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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176

단군세기-전문 [[[국조단군왕검 재위 93년]]]『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시요, 어머니는 웅씨왕熊氏王의 따님이다. 신묘(환기 4828, 신시개천 1528, BCE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태어나시니,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원근 사람들이 모두 경외敬畏하여 따랐다. 14세 되던 갑진(신시개천 1541, BCE 2357)년에 웅씨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천거하여 ‘대읍국大邑國*’의 국사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무진년 당요唐堯때에 단국檀國에서 돌아와 아사달의 박달나무가 우거진 터에 이르시니 온 나라 백성이 천제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구환족九桓族을 합쳐서 하나로 통일하시고 신성한 덕화가 멀리까지 미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성조께서 비왕으.. 2024. 6. 17.
삼한관경본기-전문 배달을 계승한 단군왕검, 송화강 아사달에서 건국1. 환웅천황의 제천 행사 태백산(백두산)이 북쪽으로 달려가 우뚝 솟은 장엄한 모습이 비서갑裵西岬 경계에 까지 이어졌고, 그곳에 물을 등지고, 산을 안고서 다시 꺾어져 감돈 곳이 있는데, 바로 대일왕大日王(환웅 천황)께서 천제를 올리시던 곳이다.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해 온다. 환웅천황이 이곳에 순행하여 머무시면서 사냥하여 제사 지내실 때, 풍백은 '천부경天符經'을 거울에 새겨 진상하고, 우사는 북에 맞추어 둥글게 춤을 추고, 운사는 백 명을 칼로 무장시켜 제단 밑에 늘어서서 지켰다.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러 산에 가실 때 의장이 이처럼 성대하고 엄숙하였다. 이 산의 이름이 불함不成이다. 지금은 완달完達이라 하는데, 그 음이 비슷하다. 2. 비서갑의 초대 왕.. 2024. 6. 16.
신시본기-전문 1. 배달 개창기의 취화법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掌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縠 벼슬을 맡았으나, 당시 씨 뿌리고 거두는 법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또 불씨[火種]가 없어 걱정하였다.어느 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높고 큰 나무가 말라 황량하게 줄기를 드러내고 오래된 나무 줄기와 말라버린 가지가 서로 얽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거센 바람이 숲 속에 불어닥치니, 땅 위의 크고 작은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고 오래된 나무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번쩍번쩍 빛.. 2024. 6. 10.
환국본기-전문 1.  인류 창세 문명의 아버지, 환인천제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옛날에 환인이 계셨다. 천산에 내려와 거처하시며 천신께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셨다. 백성의 목숨을 안정되게 보살피고, 세상의 뭇 일을 겸하여 다스리셨다. 사람들이 비록 들에 거처하나 벌레와 짐승의 해가 없었고, 무리지어 행동해도 원망하거나 반역하는 근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사귐에 친하고 멀리하는 구별이 없고,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고,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평등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소임을 나누었다.당시에는 비록 법규와 명령이 없었으나 백성들 스스로가 화평하고 즐거워하며 도리에 순종하였고, 병을 제거하고 원한을 풀어 주며, 다친 자를 돕고 약한 자를 구제하니, 원한을 품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 2024. 6. 10.
일십당 이맥李陌-태백일사 저자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1455~1528) ) (삼신오제본기 전문보기) (소도경전 전문보기)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맥은 행촌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자는 정부井夫,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는데,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50세(1504)에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이때의 귀양살이에 대해 이맥은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맥은 그 먼 곳으로 집안에서 간직하던 책 상자를 가지고 갔다. 그 상자에 담긴, .. 2024. 6. 10.
소도경전본훈-전문 1. 삼신상제 제천행사를 참관한 선인 발귀리의 송가신시 시대에 선인 발귀리發貴理가 있었다. 대호大皞(태호太皞, 태호복희太昊伏羲)와 동문수학하였는데, 도를 통한 후에 방저方渚와 풍산風山사이를 유람하며 자못 명성을 얻었다. 아사달에 와서 제천 행사를 보고 예식이 끝난 후에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그 글은 이러하다. 만물의 큰 시원[大一 ]이 되는 지극한 생명이여! 이를 양기良氣라 부르나니 무無와 유有가 혼연일체로 존재하고 텅 범[虛]과 꽉 참[粗]이 오묘하구나. 삼(三神)은 일(一神)로 본체[體]를 삼고 일(一神)은 삼(三神)으로 작용[用]을 삼으니 무와 유, 텅 빔과 꽉 참(정신과 물질)이 오묘하게 하나로 순환하고 삼신의 본체와 작용은 둘이 아니로다. 우주의 큰 빔 속에 밝음[光]이 있으니, 이것이 신神의.. 2024. 6. 9.
삼신오제본기-전문 1. 우주의 주제자 삼신상제님의 조화권능표훈천사表訓天詞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시大始에 상하와 동서남북 사방에는 일찍이 암흑이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오직 한 광명뿐이었다. 천상 세계에 ‘문득’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 상제님[三神卽一上帝]이시다. 주체는 일신(한 분 상제님)이시니,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시다. 삼신三神은 조화로 만물을 빚어 내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지만,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신다. 가장 높고 높은 하늘에 앉아계시니, 그곳은 천만억토이다. 삼신은 항상 광명을 크게 방출하고, 신묘한 기운을 크게 발하며, 상서로운 기운을 크게 내리신다. 기를 불어넣어 만유를 감싸고, 열을 내뿜어 만물의 종자를 자라게 하며, 신명神明들.. 2024. 6. 9.
북부여기, 가섭원 부여기-전문 [고조선의 국통 계승자, 해모수단군 즉위]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 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策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劍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시고, 날이 저물면 하늘의 뜻에 따르셨다.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재위 2년 계해(단기 2096, BCE 238.. 2024. 6. 8.
복애 범장范樟-북부여기 저자 『북부여기』를 지은 범장范樟 (?~?) (북부여기 전문 보기)고려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였다고 한다. 호는 복애伏崖이고, 복애거사로도 불리었다.범장의 호인 복애伏崖가 '휴애休崖'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증손 범석희范錫熙가 필사한 범장의 저서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는 복애를 범장의 호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간행한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1937)에도 "자는 여명보汝明甫, 호는 복애伏崖"라 기록되어 있다. (범석희는 고려말에 참지參知를 지냈다. 그러므로 범석희는, 조선시대 초까지 산 증조부 범장과 상당 기간을 함께 산 것이다. 생전에 함께 생활한 증손자가 증조부의 호를 잘못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2024. 6. 8.
행촌 이암李嵒-단군세기 저자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李嵒 (1297~1364) (단군세기 서문 보기)「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의 25세 충렬왕 때(1297) 경상도 고성에서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를 배출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 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輪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냈다.「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 2024. 6. 6.
원동중元童仲-삼성기 하 저자 『삼성기』하를 지은 원동중元童仲 (삼성기 하 전문보기) 원동중은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 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씨는 3개 파가 있는데 어디에도 동중이라는 자字나 호로 나오는 인물은 없었다. 대신 원씨 가문에 “원동중이 원천석이다”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원천석(1330- ?)은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고려 말에 진사가 되었으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며 은둔생활을 하였고, ‘유교 · 불교 · 도교는 원래 한 이치이지만, 각기 맡은 바 업業이 있다’는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을 주장했다고 한다. 『삼성기』상과 『삼성기』하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고 쓴 것처럼 되어 았다. 안함로의 『삼성기』가 먼저 발간되고.. 2024. 6. 5.
삼성기 하-전문 1. 인류의 시조와 동서 문명의 시원 국가 인류의 조상은 나반那般이시다. 나반께서 아만阿曼과 처음 만나신 곳은 아이사비阿耳斯庇이다. 두 분이 꿈에 천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니 환족의 모든 족속[九桓族]이 그 후손이다.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 백성들은 풍요로웠고 인구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桓仁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得道長生] 몸에는 병이 없으셨다. 하늘(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代天宣化]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굶주림과 추위를 사라지게 하였다.[환국의 통치자와 열 두 나라 연방]초대 안파견환인에서 2세 혁서환인, 3세 고시리환인, 4세 주우양환인, 5세 석제임환인, 6세 구을리환인을 .. 2024. 6. 5.
삼성기 상-전문 1. 환인천제의 환국 개창우리 환족의나라 세움이 가장 오래 되었다.하느님[一神]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가장 밝은 하늘)에 계시며 홀로 우주의 조화를 부리는 신神이시다. 광명光明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대권능의 조화[權化]로 만물을 낳으며, 영원토록 사시며[長生久視] 항상 즐거움을 누리신다. 지극한 조화기운[至氣]을 타고 노니시고 스스로 그러함[道]에 오묘하게 부합하며, 형상 없이 나타나고, 함이 없이 만물을 지으시며, 말없이 행하신다.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보내시니, 이에 환인께서 만백성의 우두머리[監群]가 되어 천계天界(천산 동방의 환국)에 거주하시며 돌을 부딪쳐서 불을 피워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니 이 나라를 환국(광명의 나라)이라 했다. 이 환국을 다스.. 2024. 6. 4.
안함로安含老-삼성기 상 저자 『삼성기』상을 지은 안함로安含老 (579~640) (삼성기 상 전문보기)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찬伊飡을 지낸 시부時賦의 손자로 안홍安弘 법사, 안함安含 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신라의 십성十聖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각훈覺訓이 삼국 시대 이래 유명한 고승들의 전기를 정리한 「해동고승전」은 안함로의 생애를 이렇게 전한다.   안함로는 22세(600, 진평왕 22)때 승려 혜숙惠宿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수나라에서 온 사신과 함께 수나라로 건너 가서 문제文帝(재위 581~604)를 직접 만났다. 그곳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며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부처나 보살이 설교.. 2024. 6. 4.
성명정-인간 몸 속에 깃든 삼신의 조화 대광명 [도가에서는 정精·기氣·신神을 3가지 보배로 여기며, 정·기·신으로 수행의 원리를 설명한다. 정·기·신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서로 기르고 협동하는데, 정과 기는 서로 길러 준다. 그리고 정기精氣의 상호 작용에 따라서 발휘되는 것이 신神이다. 따라서 정기精氣가 충실한 사람은 신神의 기능도 왕성하지만, 정기가 부족한 사람은 신의 기능도 부실한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수행 생활이란 음식을 적절하게 섭취하여 정精을 잘 기르고 휴식과 운동, 잠을 절도 있게 하여 기氣를 보존하며, 정신[神]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하나로 통일 시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신 수행법의 원형이 배달국의 삼일신고를 바탕으로 제시된 한민족의 삼신수행법이다. 성명정(性命精 ), 심기신(心氣身), 감식촉(感息.. 2024. 5. 28.
고대 한민족의 수행문화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에 呪願有功(주원유공), 즉 환웅께서 주문을 읽어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이 고대 배달의 강역이었던 홍산지역,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에서 5,300여 년 전으로 추정되는 흙으로 구운 남신상이 발굴되었다. 이 남신상은 수행을 하듯 반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마치 주문을 읽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주문수행은 지금은 기억을 상실해 일반적으로 생소하게 생각하지만,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활용한 한민족 고유의 전통 수행법이다. 주문은 신성한 음절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그 주문의 영적 힘이 내 몸에 축적되고, 그 주력으로 내 몸과 영혼 속의 어두운 기운들을 몰아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주문의 힘으로 내 안에서 신성이 열리고,.. 2024. 5. 26.
주문은 ‘신의 노래’이자 ‘우주의 노래’ [천지광명과 신성’ 회복의 길을 열어주는 『환단고기』]  우리가 머지않아 맞이할 통일문화 · 열매문화 시대를 누릴 수 있는 천지광명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선천 상극이 낳은 갈등과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치유의 과정을 통하여 삼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본연의 신성神性을 회복하여야 한다.  동서양의 수행 문화에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고 대광명의 영성을 회복하는 ‘치유 문화(Healing culture)’ 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 인류 문화의 중심축은 정보산업 사회를 넘어서 밝은 ‘영성Spiritualty 문화’로 바뀌고 있다.   인도 출신의 미국 의사 디팍 쵸프라Deepak Chopra(1946~ )도 인간의 영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 2024. 5. 25.
신교의 낭가사상 9천년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한민족의 국혼을 지켜온 정신, 그리고 과거의 크고 작은 모든 국난을 극복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을 만든 '한국의 정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자께서는 그것이 '신교의 낭가사상'이라고 전합니다. "신교는 동방 한민족이 9천 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역사의 혼이다. 이러한 신교 정신을 직접 실천하고 신교를 바탕으로 새 문명을 열고 나라를 개창한 '역사 개척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낭가郞家이다. 고려팔관잡기에 '낭郞은 곧 삼신상제를 수호하는 관직이다'고 하는데, 배달의 삼랑三郞은 이후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을 거쳐 북부여의 천왕랑天主郞에서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으로, 그리고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 선랑仙郞.. 2024. 4. 10.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열제는 고구려의 19세 태왕으로 22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多勿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이다. 광개토열제는 비록 38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배달· 단군조선 시대의 광대했던 한민족의 영토와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하려고 노력한 황제이며, 거란· 평량(감숙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북아 국가를 조공국으로 복속하여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신교 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이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은 고구려의 이러한 찬란했던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 시대 고구려의 강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1880년 광개토태왕릉비문이 발견된 .. 2024. 4. 4.
동방 한민족의 신교문화 한민족을 대표하는 고유 사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답할 한국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한민족에게 과연 고유한 철학이나 사상이 존재했던가? 이렇게 자문하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 음양오행은 중국 사상,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도 전부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들,,, 한국의 고유 종교는 기껏해야 원시 무속 신앙인 샤마니즘 정도, 물론 조선시대 꽤 유명한 성리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사상도 결국 유교, 즉 중국사상의 아류가 아닌가? 따라서 과연 우리나라에 고유한 사상이 있었던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신라말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그것을 풍류라 했고, 이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다는 말씀을 남.. 2024. 4. 2.
고구려국본기-21 21. 고구려의 개국 공신 연타발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曷思*(북갈사는 만주 우수리강 일대이고, 남갈사는 혼춘琿春지방)를 오가면서 이재理財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지금의 대요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訥見*(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 지금의 만주 장춘 북쪽 주성자朱城子)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坐原*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에 죽으니, 때는 평락平樂*.. 2024. 3. 3.
고구려국본기-요서 10성 20. 요서 지방에 10성을 쌓음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安市城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遙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豊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 2024. 3. 3.
고구려국본기-19 19. 요동과 요서의 고구려 영토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6세, 단기 2386, 53~단기 2479, 146)께서 쌓으신 것이다. 안시성의 위치: 하북성 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다. 조선시대 실학사상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이른바 옛 안시성은 개평현開平縣 동북 70리에 있다[古安市城, 在蓋平縣東北七十里]"라고 하였다. 이 개평현을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으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개평현은 바로 요서에 있는 개평부이다. 지금 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으로 70리쯤 가면 천령天嶺 또는 천산天山이라 불리는 언저리에 탕지보湯池堡가 있.. 2024. 3. 3.
고구려국본기-18 18. 중국 본토까지 뻗었던 백제, 신라의 영토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遙西*, 진평晋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지금의 절강성 소옹현)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진나라 때 설치한 현으로 지금 절강성 소홍현),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지금의 상해)· 회계會稽(지금의 절강성 소홍현)· 오성吳城· 좌월· 산월· 천주泉州(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 서남쪽, 진서晉書 지리지에 진안군晉安郡에 속한 현 가운데 신라현이 명확히 기재되어 본문의 내용을 입증함)라 하였다. 명치 12년(단.. 2024. 3. 3.
고구려국본기-안시성 전투, 고당전쟁 환단고기에 기록된 고당전쟁은 지금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역사상식으로는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당전쟁, 특히 안시성 전투의 상황과 이후 이세민의 후회와 기타 정황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해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축소시키고 연개소문을 폄하한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사료만으로 그 당시의 정황들을 객관적으로 유추를 해보면, 오히려 환단고기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병법의 달인인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전략적으로 유린해 안시성에서 충분히 고통을 주었으며, 전쟁에 패해 달아나는 당태종 이세민을 끝까지 추격해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공포심을 주어, 끝끝내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입성해서 당태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었.. 2024. 3. 3.
고구려국본기-16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패망의 역사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일어난다. "나라 바깥의 변화가 외환(外患)로 다가올때 그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서로 분열되는 내우(內憂)가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문제이며, 내우외환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거기엔 더 근원적인 원인, 즉 이전부터 내부를 조금씩 썩게 해온 시스템의 한계와 더불어 시스템을 무너뜨리려 열망하는 매우 강한 원한(怨恨)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 9월26일. 이보다 4년 전인 664년에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세상을 떠났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고구려 사람들에겐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 2024. 3. 3.
고구려국본기-15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묘사하기를 "그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몸가짐이 웅장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서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고, 또한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따랐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고 묘사한다. 이 글로 유추해보면 연개소문은 도량이 넓고, 매우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극찬하며.. 2024. 3. 2.
고구려국본기-14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는 연개소문이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도록 왕에게 주청했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고구려의 1백 여명의 대신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또한 왕을 시해해 그 시신을 토막내어 버린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는 영류왕이 친당 정책을 펴, 점점 고구려의 주체성을 상실했고, 당나라의 도교를 수입해서 노자의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으며, 수십만의 백성들을 장성축조에 동원하여 국력을 소진시키니, 연개소문이 이를 왕에게 중지하도록 주청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다 연개소문을 주멸하려던 왕과 뜻이 맞았던 소수의 여러 대신들이 연개소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왕의 계획이 틀어지자 영류왕은 평복으로 도망가다 백성들에게 조칙을 내렸으나 아무도 따르는 이가 없.. 2024. 3. 2.
고구려국본기-13 13. 고구려·백제의 통치 영역과 수 문제의 대침략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摠菅 위충韋冲*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연태조淵太祚: 연개소문의 아버지, 중국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를 태조라 하였고 그 벼슬이 막리지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연태조를 동부 혹은 서부 대인 대대로라 하였다. *등주登州: 지금의 산동성 봉래蓬萊, *위충韋冲: 수나라의 등주총관]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王爵]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 2024. 3. 2.
고구려국본기-12 12.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대영절大迎節)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수양제의 대침공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침]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려)으로 돌아간.. 202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