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에 기록된 고당전쟁은 지금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역사상식으로는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당전쟁, 특히 안시성 전투의 상황과 이후 이세민의 후회와 기타 정황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해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축소시키고 연개소문을 폄하한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사료만으로 그 당시의 정황들을 객관적으로 유추를 해보면, 오히려 환단고기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병법의 달인인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전략적으로 유린해 안시성에서 충분히 고통을 주었으며, 전쟁에 패해 달아나는 당태종 이세민을 끝까지 추격해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공포심을 주어, 끝끝내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입성해서 당태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었다는 것이 더 현실감이 있는 역사인 듯 하다. 이제는 환단고기의 자주적 시각으로 고당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가능한 피하는 게 좋겠지만,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존패가 걸린 전쟁에 임해선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혼을 버리고 국가를 위한 영웅들을 홀대하는 나라를 누가 목숨걸고 지키려 하겠는가?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17. 당태종 이세민의 대침략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격돌]
개화開化 4년(28세 보장제, 단기 2978,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振 등 수십만을 거느리고 요택遙澤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張君叉가 대패하니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세적李世勣(594-669): 당 나라의 장수, 본성은 서徐, 일찍이 수나라 군웅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밀의 부하로 있다가 당나라에 망명하였다. 당고조의 신임을 얻어 여주총관黎州摠管이 되고 영국공英國公에 피봉 되었으며 이李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정李靖과 함께 당태종 때 무장의 쌍벽이라 불린다.
*요택遙澤: 당태종이 고구려군에게 쫓겨 사경을 헤매었다는 진흙탕 길로, 황하의 북쪽 지류 왼쪽 지역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진 일대.
*백암성白岩城: 갈석산 밑에 있고, 당나라 때는 암주岩州라 하였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요서 10성, 클릭)
[안시성 공방전]
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작은 성)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虛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대답하였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錄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몰래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욕살: 고구려는 지방을 5부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지방 장관을 욕살이라 하였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슷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고연수· 고혜진의 군사가 패했다고 한 데 반하여, 본서에서는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안시성安市城: 고구려는 치稚를 설치하는 옹성壅城 축성법으로 성을 쌓았다. 치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 나오게 한 시설이다. 옹성은 적군의 공격에 직접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문 바깥에 더 붙여 쌓아 만든, 면적이 크지 않은 방어용 성벽을 말한다.
*예봉銳鋒: 창이나 칼 따위의 날카로운 끝. 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
[요동 출병으로 천추에 한을 남긴 당태종]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들어와 전쟁을 하는데 말 먹일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 갈 것이다."
이에 연수가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리를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보장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柱石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나라 왕위 쟁탈전: 당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이연(고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등극(2세 태종)하였다. 그리고 아우 원길의 아내 양씨를 취하였다. 후에 문덕황후가 죽자 태종이 양씨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단념하였다.
[중화사필의 역사 왜곡: 위국휘치]
류공권柳公樞의 소설에, "당나라의 6군六軍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英公(이세적)의 군기가 흑기*(고구려의 군대 깃발)에 포위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新舊庸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通鑑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서 수치스런 일을 숨기려 한 것[爲國諱恥]이 아니겠는가?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건안성은 안시성 남쪽 70리에 위치. 지금의 하북성 당산唐山의 남쪽 경계에 있었다)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군의 군량은 이미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는 다면 대세가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두드리며 여유있게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에 올라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이 노기가 극도에 달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녀 모두 생매장시킬 것이라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건히 지키므로 공격을 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에 수군 제독 장량張亮*의 군사는 사비성沙卑城*(비사성卑沙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요동반도 끝. 대련만 북안에 있었다)에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鳥骨城*(지금의 요령성 봉성현鳳城縣으로 비정)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관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장손무기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섬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된다. 지금 건안建安 · 신성新城에 있는 적군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거느린 말갈 군사 또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서 낙랑의 여러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적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서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먼저 안시를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이 문제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밤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공격하였다. 적진에서는 서로 짓밟혀 죽고 상처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드디어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군세를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 모든 진영은 싸울 생각을 거의 잃어버렸다. 부복애博代愛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당하고, 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류공권(1132~1196): 고려 중기의 명신. 자는 정평正平.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문화文化.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6세 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이 되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예학 지식으로 칭송을 들었다. 문학과 서예에 능했다.
*흑기黑旗: 흑색 깃발은 고구려의 군기. 흑黑은 검은색이니, '검'은 신성神聖을 상징한다. 당군은 붉은 깃발[赤旗]. 수극화水克火의 이치가 담겨 있다.
*신구신당新舊唐書: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로,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먼저 후진後晉때 유향劉珦· 장소원張昭遠이 구당서(200권)를 완성하였으나, 송宋의 구양수歐陽修 등이 개수改修하여 신당서를 지었다. 구당서,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삼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통감通鑑: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말함. 송宋의 사마광이 쓴 편년체 역사책.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부터 후주後周 세종世宗에 이르기까지 1,362년 간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장량張亮: 당나라 때 영양榮陽사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이도종李道宗: 자는 승범承範. 강하군왕江夏君王에 봉해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오름.
*장손무기長孫無忌: 낙양 사람으로 자字는 보기輔機. 당태종을 보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오르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졌다. 특히 당태종의 왕비 문덕황후의 오빠로서 당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낙랑: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 지역으로, 본래 배달· 단군조선 이래로 줄곧 우리 땅이었다. 특히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도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대에 중국과 조선 간에 군사적 충돌이 가장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양만춘의 대승]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欒河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스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潑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고려의 목은牧隱 이색이 유림관楡林關을 지나며 지은 시 '정관음貞觀吟'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고구려쯤이야 호주머니 속의 물건일 뿐이라 하더니, 어찌 알았으리오 검은 꽃(눈)이 흰 깃(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을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
*포오거蒲吾渠: 삼국사기 보장왕 4년 조에서는 포오거를 포구蒲溝라 하였다.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서쪽에 있다(중국 역대 지명 대사전)
[연개소문의 장안 입성과 환단 이래 실지 회복]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新城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易水* 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補道城*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이고,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上谷*(지금의 하북성 회래현懷來縣)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하여,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역수易水: 중역中易· 북역北易· 남역南易 세 갈래가 있는데, 모두 지금의 하북성 역현易縣 경계에서 흘러나온다.
*용도성補道城: 고려진高麗鎭으로 곧 '고구려의 진鎭'을 뜻한다.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에 있었다. 현재는 북경시 순의현에 고려영高麗營이라는 지명으로 뚜렷이 남아 있고 성곽과 해자垓字도 있다. '북경 순의현지'에 "당나라 때 고구려인이 이주해 왔다[唐代內徙的高麗人于此定居]"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고구려 영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하선을 훨씬 넘어 북경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러한 고대 지명들이 입증하고 있다.
*창려昌黎: 지금의 하북성 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다. 이곳에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는데, 당나라 때는 요주遙州라 개명하였다.
*강좌江左: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등 양자강 하류 북쪽 지역을 말한다(중문대사전 권5), 일찍이 당唐의 관리로 있던 고운 최치원은 상관에게 올리는 글에서, 단군 이후 다시 중원 대륙의 옛 땅을 회복[多勿]하여 통치한 고구려, 백제의 위용을 사실 그대로 직필直筆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당 태종(재위 626~649)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당 고조)을 도와 당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중국 역사상 최고 영주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그의 치세를 특히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칭송한다. 그러나 동방 한민족사를 왜곡 날조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세민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 천하는 크게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만 빈객이 아니로다. 후사가 병사와 군마의 강성함과 모신들의 권유로 인해 정벌을 한다면 전쟁의 재앙이 바야흐로 시작될 터이니, 짐이 그래서 몸소 저들을 복속시켜 후세의 우환을 남기지 않으려 하노라" 라고 하였다(신당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고구려 조). 그리하여 친히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돌아갔다.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에서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은 왼쪽 눈의 병이 악화되어 4년 뒤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아들 고종에게 남겼다. 당태종은 재위 시에 특히 한민족의 고대사 왜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마도 지금의 시진핑이 당태종의 환생인가? 그리하여 고구려·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깎아내리고 중국 본토에서 몰아낼 양으로 안사고· 소덕언· 이연수 등 많은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진서晉書, 양서梁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등을 왜곡해 놓았다. 특히 진서晉書는 자신이 직접 붓을 들었으므로 '태종어찬진서太宗御撰晉書'라 불리는데, 군왕이 직접 역사 편찬에 참여하고 지도한 나쁜 전례를 남겼다.
[당태종의 요동 영유권 주장과 고구려 침략의 명분]
요동이 본래 중국 땅이라는 당태종의 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보장왕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하북성 난하 동쪽 지역을 말한다. 고구려 당시 요수遙水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당태종은 넷째 아들 위왕魏王 태泰를 시켜 '괄지지'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여기서 역사상 처음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옛날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 자리였다[高麗都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라고 왜곡· 날조해 놓았다. 이와 같은 말을 한 의도는, 고구려 영토가 본래 자기네 땅이었으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침략을 역사적으로 정당화· 합리화시키기 위한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또 저 유명한 당서唐書, 배구전裵矩傳에서도 이와 똑같은 억지 주장을 하였다. 수·당 때 사람인 배구裵矩는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이곳(고죽국)에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이 땅(고죽국)에 3군(三郡: 낙랑· 현도· 대방)을 나누어 설치했다[高句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箕子, 漢時分爲三郡]"(수서; 구당서; 신당서; 삼국 유사)라고 주장하였다. 고죽국은 지금의 난하 서부 연안에서 대릉하 중류에 걸치는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따라서 배구가 고구려의 땅을 고죽이라 했지만, 그것은 수. 당나라 때에 고구려가 지금의 하북성 난하 유역까지 다스렸음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은 한나라 때의 3군(낙랑· 현도· 대방)도 종래의 통설과 같이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옛날 고조선의 제후 국가 고죽국 땅인 난하 유역 일대에 있었음을 명확히 입증해 준다. 결국 당태종의 말과 배구의 주장은 모두 고구려 영토가 본래 자기네 땅이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 날조하여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역사 왜곡이 침략의 도구로 악용된 가장 좋은 실례를 우리는 일본이 임나 일본부설을 날조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임나 일본부설을 근거로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지배를 정당화 · 합리화했다.
[당태종 죽음의 원인]
당태종은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맞은 왼쪽 눈의 상처 때문에 죽었다. 초인樵人에게 야담 처럼 전해 오는 이 사건을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감추고,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우리나라 사서에도 그런 말이 없다. 그러나 목은 이색의 정관음이나 노가재 김창흡의 천산시에서 사실 그대로 노래했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서는 당태종의 사망 원인을 내종, 학질, 이질 등으로 모두 다르게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자기 나라의 수치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이 마치 송宋 태종太宗이 태원太原에서 화살에 맞은 상처 때문에 죽은 것을 사실史實에서 감춘 것과 같다고 하였다. 목은 이색의 유명한 시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태종의 연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 고구려쯤이야 호주머니 속의 물건일 뿐이라 하더니 어찌 알았으리오. 검은 꽃(눈)이 흰 깃(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을!
[당태종의 항복]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의 '안시성전역'이라는 제하題下에 1)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고 이로 인해죽은 사실과 2)안시성주 양만춘과 연개소문이 대립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3)요동성. 개평성 등을 내준 것은 연개소문의 예정된 전략에 따른 것이며, 그러한 전략에 말려들어 당태종이 자멸한 것이라 하여 위대한 전략가로서의 연개소문을 극찬하고 4)당의 일부 영토 또한 연개소문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밝혔다.
[연개소문의 중국 정벌과 당시 고구려 영토의 경계]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침략을 격퇴한 뒤에 중원을 경략한 이 역사적 사실이 본서 태백일사 이외의 기록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지금 북경 조양문朝陽門 밖 7리 땅에 황량대를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는 지명이 십여 곳인데, 전설에는 황량대가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저'라고 속여서 고구려군이 내습하면 복병으로 요격한 곳'이라 하였으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다. 또 산동과 직례 등에 띄엄 띄엄 '고려高麗' 2자字로 시작되는 지명이 있고, 전설에는 이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고려진'과 '고려성'이다"라고 기록하였다(신채호, 조선상고사).
[삼국사기에 기록된 안시성 전투]
〔3년(644) 11월에〕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강주(江洲)·회주(淮州)·영주(嶺州)·협주(硤州)의 군사 40,000명, 장안과 낙양의 모사(募士) 3,000명, 전함 500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도록 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보병과 기병 60,000명과 난주(蘭州)·하주(河州) 2주의 항호(降胡)를 이끌고 요동으로 가도록 했는데, 〔차후에〕 양군이 합세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원문보기)
〔4년(645)〕 강하왕 〔이〕도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성의 동남쪽 구석에 토산을 축조하였다.註 001 〔안시〕성에 바짝 다가오니 성 안에서도 성을 그 성벽을 높여 이를 막았다. 사졸이 순번을 나누어 교전한 것이 하루에 예닐곱 차례였다. 충차와 포석(礮石)註 002으로 그 망루와 성가퀴를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이〕도종이 발을 다치니, 황제가 친히 그를 위해서 침을 놓아 주었다. 토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모두 60일 동안 500,000명의 공력을 들였다. 토산의 정상이 성에서 몇 장(丈) 떨어져 있었고, 아래쪽으로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이〕도종이 과의(果毅)註 003 부복애(傅伏愛)註 004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적에 대비하게 하였다.註 005
〔4년(645)〕〔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을 눌러 성벽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지휘소를 이탈해 있었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벽이 무너진 곳에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빼앗고 웅거하였으며, 해자를 파고 이를 지켰다.註 001 황제가 화를 내며 〔부〕복애를 참수하여 〔그 목을〕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註 002 〔이〕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사형이다. 그러나 짐은 한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일註 003이 진목공(秦穆公)註 004이 맹명(孟明)註 005을 등용한 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네가〕 개모성과 요동성을 격파한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따름이다."註 006
〔4년(645)〕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한 양식이 거의 바닥나 간다고 생각하여 칙명을 내려 회군하도록 하였다.註 001 먼저 요주·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병력을 시위하고 돌아섰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가 예의를 갖추었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비단 100필을 주어 군주를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도록 하였다.註 002
〔4년(645)〕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었으므로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었다.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0,000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써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가 몸소 말채찍에 풀을 묶어 일을 도왔다.註 001
〔4년(645)〕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 메우도록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이 축축이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 칙명으로 길에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4년(645)〕 〔이 전쟁에서〕 모두 합쳐서 현도·횡산(橫山)· 개모·마미(磨米)·요동·백암·비사·협곡(夾谷)·은산(銀山)· 후황(後黃)의 10성이 함락되었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기어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0,000명이었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이후 항상 울분에 빠져 탄식하다가 머지않아 병사하였고, 〔고〕혜진은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건안·주필의 세 차례 큰 전투에서 죽은 우리 군사와 당의 병마가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원문보기)
〔4년(645) 10월에〕 황제는 성공하지 못하였기에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전쟁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