문무백관이 세자 제(褆)가 잘못이 많다하여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강봉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8월 10일 세자 충녕에게 양위하니, 8월 11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조선 제4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금년 5월 15일은 세종 탄신 622주년세종대왕은 할아버지 이성계가 조.. 2025. 2. 15.
[김동욱 칼럼] '한국은 중국 땅'이라는 중국夢 6·25전쟁 기간 국군 사망자는 13만 7899명, 부상자는 45만 742명에 이른다.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는 공식통계만 99만 968명에 달한다. 이런 대규모 한국인 인명피해는 누구에 의해 발생했을까.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지리멸렬했던 만큼 3년간 이어진 전쟁의 사상자 대부분은 중공군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중공군은 온정리전투와 현리전투 등 대규모 공세를 펼 때 미군보다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빈약한 국군만 집요하게 노렸다. 그런 중공군을 이끈 사령관이 펑더화이였다. 펑더화이는 국공내전 당시 서북인민해방군을 이끌며 같은 부대에서 정치장교로 활동하던 시중쉰(시진핑 현 국가주석의 아버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문화대혁명 때 함께 숙청돼 고초를 겪는.. 2025. 2. 12.
우리 역사 속의 천문대와 천문도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는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 제단으로 알려져 있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이다. 고려 공민왕 때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에는 “1세 단군왕검 51년(BC2283)에 단군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을 축조하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단을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세종실록 는 “참성단은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단 위의 네 면은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는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석단이라’ 한다. 예로부터 매년 봄, 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하늘의 별들에 제사를 지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2025. 2. 11.
고조선 가림토와 훈민정음 세종대왕이 서기 1443년 섣달 그믐날 소리글자인 훈민정음 창제를 처음 공표했다. 세계 역사상 특정 개인이 글자를 창제한 사례는 세종대왕이 유일무이하다. 그런데 훈민정음에 대해 오래된 질문이 있다. "세종대왕은 어떻게 28글자를 만들수 있었을까?"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의 글자는 옛날 글자를 모방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어떤 옛 글자일까? 훈민정음 창제보다 3,624년 앞선 고조선 시대에, 3대 가륵 단군께서 삼랑 을보륵 박사를 시켜 소리글자인 '가림토'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상들이 쓴 역사책인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는 가림토 38글자까지 뚜렷이 전하고 있다.'가림토'에 관한 기록 3세 단군 가륵(嘉勒) 2년"경자2년(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아 지방마다 말이 다르고 형상을 나.. 2025. 2. 10.
단군조선은 실존 역사다! 김종우((사)대한사랑 대외협력본부장)“선입자주先入者主”라는 말이 있다. 먼저 접한 경험이나 정보가 내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을 지낸 괴벨스가 했다는 말도 떠오른다. “거짓말도 백 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조선 후기까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데 대해서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의 주장이다.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국민이라면 광복 이후 70년이 넘도록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를 주도해 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학교에서 배운 역사를 ‘진실한 역사’로 안다. 식민사학자들이 ‘거짓 역사’를 심어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며칠 전에 국민을 대표하는 여당 국회의원 12명이 교육기.. 2025. 2. 10.
청동기 문명과 고조선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언제부터인가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1922~1938) 학자들은 “한국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단기간의 금석병용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시대를 국가가 아닌 신화시대로 설정한 조선총독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견해로 보인다.1960~1970년대까지 한국학자들 대부분이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4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김원룡은 기원전 700~800년, 김정배, 최성락은 기원전 13세기, 사라 넬슨은 기원전 20세기, 윤내현은 기원전 25~26세기라고 주장했고 북한 사회과학원 학자들은 기원전 40세기라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주장이다.1981년 국사 교과서 파동1981년 안호상 전 교육부장관 등이 ‘국사 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2025. 2. 10.
신지(神誌)의 역사 신지와 신지비사(神誌秘詞)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에 고조선 3대 단군에 관하여 “가륵단군 3년에 명을 내려 신지 고결에게 배달유기를 편수토록 하였다”고 기록됐다. 배달유기는 배달의나라 역사서를 말한다.옛 사서에서는 단군 때에 신지(神誌)란 사람이 있어서 사관이 되었다고 했는데, 신지는 관직명이고 곧 ‘신치’의 한역(漢譯)이다. 신치는 ‘신크치’의 약자이고,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며, 신가는 정부를 구성하는 ‘다섯 가(加 또는 家)의 수석대신이다.신치 곧 신가는 언제나 ‘신수두’의 제삿날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들의 이야기와 예언 류의 경계담(警戒談)을 노래하여 그것이 후대에도 계속 따라 하는 관례로 되었다.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그의 관직명인 ‘신치’를 책.. 2025. 2. 8.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진실 조선왕조의 사대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조선왕조실록은 탁월한 역사 기록이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중국의 역사기록에 구애받는 ‘사대사관’에 추종하므로 고조선 후기를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왜곡해 기록했다. 이런 역사 기록의 왜곡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 세력과의 수차례 전쟁에서 왕궁도서관에 소장한 역사서들을 빼앗기거나 불타는 비운을 겪으면서 상고시대와 고대의 귀중한 역사서를 대부분 잃은 탓이다.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1922~1938)가 조선사를 새로 펴낸 이후, 식민사관 추종 역사학자들은 “한국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단기간의 금석병용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시대를 국가가 아닌 신화시대로 설정한 조선총독부의 가이드라인에 따.. 2025. 2. 8.
한민족의 특별한 유산 - 홍익인간 홍익인간은 16글자로 이루어진 글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한분이신 하늘님이 우리 마음에 내려오시니성품이 감화되어 밝은 덕과 힘을 얻고세상에 살면서 바른 가르침을 베푸시니인간세상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더라.고려 공민왕 치세에 수문하시중 벼슬을 지낸 ‘이암’ 선생이 ‘단군세기’를 1363년 10월에 편찬했다. 이 16글자의 ‘홍익인간’은 단군세기 중에 11세 도해단군이 ‘대시전(大始殿)’을 완공한 후 목욕재계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이 가르침에서 “홍익인간의 실천에너지는 하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설명하고 있다. 배달의나라 이념환웅임금께서 신시에 배달의 나라를 개천하신 것은 BC3897년으로 단군조선의 개국보다 1565년 앞.. 2025. 2. 8.
한민족 역사의 중심 종족 한민족의 첫 번째 중심세력원동중이 지은 ‘삼성기전 하편’에 환웅의 배달의나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환국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환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3가지를 내려주시고, ‘그대는 무리 3천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라고 하셨다.”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 2025.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