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구려·백제의 통치 영역과 수 문제의 대침략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摠菅 위충韋冲*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연태조淵太祚: 연개소문의 아버지, 중국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를 태조라 하였고 그 벼슬이 막리지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연태조를 동부 혹은 서부 대인 대대로라 하였다. *등주登州: 지금의 산동성 봉래蓬萊, *위충韋冲: 수나라의 등주총관]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王爵]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準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明治*연간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명치明治: 21세 문자열제(491~519)의 연호, 명치 연간은 곧 백제의 동성왕, 무령왕 때에 해당한다.]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 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楊堅*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을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정되고 해성이 평온해졌다.
[*양견楊堅: 수나라를 세운 문제文帝의 이름. 처음에 북주北周(557~581)를 섬겨 상국相國이 되었다가 임금을 죽이고 자립하여 수나라를 세웠다.]
[수 문제의 침공과 격퇴]
이해(단기 2931,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楊諒, 왕세적王世績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遙澤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猴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後陣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양량楊諒: 수문제의 넷째 아들. *왕세적王世績: 수나라 때 강남의 진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형주총관이 되었다. *정주定州: 지금의 하북성 정주시定州市. *요택遙澤: 황하의 북류北流 왼쪽 지역에 있었고, 지금의 북경 동남에 있는 천진 일대이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남수북벌 정책]
고구려 좌장左將 고성高成(영류왕)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막리지: 고구려 때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던 관직명. *남수북벌南守北伐: 남쪽, 즉 백제· 신라 쪽은 방어만 하고 북쪽, 즉 중국 지역을 공격하자는 고구려 국방 외교의 기본 정책, 엄밀한 의미에서는 남수북벌이 아니라 남수서벌南守西伐이라 해야 옳다. 단재 신채호에 의하면 고구려는 국초 이래 한반도 쪽은 지키기만 하고 서쪽의 중국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장수제 때에 이르러서 서수남진西守南進으로 변경하였다는 것이다. 후일 서수남진파를 쿠데타로 실각시키거나 살해하고 대對 중국 강경 노선을 채택한 연개소문을 단재는 극찬하였다(신채호, 조선상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