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중국 양자강 남쪽까지 지배]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20세 장수제, 단기 2746~2824, 413~ 491)는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熊津江*(지금의 금강)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 되었다. 그리고 북연北燕*(북연 407-436: 중국 5 호16국 시대 때 16국 중의 하나 후연後燕에서 벼슬하던 고구려 사람 고운高雲이 광개토열제에게 대패한 후 연나라의 왕 모용희慕容熙를 살해하고 북연을 세움), 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또 신라의 매금寐錦*(신라국 왕을 말함)과 백제의 어하라於瑕羅*와 함께 남평양(지금의 서울)에서 만나,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21세 문자제, 단기 2824~2852, 491~519)*는 연호를 명치明治로 고치셨다. 11년(단기 2834, 501)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우리(고구려)에게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25세 평원제平原帝, 단기 2892~2923, 559 ~590)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연호를 대덕大德으로 바꾸었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단기 2909, 576)년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溫達*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碣石山*과 배찰산拜察山*을 치고, 추격하여 유림관褕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씨가 북위에서 갈라진 서위를 빼앗아 세운 나라. 후에 북주의 양견이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수隋로 고침)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로써 유림진褕林鎭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褕林*(현 섬서성 유림)은 지금의 산서山西 경계이다.
1) 연호年號: 군주제도 하에서 임금 자리에 오른 해부터 물러날 때까지 치세 연차治世年次에 붙이던 칭호. 연호는 종주국이 사용하고,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종주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곧 당시 동북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망할 때까지 모든 열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본서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는 고구려가 당시 중국의 한漢, 진晋, 북위北魏, 수隋, 당唐 등 역대 왕조를 제압하고 동북아를 호령하던 대제국 시절의 위용을 실감나게 전한다.
2) 건흥建興: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왕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장수홍무호태열제는 고구려 위성국인 북연이 북위에게 망하게 되자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북연 백성을 탈출시켜 고구려로 호송했다. 그러나 북위군은 고구려의 엄청난 위세에 질려 감히 접근도 할 수 없었다. 북위의 왕은 기병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지만 신하들이 극구 만류하여 포기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막강한 군사력에다 남조南朝와 북방의 유연柔然을 징검다리로 연결, 외교적 포위망을 구축하여 북위를 강하게 압박했다. 중국의 정사 인 '위서魏書'의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天興元年(398) ...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伐巧十餘萬口, 以
充”이라 하여, 북위의 산서성 대동에는 고구려인 36만 명과 기예 1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가 거주했다고 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복속시키고 마치 제집 드나들 듯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북위의 외척으로서 북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수열제가 붕하자 북위 효문제가 흰 위모관과 베布 심의를 만들어 입고 동교東郊에서 애도식을 거행한 것만 봐도 고구려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사가들과 김부식은 북위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고, 도리어 장수열제가 북위에 해마다 조공을 바친 것으로 날조하여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였다.
3) 실위室韋: 거란의 북쪽에 있던 몽골족의 한 갈래. 지금의 만주 대흥안령산맥과 흑룡강 중류 일대에 거주하였다. 실위는 고구려에게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절대적으로 의존한 종족이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는데 몽고 동부의 할흐곰솜 지역과 우란호터 발굴된 고구려 성터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곳에서 고구려인의 돌절구가 출토되었고 인근 주민들은 한결같이 고려성이라 부른다. 고구려는 또 북위와 대치 중이던 유연柔然과 긴밀히 연계하는 한편 실위 남서쪽, 즉 해발 1,700미터의 대흥안령산맥 너머에 있는 지두우地豆于(동우주무신東烏朱穆沁旗)를 분할하여 많은 군마를 얻기도 하였다.
4) 어하라: 어하라는 고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 패대浿帶 땅에 신왕국을 세운 뒤에, 고주몽 성제에게 책봉 받은 왕의 칭호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나와 있듯이 고구려는 백제·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 왕을 어하라라 불렀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였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주서'의 '백제전'에 "백제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왕호王號는 어라하於羅瑕인데, 백성들은 건길지建吉支라 불렀다[王姓, 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建吉支, 夏言竝王也]"라고 하여, 어하라於瑕羅(어라하: 백제말의 王, 長)는 백제 왕을 부르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5) 온달(?~590): 평원제 때의 장수. 저 유명한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온달장군의 후주(後周=北周) 정벌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당시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러오자, 왕(평원제)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질풍같이 싸워서 적군 수십 여명의 수급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분격하여 크게 이겼다"라고 하여, 『환단고기』의 기록을 방증한다.
6) 갈석산: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인 갈석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창려昌黎에 있다. 통전通典의 「주군전州郡典」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었으며, 장성은 이 산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이고, 장성에 의해 잘리는 물이 요수 즉 오늘날의 난하인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수성현을 오늘의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하였으나, 이것은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던 낙랑군을 대동강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억지로 맞춘 억설에 지나지 않는다.
7) 배찰산: 배산拜山· 백분산이라고도 하고 음산산맥陰山山脈에 있으며 몽고의 차할부[察哈爾部]의 경계에 있다(계연수 설). 배찰산은 열하성 경붕현經棚縣 경계에 있었다(중문대사전 권4) 경붕현은 극십극등기克什克騰棋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내몽골 자치구 內豪古自治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