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선비족 후손인 수양제의 침략을 격퇴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26세 영양제, 단기 2923~2951, 590~ 618) 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隋나라 왕 양광楊廣*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上國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양광楊廣: 수隋(569~618)의 2세 왕 양제楊帝의 이름, 문제文帝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고구려 원정 실패와 지나친 토목공사 등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결국 당唐에게 명망당하였다.
[수양제의 피격 사건]
홍무弘武*(영양제의 연호) 25(단기 2947, 614)년에 양광이 또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卑奢城*(지금의 만주 요동반도 끝에 있는 대련만大連灣 북안에 있던 고구려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려 하거늘, 열제(영양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斛斯政*(수나라 예부상서 양현감의 부하로서 시랑 벼슬에 있었는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진중陣中에서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후일 고구려는 수양제의 요구에 따라 곡사정을 수나라에 인도함)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一仁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表를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小努]를 꺼내 쏘아 가슴을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羊皿이 양광을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懷遠鎭*(하북성 북쪽에 있는 해상 기지)으로 철병하기를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인류 문명의 종주국을 노래한 찬가]
뒷 사람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해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지라.
문무에 뛰어나신 우리 선조 환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으셨네.
고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네.
유유紐由, 일인一仁, 양만춘은
저들이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 왔으니,
저 유철(한무제)· 양광(수양제)· 이세민(당태종)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구나.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자[尺]나 되고
온갖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
*유유紐由: 11세 동천열제 때의 충신. 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이 침략, 환도성이 함락되자 열제는 남옥저南沃沮(요동반도)로 난하였다. 그러나 추격이 심하여 매우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유유가 열제에게 계책을 올리고, 항복을 가장하고 위의 군중軍中에 들어가 위나라 장수를 비수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수를 잃고 큰 혼란에 빠진 위군은 고구려군의 대반격을 받아 참패하고 낙랑(대동강 평양이 아님)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자, 동천열제가 다음해 (24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