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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

고구려국본기-14

by 광명인 2024. 3. 2.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는 연개소문중국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도록 왕에게 주청했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고구려의 1백 여명의 대신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또한 왕을 시해해 그 시신을 토막내어 버린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는 영류왕이 친당 정책을 펴, 점점 고구려의 주체성을 상실했고, 당나라의 도교를 수입해서 노자의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으며, 수십만의 백성들을 장성축조에 동원하여 국력을 소진시키니, 연개소문이 이를 왕에게 중지하도록 주청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다 연개소문을 주멸하려던 왕과 뜻이 맞았던 소수의 여러 대신들이 연개소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왕의 계획이 틀어지자 영류왕은 평복으로 도망가다 백성들에게 조칙을 내렸으나 아무도 따르는 이가 없어서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을지문덕광개토태왕과 더불어 우리나라 4천년 역사의 영웅이라고 했다. 역사는 일종의 해석학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어떠한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할 것인지는 역사가의 역사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고려의 김부식은 당시 중국의 유교적 세계관에 빠져 중국에서 성군으로 받드는 당태종 이세민의 군대를 괴멸시킨 연개소문의 기개와 인물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중극측 입장을 그대로 서술한 듯 하다. 

14. 연개소문의 강렬한 주체 정신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자상老子像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 하셨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시어 장성을 쌓는데 부여현에서 남해부까지 그 거리가 천여리였다.

[부여현에서 남해부: 부여현은 길림성에 있는 부여현 (하얼빈과 장춘 사이)이고, 남해부는 발해 때 오경五京의 하나인 남경 남해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요령성에 있는 해성海城이다.]

이때에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셨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고, 휘하 군사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열병식을 보자고 하니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松壞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시고 말았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1) 고성高成: 고구려 27세 영류제 (618-642)의 이름. 휘는 건무建武. 26 세 영양제의 이복 형제. 영류제는 수와의 전쟁 이래 계속되어 온 중국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자 새 왕조인 당에 대해 우호 정책을 펴 나갔다. 이것이 당에 대한 사신 파견, 태자 환권을 당에 입조, 당에 봉역도를 바침,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 송환, 중국 역서의 반포, 청년 자제의 당나라 파견 등으로 나타났다. 고구려는 이후 주체 의식이 약화되고 망국의 운수 길로 들어섰으나 민족주의자 연개소문에 의해 다시금 신교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2) 영류제의 도교 도입: 삼국유사』 「흥법興法」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조에는 “연개소문이 또 동북·서남에 장성長城 쌓기를 주청하였다[盖金叉奏築長城東北西南]”라고 하여, 장성을 쌓은 것이 연개소문의 주청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노자상과 도사道士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設이니라"(신채호, 『조선상고사』)라고 비판하여, 『태백일사』의 본 기록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태백일사』의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했다고 하는 기록과 정반대이다. '삼국사기' 보장왕 2년 조에는 연개소문이 유불선 삼교 중 하나가 없어도 불가하다 하여 당唐에서 도교를 수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 시절에 불교는 탄압을 받았고, 보덕화상이 도망쳤다. 철저한 반당주의자인 연개소문이 적국 당의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려고 애써 주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은 적국의 영웅인 연개소문을 좋게 말할 리 없는 중국 사서를 무분별하게 인용한 데서 기인한다.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전'에서 김부식이 연개소문을 심히 매도하고, 도교 수입 운운한 것은 철저한 사대주의적 중상모략이다.

참고 영상: 우리나라의 4천년 역사 영웅 연개소문(단재 신채호)

참조 자료(삼국사기): 연개소문이 당에 도교를 요청했다는 왜곡된 기사(원문보기 클릭)
[2년(643)]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성한데 도교는 아직 흥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컨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요청하여 국인을 가르치도록 하소서.” 대왕이 대단히 옳다고 여기고, 〔당에〕 표를 올려서 사정을 전하며 〔도교를〕 요청하였다. 〔당〕 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아울러 『노자도덕경』을 하사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불교사원을 가져다 그들을 머물게 하였다.

참조 자료(삼국사기): 연개소문이 1백여 명을 죽이고 왕을 시해했다는 왜곡된 기사(원문보기 클릭)
여러 대인(大人)이 〔영류〕왕과 함께 몰래 〔연개소문을〕 죽이고자 논의하였는데, 일이 새어 나갔다. 〔연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모두 모아놓고, 마치 군대를 사열할 것처럼 하였다.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안주를 성대히 차려 두고, 여러 대신(大臣)을 불러 함께 〔사열식을〕 직접 보자고 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그들을 모두 살해하니, 대략 1백여 명이었다. 〔그리고〕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왕의 시신을〕 잘라 여러 토막으로 내고 도랑 안에 버렸다.

참조 자료(삼국사기): 고구려인들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다는 왜곡된 기사(원문보기 클릭)
〔연개소문은〕 매우 위엄이 있었는데, 몸에는 5도(刀)를 찼으며, 주위에서 감히 올려볼 수 없었다. 매번 말을 타고 내릴 때 항상 귀족 출신의 무장(武將)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를 발로 밟았다. 밖에 나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군대의 행렬을 펼쳤는데,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크게 소리치면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기를 구덩이나 골짜기도 꺼리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매우 괴로워하였다.

참조 자료(삼국사기): 영류왕이 당에 봉역도를 보내다라는 기사(원문보기 클릭)
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봉역도는 제후의 강역(疆域)을 담은 지도란 뜻으로, 고구려의 강역이 담겨져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덕일 소장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가 이렇게 왜곡된 이유는 김부식연개소문에 관한 기사를 고구려 중심에서 쓰지 않고,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고-당전쟁에서 패배해 연개소문을 마치 흉악한 괴물이나 원수처럼 여겨 연개소문을 폄하한 중국측 사료를 인용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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