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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

고구려국본기-15

by 광명인 2024. 3. 2.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묘사하기를 "그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몸가짐이 웅장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서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고, 또한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따랐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고 묘사한다. 이 글로 유추해보면 연개소문은 도량이 넓고, 매우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극찬하며, 그가 병법에 능해 당태종의 장수, 이정에게 병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한다. 또한 대만에서는 연개소문이 '중국을 응징한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과연 어떻게 그렇게 호탕한 기상과 비상한 재주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의 정신적,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환단고기는 연개소문의 부친과 조부는 두 분 다 고구려의 막리지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우선 훌륭한 가문의 핏줄을 받아 태어난 듯하다. 그리고 "아홉 살조의선인에 뽑혔다"라고 하니, 어려서부터 강한 스승 밑에서 심법을 포함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기본 교육을 철저히 잘 받은 듯 하다. 조의선인이란 신교의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일종의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집단이다. 신라의 화랑과 같은 조직인데, 평소에는 심신과 학문을 닦으며 무예를 연마하지만, 국가 유사시에는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국란을 극복하는 자들이다. 고수전쟁 당시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조의 20만 명'이 130만 명의 수나라 대군을 궤멸시킨 것이 조의선인의 힘이다. 참고로 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도 조의선인 출신이다. 따라서 삼신 상제님을 모시며, 신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선도와 무예를 수련했던 조의皂衣의 교육을 어려서부터 철저히 연마하고 소화한 인물이 연개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정신적, 사상적 배경은 환국으로부터 전수된 신교의 낭가사상이었던 것이다. 

15. 연개소문의 생애와 대인의 풍모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고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참고로 1923년에 중국 허난성 뤼양(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의 묘지墓誌에는 '남생의 증조부 자유子遊(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조부 태조太祚(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曾祖子遊祖太祚竝任莫離支]"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직 환단고기에만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다.]

연개소문은 홍무 14년(26세 영양제, 단기 2936, 603) 5월 10일에 태어 났고 아홉 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 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였고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해滄海 용신龍神이 다시 화신化身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고성제(27세 영류제)를 내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高臧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寶臧帝(28세, 단기 2975, 642 ~ 단기 3001,668)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자신의 주인이 되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開物平等] 되었다. 또한 세 마을[三忽]에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皂衣仙人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1) 연개소문(603~657): 불교·도교 등 외래 종교 사상을 배격하고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이다. 연개소문은 당대 최고 병법가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상 최고 영주英主 중의 한 사람으로 숭앙 받는 당태종도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연개소문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말려들어 끝내 절명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당태종 때의 명장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에게서 병법을 배워 당나라의 제1 명장이 되었고, 그가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중국에 이름 높은 7종의 병법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원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그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한 고어가 많다"라고 하였다(신채호, 조선상고사). 지금도 연개소문은 대만에서 '중국을 응징한 무서운 혁명가'로 추앙 받고 있다.


2) 조의皂衣(조의선인):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신교의 종교 군대)이다. 이 조의선인을 한민족 고유의 선비라 말할 수 있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 외래 사상에 물들지 않은 한민족 본연의 선비상은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상무尙武적 무사武士’였다. 
조의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항상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은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이었다. 평상시에는 삼신상제님의 신교 진리를 터득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길을 추구하고, 심신과 학문을 닦으며 무예를 연마했다. 그러나 국가 유사시에는 항상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국가의 위급을 구하였다. 일찍이 수양제 · 당 태종의 침입과,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궤멸시킨 주인공도 바로 이 신교의 종교 군대(조의선인· 재가화상군· 선랑· 국선)였다. 
이와 같은 낭가 제도의 기원환국 시대에 시작되어 그 뒤로 배달의 제세핵랑濟世核郞->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정명악 주장), 신라의 화랑花郞->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서긍의 고려도경) 또는 선랑仙郞, 국선國仙으로 계승되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명백히 밝혔듯이어진 재상, 훌륭한 장수, 충신, 용감한 병사[賢相 · 良將 · 忠臣 · 勇士]가 모두 이 신교의 낭가 무사인 조의선인· 화랑· 국선· 선랑에서 나왔다. 신라의 화랑에 세속오계가 있듯이 조의에도 계율이 있어 이를 참전계參佺戒라 불렀다. 참전계의 핵심 덕목은 충忠· 인仁· 의義· 지智· 예禮이다. 고구려·수나라의 전쟁 당시에도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조의 20만'이 전쟁터에 나가 130만이나 되는 수의 대군을 궤멸시켜 인류전쟁사에 기록을 세웠다.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대몽항쟁 때는 삼별초로 이어졌다. 고려 시대 선랑·국선이 불교와 일체가 되어 선불仙佛 합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널리 알려진 『고려사』의 민적閔頔에 관한 기사이다. "충렬왕(25세, 1274-1308) 이 민적을 국선國仙으로 임명했다[閔頔字樂全⋯忠烈聞之, 召見宮中, 目爲國仙]"라고 한 기록에서, 몽고 지배라는 최악의 국난기에도 국선·선랑 제도를 지켜 나갔던 충렬왕의 불굴의 집념과 의지, 그리고 고려의 자주정신과 주체성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하였으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잠재되어 조선 시대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졌고, 구한말의 동학정신으로 부활해 항일 구국 운동 3·1 운동 등으로 민족의 위기 때마다 표출되었다. 신교를 종주로 하는 한민족의 역사 개척 정신이 분출시킨 이 같은 상무 정신의 맥은 이제 역사와 인류 문화의 뿌리를 찾아 원시반본原始反本하는 세계의 인종 개벽 시대를 맞이하여, 신교 시대의 민족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민족혼의 대개벽'과 '인류의 정신개벽', 나아가 전 우주 질서의 새로운 가을개벽'을 외치고 나온 대한사랑大韓史郞에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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