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요서 지방에 10성을 쌓음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安市城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遙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豊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滾澤城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단기 2390, 57) 봄 정월에, 또 백암성白岩城과 용도성槦道城을 쌓으셨다.
고구려 초기의 중국 경락: 태조무열제가 '요서 10성'을 축성한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태조대왕太祖大王 조는 "태조대왕 3년 봄에 요서遙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三年春二月, 築遙西十城, 以備漢兵]"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이전 "모본제 2년(5세, 49)에 이미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까지 점령하였다[二年春, 遣將襲漢北平· 漁陽·上谷· 太原]"(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조). 우북평은 북경 동북에 있는 하북성 풍윤현豊潤縣, 어양은 북경 북동쪽 밑운현密雲縣이고, 상곡은 북경 서북쪽 회래현懷來縣, 태원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이다. 이는 고구려가 초기에 이미 중국 한나라의 수도인 낙양 가까이에 있는 태원까지 깊숙이 쳐들어가 점령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고구려의 요서 지방 경략經略에 대해 현재 국사학계에서는 해명조차 못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와 중국의 정사正史인 후한서의 동이전, 고구려 조에는 이러한 사실을 [光武... 二十五年春, 高驪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성: 추정국이 회복한 하간현 고려성은 답사 결과 실제로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려성에 대한 기록은『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밝히는 중요한 요소이다. 1991년에 현지를 답사한 중국 교포가 『태백일사』의 기록대로 하간현에서 성터를 발견했는데 현지 주민들은 그것이 고려성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전했다고 했다.
삼한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舊志」에 말하기를, 요서에 창료현昌選縣이 있는데, 당나라 때 요주滾州로 고쳤다. 그곳 남쪽에 갈석산陽石山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에 암주岩州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唐山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開平인데 일명 개평蓋平이라 하였으니, 당나라 때 개주蓋州는 이곳이다.
「자치통감資治通鏡」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 사이에 있다. 한서漢書에 '마수산馬首山이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나라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