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대영절大迎節)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수양제의 대침공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침]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려)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영양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 갈래는 현도玄菟 길로 태원太原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樂浪 길로 유주幽州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 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建安, 건창建昌, 백암白岩, 창려昌黎 등 여러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 탁성涿城, 신창新昌, 용도榕道 등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奴, 평곡平谷, 조양造陽, 누성樓城,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豐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게 되어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만고의 영걸, 을지문덕]
양광이 임신(단기 2945, 612)년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우리는 조의皁衣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뒤에 문충공 조준趙浚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고구려의 을파소, 광개토열제, 을지문덕, 연개소문 같은 영걸은 모두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환웅·단군성조 이래 한민족의 국교요, 동방 문명의 정교政敎인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꽃피운 역사적 인물이다.
현도玄菟: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유성都城(지금의 요령성 조양)과 노룡盧龍(하북성 노룡현) 사이에 현도가 있었다고 한다.
태원太原: 중국 산서성의 수부首府, 서기 49년 5세 모본열제의 첫 공략 이후로 고구려가 서너 차례 정 벌한 지역이다.
낙랑樂浪: 낙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었다. 종래의 통설인 평양 위치설은 한국고대사를 왜 곡·말살하기 위해 일제 식민사관이 심혈을 기울여 날조한 것이다.
유주幽州: 하북성 북부 일대이다.
조준趙浚(1346~1405):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
백상루百祥樓: 평안도 안주읍 안주 군청에서 북쪽으로 백 보 되는 거리에 있다. 고구려 때 누각으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