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

삼한관경본기-전문

by 광명인 2024. 6. 16.

배달을 계승한 단군왕검, 송화강 아사달에서 건국
1. 환웅천황의 제천 행사

태백산(백두산)이 북쪽으로 달려가 우뚝 솟은 장엄한 모습이 비서갑裵西岬 경계에 까지 이어졌고, 그곳에 물을 등지고, 산을 안고서 다시 꺾어져 감돈 곳이 있는데, 바로 대일왕大日王(환웅 천황)께서 천제를 올리시던 곳이다.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해 온다. 
환웅천황이 이곳에 순행하여 머무시면서 사냥하여 제사 지내실 때, 풍백은 '천부경天符經'을 거울에 새겨 진상하고, 우사는 북에 맞추어 둥글게 춤을 추고운사는 백 명을 칼로 무장시켜 제단 밑에 늘어서서 지켰다.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러 산에 가실 때 의장이 이처럼 성대하고 엄숙하였다. 이 산의 이름이 불함不成이다. 지금은 완달完達이라 하는데, 그 음이 비슷하다.

2. 비서갑의 초대 왕검이 된 웅족 여왕 

후에 웅족 여왕[熊女君]이 천황께 신임을 받아 비서갑의 왕검을 세습하였다. 왕검王儉을 세속 말로 대감大藍이라 한다. 왕검은 영토를 관장하고 지키며,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살폈다.
 
일찍이 천황께서 백성에게 유시論示한 뜻을 받들어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부모를 공경하고, 처자를 잘 보호하여라.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며, 노인과 어른을 잘 받들어라. 어린아이와 약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뭇 백성은 서로 믿어야 하느니라."

또  의약과 물건 만드는 법짐승을 기르고 농사짓는 법기후 관측과 예절과 문자의 법을 만드니, 맡아 다스리는 땅이 교화되어 원근 백성이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3. 한족 시조 헌원은 웅씨족 소전의 후손

웅씨족에서 갈려 나간 후손 중에 소전少典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8세)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군병을 감독했다.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은 온갖 풀을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후에 열산列山으로 이주하여 한낮에 시장을 열어 물건을 교역하게 하였는데, 백성이 이를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소전少典에서 갈라진 파로 공손公孫이란 인물이 있었다.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에 귀양가서 살았는데, 헌원幹轅의 족속이 모두 그 후손이다. 

4. 구환을 통일하선 신인 왕검: 국조 단군

사와라환웅(13세) 초기에 웅족 여황의 후예를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 왕검이 덕을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므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여러 지역 왕검이 와서 방물을 바쳤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그 뒤 460년이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 출현하여 백성에게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裡王(부왕)에 올라 24년간 섭정하였다.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왕검이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였다.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이때에 나라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공약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백성의 뜻을 들어 공법을 삼노니, 이를 천부天符(하늘의 법)라 이르노라. 무릇 천부는 만세불변의 기본 경전이요, 지극한 존엄성이 담겨 있으니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마침내 삼한三韓으로 영토를 나누어 다스릴 때 진한辰은 천왕께서 친히 맡아서 통치하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바로 1세 단군이시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 지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왕검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한세가 상]]]

웅족과 호족이 서로 다투던 때는 환웅천황께서 아직 나라를 다스리기 이전이다. 묘환苗桓은 환국 시절 구황九皇족의 하나로 그 땅은 옛적에 이미 우리 환족이 유목과 농경을 하던 곳이다. 배달 신시가 개천되자 처음으로 토土의 중정中正의 덕으로 다스렸다[以土爲治]. 1(태극[水])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先天 生長)운동이 쌓여 그 궁극에 결실하는 음 기운(10 무극)이 성립하고, 이 10(무극)이 크게 열려서 만물이 다시 양(1태극)으로 통일된다(후천 결실 수렴 운동). 이러한 1과 10의 순환 운동 속(중도의 덕을 지닌 5토土)에서 천지의 참 마음[衷]이 생겨난다.

1. 황제헌원이 신시 배달에 와서 도를 닦다
[환역을 풀어 내는 윷놀이와 염표문]

봉황새가 백아강白牙岡에 모여 깃들고, 선인이 법수교法首橋를 왕래하였다. 법수는 신선 이름이다. 일찍이 인문이 발달하였고 오곡이 잘 익었다. 마침 이때 자부 선생이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황께 바쳤다. 천황께서 기뻐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기거하게 하셨다. 공공 · 헌원 · 창힐 · 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 선생에게 배웠다. 그때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桓易을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대체로 (초대 환웅 때)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기록한 천부경이 전하는 취지이다.

옛적에 환웅천황께서 천하가 광대하여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이에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농사 · 왕명 · 형벌· 질병 · 선악을 주관하게 하시고,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바로 삼신과 일체로 계시는 천상의 상제님[三神一體上尊]께서 남겨 주신 법도이다.

그러므로 천황께서 삼신(상제님)의 도로써 가르침을 세우고[三神立敎], 그 품고 계신 뜻을 전하는 글을 지으시니 그 염표문念標文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신[一神]께서 참마음을 내려 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본성은 본래 신의 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성취하는 홍익인간의 길을 갈지어다[弘益人間]

이때부터 소도가 건립되어 도처에서 볼 수 있었고,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이 산꼭대기마다 세워졌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이 둥글게 마을을 이루고 네 집이 정전井田의 단위를 이루어 농사를 짓고, 조세는 20분의 1을 바쳤다. 사시가 고르고 풍년이 들어 집 밖에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니 온 백성이 기뻐하여 태백환무太白桓舞라는 노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2. 치우천황의 헌원 토벌 - 탁록 대전쟁

이어서 치우천황이 계셨는데 구치九治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셨다.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시니 천하에서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헌구軒丘(황제헌원, 중화 한족의 시조)가 불복하므로 치우천황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탁록에서 대전쟁을 벌이셨다. 탁록은 지금의 산서성 대동부大同府이다.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탁록격문涿鹿檄文」을 짓고, 종당대인宗黨大人 81명을 소집하여 먼저 치우천황의 형상을 그려 반포하고, 아울러 신하들에게 경계의 글을 내려 알리셨다.

치우천황께서 말씀하셨다.
"너, 헌구는 짐의 말을 똑똑히 들으렷다! 태양(하늘)의 아들은 오직 짐 한 사람이니라. 짐이 천자로서 이 세상을 만세토록 공의公義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닦는 경계의 글(훈계문)을 짓노라. 너, 헌구는 우리의 삼신일체 원리를 우습게 알고 태만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 실행하지 않았느니라. 이에 삼신상제님께서 오랫동안 너의 더러운 행위를 싫어하여 짐 한 사람에게 명하시어 '삼신의 토벌을 행하게 하셨노라. 네가 하루속히 불의한 마음을 씻고 행동거지를 뜯어고쳐 타고난 삼신의 본성에서 진리의 열매(씨)를 구하여라. 그러면 상제님의 성령이 너의 머리에 내려 오시리라. 만일 네가 천명天命을 따르지 아니하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여 네 목숨이 온전치 못하리니 너는 두렵지도 않으냐?"
이때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함으로 천하가 우리 배달을 종주로 받들게 되었다.

선인 유위자가 전한 천지 대도의 말씀
[도의 근원은 삼신상제님] 


이때 유위자가 묘향산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나는 길에 웅씨 임금을 알현하니, 임금이 “나를 위해 도道를 설명해 주겠소?"라고 청하였다. 

이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도의 큰 근원은 삼신에서 나옵니다[道之大原 出乎三神]. 도에는 이미 대립도 없고 이름도 없으니, 대립이 있으면 도가 아니요, 이름이 있어도 도가 아닙니다. 도에는 고정불변의 도가 없으니[道無常道] 천지의 때를 따르는 것이 도가 귀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도에는 일정한 이름이 없으니[稱無常稱] 백성을 평안하게 함이 도의 이름이 담고 있는 바입니다. 밖이 없는 극대 세계와 안이 없는 극미 세계에 이르기까지 도가 품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기틀 내 마음의 기틀에 나타나고, 땅에 있는 상象(변화의 움직임)이 내 몸의 상에 나타나며, 만물의 주재는 내 몸의 기氣의 주재에서 나타나니, 이것이 바로 하나[一氣]에는 셋(삼신)이 깃들어 있고[執一含三], 세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이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원리[會三歸一]입니다. 

일신이 내려 주신 바가 만물의 이치[物理]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또는 하늘이 1로서) 물[水]을 생生하는 도입니다. 인간의 본래 성품이 광명에 통해 있는 것이 생명의 이치[生理]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또는 땅이 2로서) 불[火]을 생生하는 도입니다. 세상을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으로 다스려 깨우치는 것이 마음의 이치[心理]이니, 바로 인삼人三(또는 사람이 3으로서)이 나무[木]를 생生하는 도입니다. 

대개 대시에 삼신상제님께서 천지인 삼계를 만드실 때, 물[水]로써 하늘[天]을 상징하고, 불[火]로써 땅[地]을 상징하고, 나무[木]로써 사람[人]을 상징하였습니다. 무릇 나무란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솟아나온 것인데, 사람이 땅에 우뚝 서서 하늘을 대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웅씨 임금이 말하였다. “참으로 좋은 말씀이오." 

4. 고조선 마한 수도의 위치와 역대 왕의 치적
마한의 초대 왕(부단군) : 웅백다

단군왕검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웅백다熊伯多를 마한 왕(부 단군)으로 임명하셨다. 도읍을 달지국達支國에 정하였는데,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실 때 천왕(단군왕검)께서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울을 보면 잘나고 못난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고, 백성이 임금을 보면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이 정사에 나타나 나니, 거울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임금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정사를 보아야 하느니라."
마한 왕(웅백다)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거룩하신 말씀입니다. 성군은 뭇 사람의 의견을 잘 좋으므로 도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임금은 독선을 좋아하므로 도가 작아지 나니, 참으로 자신을 돌이켜 살펴서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다

단군왕검 51년(단기 51, BCE 2283)에 천왕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郎城을 축조하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설치할 때 강남의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조역助役하게 하셨다. (91세 되시던) 신유(단기 54, BCE 2280)년 3월에 천왕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천제를 올리셨다.
웅백다熊伯多가 세상을 떠나니 단군왕검 재위 55년(단기 55년, BCE 2279) 이었다. 아들 노덕리盧德利(2세 왕)가 계승하였다. 노덕리가 세상을 뜨자 아들 불여래弗如來(3세 왕)가 즉위하니 부루단군(2세) 12년 임자(단기 105, BCE 2229)년이었다. 가을 10월에 (단군의) 명을 받들어 칠회력七回曆을 백성에게 널리 반포하였다. 다음해 봄 3월에, 처음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백아강에 버드나무를 심게 하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단기 109, BCE 2225)년에 삼일신고비三一神誥碑를 새겨서 남산에 세우고, 경신(단기 113, BCE 2221)년에 논을 개간하였다. 기해(단기 152, BCE 2182)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베푸니 나라를 다스리는 덕화가 널리 미쳤다.

(2) 3세 가륵단군의 중도 일심 정신에 대한 성훈

가륵단군(3세) 3년(단기 154, BCE 2180)에 불여래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두라문杜羅門(4세 왕)이 즉위하였다. 을사(단기 158, BCE 2176) 9월에 천왕께서 조칙을 내려 말씀하셨다. "천하의 대본은 내 마음의 '중도 일심[中一] 자리'에 있느니라. 사람이 일심의 중 자리를 잃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고, 만물 이 중도 일심을 잃으면 그 몸이 넘어지고 엎어지느니라. 임금의 마음은 위태롭고 백성의 마음은 은미하니, 모든 사람이 균일하게 갖고 나온 천부의 성품을 잘 닦고 간직하여 그 조화의 중심 자리를 확립해서 잃지 않은 연후에야 일심 자리에 확고히 안주할 수 있느니라. 중정과 일심[中一]의 도 아비된 자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된 자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된 자 마땅히 의롭고, 신하된 자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된 자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된 자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마땅히 차례를 잘 지키고, 친구끼리 마땅히 서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니라. 몸을 삼가 공손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잘 닦고 맡은 소임을 연마하여 지혜와 능력을 계발하고, 널리 이롭도록 서로 권면하고, 자신을 완성하여 자유자재하며[成己自由], 만물의 뜻을 열어 고르고 한결같이 하라[開物平等]. 그리하여 천하의 일을 자임하고, 국통國統을 존중하고, 국법憲法을 확실히 지켜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면하여 생산을 보존하라. 국가에 일이 있을 때 몸을 던져 의義를 실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맹히 전진하여 만세토록 무궁한 복을 마련할지니라. 이는 짐이 너희 백성과 함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희가 한 몸이 되어 완전하게 실천하기를 지극한 뜻으로 바라노니, 이를 잘 공경하여 받들지어다."

(3) 살수에서 배를 건조함

두라문(4세 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을불리乙弗利(5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세상을 떠나 아들 근우지近于支(6세 왕)가 즉위하니, 오사구단군(4세) 을유(단기 198, BCE 2136)이었다. 경인(단기 203, BCE 2131)년에 장정 30명을 보내어 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하게 하였는데, 그곳은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단기 225, BCE 2109)년에 마한 왕이 (4세 단군의) 명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도왔다. 10월에 모란봉 산기슭에 별궁[離宮]을 지어 천왕(오사구단군)께서 순수하실 때 머무실 장소로 삼았다.

[조의 하사와 가관 의식]
(단군께서) 매년 3월에 마한에 명하시어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하셨다. 16일에 기린굴麒麟窟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皂衣를 하사하고 관을 씌우는 예식(관례)을 행하셨다.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행하고 파하셨다. 갑인(단기 227, BCE 2107)년에 근우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을우지乙于支(7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우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 궁호弓戶(8세 왕)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세상을 떠나니 자손이 없어 두라문(4세 왕)의 아우 두라시의 증손 막연莫延(9세 왕)이 명을 받들어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단기 341, BCE 1993)년에 우서한단군(8세)께서 백아강에 순행하여 머무시며, 밭의 경계를 정해 땅을 나누어 주고 네 집을 한 구역으로 정하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각 구역에서 일승一乘씩 갹출 하여 마을을 나누어 지키게 하셨다.

(4) 11세 단군 때 환도桓道 문명이 번성함
[신교의 제도화로 환도 문명이 번성]

노을단군(10세) 임인(단기 395, BCE 1939)년에 막연이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화阿火(10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때 도해단군(11세)께서 강력한 의지로 개화에 힘써 평등하게 다스리실 때, (단군의) 명을 받들어 대성산大聖山 기슭에 대시전大始殿을 짓고 대동강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세 고을마다 전佺을 두어 경당扃堂을 설립하고 칠회 제신 의례[七回祭神之儀]를 정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강론하니, 환도문명桓道文明이 번성하여 국경 밖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다. 하夏나라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아화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사리沙里(11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한단군(12세) 을묘(단기 528, BCE 1806)년에 사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리阿里(12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불 단군(14세) 을유(단기 618, BCE 1716)년에 아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갈지曷智(1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세상을 뜨니 대음단군(15세) 무신(단기 701, BCE 1633)년에 아들 을아乙阿(14세 왕)가 즉위하였다.

[참성단의 제천 행사에 참여한 은나라 사신]
기유(단기 702, BCE 1632)년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쳤다. 을아가 세상을 뜨니, 여을단군(17세) 신미(단기 784, BCE 1550)년에 아들 두막해豆莫奚(15세 왕)가 즉위하였다. 임신(단기 785, BCE 1549)년 3월 16일에 여을단군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참성단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내실 때, 은나라 왕 외임外壬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세상을 뜨자 무인(단기 851, BCE 1483)년에 아들 자오수慈烏漱(16세 왕)가 즉위하였다. 자오수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922, BCE 1412)년에 아들 독로瀆盧(17세 왕)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세상을 뜨니 고홀단군(20세) 경오(단기 963, BCE 1371)년에 아들 아루阿婁(18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세상을 뜨니 무오(단기 1011, BCE 1323)년에 아우 아라사阿羅斯(19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조선 전삼한 시대의 대 전기점
[고등의 반역 사건]

이해(단기 1011, BCE 1323)에 고등高登이 개성開城에서 반역하여 천왕(21세 소태단군)에게 항명하였다. 마한 왕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고등을 치려 하는데, 홍석령紅石嶺에 이르러 천왕께서 고등을 우현왕右賢王으로 삼기로 윤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천왕(21세 소태단군)께서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려 하시자 마한 왕이 불가하다고 간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색불루가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자 마한 왕이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이끌고 가서 해성에서 일전을 겨뤘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 하]]]

삼한에서 삼조선 시대로 전환
우현왕 색불루의 대권 장악

색불루단군께서 조부(우현왕 고등)의 공덕을 계승하여 병권을 장악하니, 진한이 스스로 무너지고 마한·번한 역시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멸하였다. 이에 전제前帝(21세 소태단군)께서 사람을 보내어 옥책玉册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선양하셨다. 새로 등극한 임금(색불루)께서 도읍터를 백악산으로 정하시자 모든 욕살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여원흥黎元興과 갑천령蓋天齡 등이 조칙을 받들어 설득하니 마침내 모든 욕살이 복종했다.

1. 22세 색불루 단군,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

재위 원년 병신년(단기 1049, BCE 1285) 정월에, 색불루단군께서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시니 이곳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3월에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근자에 아사달(수도)에서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짐에게 전하여 제위를 선양하였느니라. 전제前帝(21세 소태단군)께서 아직 존호를 사용하고 계시지만 해내海内의 산천과 백성의 명부[名帳]가 이미 짐에게 돌아왔으니,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법은 나라의 전례典禮에 합당하게 하여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지어다. 반드시 옛 전통을 잘 헤아려서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라. 이제 천제일(대영절大迎節, 3월 16일)을 맞이하여 먼저 가서 몸과 마음을 재계하며, 천제 지낼 장소[神域]를 살펴 잘 청소하고, 희생과 폐백을 깨끗하게 준비하여 삼신께 보답토록 하라."

이때에 임금(색불루 단군)께서 7일을 택해 재계하시고,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시며 16일 이른 아침에 여원흥이 삼한의 대 백두산 천단天壇에서 제사를 봉행하게 하고, 임금께서는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사를 지내셨다. 그 백두산 서고문誓告文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소자 단군 색불루는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려 절하나이다. 천자天子의 수신修身이 백성에게 미침은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늘에 제사 지내에서 비롯하나, 황상皇上(시조 단군)께서 삼신의 밝으신 천명을 받아 보은대덕으로 이미 삼한의 5만 리 강토와 더불어 다 함께 '홍익인간'의 큰 뜻을 누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한 여흥을 보내 삼신일체 상제님의 제단에 제사를 올립니다. 상제님의 성신은 밝고 밝으시어 만유에 그 은혜를 베푸심이 빠뜨림이 없으십니다. 이에 심신을 깨끗이 재계하고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오니 강림하여 흠향하시고 말없이 도우시어 반드시 새로 보위에 오른 임금의 건극建極을 보살펴 주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왕업을 천만 년 무궁토록 보존케 하옵시고, 매년 풍년이 들어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번영하게 하여 우리 성제聖帝(시조 단군)께서 품으셨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살리는[空我存物] 지극한 생각을 밝혀 주옵소서."

2. 나라의 제도를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개편

5월에 제도를 고쳐 삼한 삼조선이라 하셨는데, 조선은 관경管境(영토 관할)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22세 단군)께서 친히 다스리고, 통치 영역은 옛날 진한의 땅 그대로이다. 정치는 천왕을 경유하여 삼한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명령을 받았다. 여원흥을 마한 왕(20세)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 왕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 관경檀君管境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辰國이다. 역사에서 일컫는 단군조선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동강의 왕검성을 막조선의 여원흥이 주재함]

원홍이 임금의 명을 받고 대동강을 굳게 지키니, 이곳을 왕검성이라고도 불렀다. 천왕께서 매년 중춘仲春에 반드시 마한을 순행하여 머물며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셨다. 이에 지나치게 많이 올리고, 많이 거둬들이는 폐단이 마침내 없어지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짐 한 사람을 봉양하기 위해 거두는 일로 백성을 번거롭게 한다면, 이는 바른 정사가 아니니라. 바른 정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임금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러고는 엄명을 내려 이를 그만두게 하셨다. 무자(단기 1101, BCE 1233)년에, 마한 왕이 명을 받들어 천자의 수도[京師]에 들어가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니 이를 따르셨다. 원흥이 세상을 떠나고 기축(단기 1102, BCE 1232)년에 아들 아실阿實(21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실이 세상을 뜨자 아우 아도阿闍(22세 왕)가 즉위하였다. 

[기자의 은둔 생활]

기묘(단기 1212 BCE 1122)년 은나라가 멸망하였다. 3년이 지난 신사(단기 1214, BCE 1120)년에, 자서여子胥餘(기자)가 태항산太行山 서북 땅에 피하여 사는데, 막조선莫朝鮮 왕이 전해 듣고 모든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살피고 군대를 사열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세상을 뜨자 경술(단기 1243. BCE 1091)년에 아들 아화지阿火只(23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화지가 세상을 뜨고 병술(단기 1279, BCE 1055)년에 아우 아사지阿斯智(24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사지가 세상을 뜨니 마휴단군(29세) 정해(단기 1400, BCE 934)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25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세상을 뜨자 아들 소이所伊(26세 왕)가 즉위하였다. 소이가 세상을 뜨고 정해(단기 1580 BCE 754)년에 아들 사우斯虞(27세 왕)가 왕위에 올랐다.

3. 협야후가 왜인의 반란을 평정함

무자(단기 1581, BCE 753)년에, 주周나라 임금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축하 인사를 올렸다. 사우가 세상을 뜨자 갑진(단기 1657. BCE 677)년에 아들 궁홀弓忽(28세 왕)이 즉위하였다. 갑인(단기 1667, BCE 667)년에 협야후陝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 척을 거느리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게 하셨다.

궁홀이 세상을 뜨고, 아들 동기東䄫(29세 왕)가 즉위하였다. 동기가 세상을 뜨자 다물단군(38세) 계유(단기 1746, BCE 588)년에 아들 다도多都(30세 왕)가 즉위하였다. 다도가 세상을 뜨니 임진(단기 1825, BCE 509)년에 아들 사라斯羅(31세 왕)가 즉위하였다. 사라가 세상을 뜨고 아들 가섭라迦葉羅(32세 왕)가 즉위하였다. 가섭라가 세상을 뜨자 갑인(단기 1907, BCE 427)년에 아들 가리加利(33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묘(단기 1908, BCE 426)년에 융안隆安 사냥꾼 수만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관병이 이들과 싸울 때마다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반란군이 도성을 공격하여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가리가 출전하였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4. 고조선의 몰락- 우화충의 대역모와 기후의 반란

병진(단기 1909, BCE 425)년에 상장上將 구물丘勿(후에 44세 단군으로 즉위)이 마침내 사냥꾼 두목 우화충宇和冲을 죽이고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먼저 가리의 손자 전내典奈로 하여금 막조선을 계승(막조선 34세 왕)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국정이 더욱 쇠잔해졌다. 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진을례進乙禮(35세 왕)가 즉위하였다. 진을례가 세상을 뜨자, 을묘(BCE 366년에 아들 맹남孟男(36세 왕)이 즉위하였다.

무술(단기 2011, BCE 323)년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스스로 번조선 왕이라 하였다.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아군과 함께 이를 정벌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이 응하지 않았다.
계해(단기 2096, BCE 238)년에 고열가단군(47세)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은둔하셨다. 진조선은 오가五加가 공동으로 집행하는 공화정 체제(단기 2096, BEC 238~단기 2102, BEC 232)를 (6년 동안) 유지하다가 끝내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번한세가 상]]]

1. 요순은 단군조선의 제후
[요임금이 양위한 배경]

치우천황께서 서쪽으로 탁예涿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평정하여 산을 헤치고 길을 내시니, 그 영토가 만 리 였다. 단군왕검 때는 당요唐堯(당나라 요임금)와 같은 때인데, 의 덕이 갈수록 쇠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천왕(단군왕검)께서 우순虞舜(우나라 순임금)에게 명령하여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주둔시키셨다. 우순과 함께 당요를 정벌할 것을 언약하시니, 요堯임금이 힘에 굴복하고 순舜에게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나라를 넘겨 주었다[國讓]. 이때 순舜 부자와 형제가 다시 돌아가 한집안을 이루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함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2. 9년 홍수를 다스리기 위한 도산 회의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나라 순임금[虞舜]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塗山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천자 단군왕검을 알현한 제후 순]

이때 감우소監虞所를 낭야성琅耶城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정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서경에 이른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 지내고, 동방 천자를 알현하였다[東巡望秩 肆覲東后]"라는 구절은 바로 이 내용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상제님)의 아들[天帝子=天子]이 다스리므로 5년에 한 번 낭야를 순행하였으나,순舜은 (조선의) 제후이므로 진한에 조근朝覲한 것이 네 번이었다.

3. 초대 번한 왕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

이때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의 후손 중에서 지모와 용력이 뛰어난 자를 택하여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험독險瀆에 수도를 세우시니, 지금은왕검성이라 칭한다.

[요수 일대에 쌓은 12성]

치두남蚩頭男치우천황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 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하셨다. 경자(단기 33, BCE 2301)년에,요수遼水주위에12성을 쌓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이다.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2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 해 경인(단기 83, BCE 2251)년 3월에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낭야성琅城인데, 번한 왕 낭야가 쌓았으므로 낭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산과 회수. 사수 지역 삼신 신앙의 유래]

갑술(단기 67, BCE 2267)년에,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도산塗山에 갈 때 도중에낭야琅邪에 들러 반 달 동안 머무르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다. 이때우순사악四岳을 거느리고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번한 왕이 태자의 명으로 경내境内에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고, 아울러태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이로부터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회수淮水와 사수泗水지역 일대에 서 크게 행하여졌다.

4. 오행치수의 묘법 전수

태자가 도산에 도착하여 주장[主理]의 자격으로 회의를 주관하실 때 번한 왕을 통해 우虞 사공司空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북극수의 정기를 타고난 아들이니라. 너희 임금(순임금)이 나에게 수토水土를 다스려 백성을 구해 주기를 청원하니, 삼신상제님 께서 내가 가서 도와 주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왔노라.”
천자국의 문자[王土篆文(고조선 신지 전자)]로 된 천부天符와 왕인王印을 보여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차면 험한 곳을 다녀도 위험하지 않고, 흉한 것을 만나도 피해가 없으리라. 또 신침神針 하나가 있으니 능히 물이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 쓰임이 무궁하니라. 또 황구종皇矩倧이란 보물은 모든 험한 물을 진압하여 오래도록 잔잔하게 할 것이니라. 이 세 가지 보물[三寶]을 너에게 주노니, 천제자天帝子(단군왕검)의 거룩하신 말씀[大訓]을 어기지 말아야 가히 큰 공덕을 이룰 수 있으리라." 
우사공이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삼가 천제자(단군왕검)의 어명을 잘 받들어 행할 것이요, 또 저희 우순(순임금)께서 태평스런 정사를 펴시도록 잘 보필하여 삼신상제 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도록 지극한 뜻에 보답하겠사옵니다.”

부루태자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곧 오행치수의 요결이었다. 태자께서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아 놓고, 우순에게 명하여 조공 바친[虞貢] 사례를 보고하게 하시니, 오늘날 이른바 우공禹貢이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다.

낭야琅耶가 세상을 떠나니, 계묘(단기 96, BCE 2238)년에 아들 물길勿吉(3세 왕)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세상을 떠나자 갑오(단기 147, BCE 2187)년에 아들 애친愛親(4세 왕)이 계승하였다. 애친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도무道茂(5세 왕)가 즉위하였다. 도무가 세상을 떠나자 계해(단기 236, BCE 2098)년에 아들 호갑虎甲(6세 왕)이 즉위하였다. 정축(단기 250, BCE 2084)년에 천왕(5세 구을단군)께서 순행하시다가 송양松壤에서 병을 얻어 붕어하시자, 번한 왕이 사람을 보내 초상을 치르고 군사를 나누어 엄히 경계하였다. 호갑이 세상을 뜨자 달문단군(6세) 기축(단기 262, BCE 2072)년에 아들 오라島羅(7세 왕) 즉위하였다. 갑오(단기 267, BCE 2067)년에 하나라 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어 신년 하례를 올렸다. 오라가 세상을 뜨자, 병술(단기 319, BCE 2015)년에 아들 이조伊朝(8세 왕)가 계승하였다. 이조가 세상을 떠나고 아술단군(9세) 병인(단기 359, BCE 1975)년에 아우 거세居世(9세 왕)가 즉위하였다. 거세가 세상을 뜨자 신사(단기 374, BCE 1960)년에 아들 자오사慈鳥斯(10세 왕)가 즉위하였다. 자오사가 세상을 떠나고 을미(단기 388, BCE 1946)년에 아들 산신散新(11세 왕)이 즉위하였다. 산신이 세상을 떠나니 무자(단기 441, BCE 1893)년에 아들 계전季佺(12세 왕)이 계승하였다. 경인(단기 443, BCE 1891)년에 명을 받아 탕지산湯池山 삼신단三神壇을 세우고 관가를 옮겼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徳鄕이다.

5. 번한 15세 왕 소전, 성탕을 도와 하나라 폭군 걸을 정벌함

계전이 세상을 떠나고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아들 백전伯佺(13세 왕)이 왕위에 올랐다. 백전이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508, BCE 1826)년에 둘째 아우 중전仲佺(14세 왕)이 계승하였다. 중전이 세상을 떠나니 신묘(단기 564, BCE 1770)년에 아들 소전少佺(15세 왕)이 계승하였다. 갑오(단기 567, BCE 1767)년에 장수 치운출蚩雲出을 보내 탕湯을 도와 걸桀을 정벌하였다. 을미(단기 568, BCE 1766)년 묵태墨胎를 보내 (은나라 시조)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소전이 세상을 떠나고 갑술(단기 607, BCE 1727)년에 아들 사엄沙奄(16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엄이 세상을 떠나자 아우 서한棲韓(17세 왕)이 즉위하였다. 서한이 세상을 떠나고 정축(단기 670, BCE 1664)년에 아들 물가勿駕(18세 왕)가 즉위하였다. 물가가 세상을 떠나니 신사(단기 734, BCE 1600)년에 아들 막진莫眞(19세 왕)이 왕위에 올랐다. 막진이 세상을 뜨자 정묘(단기 780, BCE 1554)년에 아들 진단震丹(20세 왕)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관계]
이 해에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진단이 세상을 뜨자 계유(단기 786, BCE 1548)년에 아들 감정甘丁(21세 왕)이 즉위하였다. 감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소밀蘇密(22세 왕)이 즉위하였다. 계사 3년(단기 866, BCE 1468)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은의 수도 북박北亳을 치니, 은나라 왕 하단갑河亶甲(12세 왕)이 사죄하였다.

소밀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사두막沙豆莫(23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세상을 떠나고 계부 갑비甲飛(24세 왕)가 즉위하였다. 갑비가 세상을 뜨자 경신(단기 893, BCE 1441)년에 아들 오립루烏立婁(25 왕)가 즉위하였다. 오립루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서시徐市(26세) 가 즉위하였다. 서시가 세상을 뜨니 무신(단기 941, BCE 1393)년에 아들 안시(27세 왕)가 즉위하였다. 안시가 세상을 떠나자 기축(단기 982, BCE 1352)년에 아들 해모라奚牟羅(28세 왕)가 왕위에 오르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은나라 (22대 임금) 무정을 침]
소태단군(21세) 5년(단기 1001, BCE 1333)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출보出補시켜 (29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셨다. 고등高登이 늘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꺼려서 임금께 권하여 출보시킨 것이다. 이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였다. 고등이 이를 전해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격파하고, 삭도索度까지 추격하여 군사를 풀어 불지르고 약탈한 뒤에 돌아왔다. 서여가 북박을 습격해 격파하고, 군사를 탕지산(번한 수도 안덕향)에 주둔시켰다. 자객을 보내 소정小丁을 죽이고, 아울러 무기와 갑옷을 싣고 돌아 갔다.

[[[번한세가 하]]]

1. 색불루단군이 국가 제도를 개편하고 혁명가 서우여를 번한 왕에 임명함
색불루단군(22세)께서 일찍이 삼한을 아우르고 나라의 제도[國制]를 크게 고치실 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서우여가 몰래 좌원坐原으로 돌아가 사냥꾼 수천 명과 함께 군대를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다. 갑천령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즉각 가서 쳤으나, 패하여 진중에서 죽었다. 색불루단군께서 친히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치려 하실 때,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하고, 비왕裨王으로 봉할 것을 약속하셨다. 다시 설득하시자 말씀을 따랐다. 이때 서우여를 (30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셨다.

(1) 고조선의 8조 금법
색불루단군 4년 기해(단기 1052, BCE 1282)년에, 진조선眞朝鮮이 천왕(색불루단군)의 칙문을 전하였다. 그 칙문에서 말하를, "너희 삼한은 위로 천신을 받들고, 아래로 뭇 백성을 맞아 잘 교화하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성에게 예절과 의리, 농사, 누에치기, 길 쌈, 활쏘기, 글자를 가르쳤다. 또 백성을 위하여 금팔조禁八條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제2조: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제3조: 도둑질 한 자 중에서 남자는 거두어들여 그 집의 노奴(남자 종)로 삼고 여자는 비婢(여자 종)로 삼는다.
◇제4조: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 형에 처한다.
◇제5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역시킨다.
◇제6조: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
◇제7조: 음란한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린다.
◇제8조: 남을 속인 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풍속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田野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신축(단기 1054, BCE 1280)년에 은나라 왕 무정이 번한 왕을 통해 천왕에게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단기 1109, BCE 1225)년에 서우여가 세상을 떠났다. 정유(단기 1110, BCE 1224)년에 아락阿洛(31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락이 세상을 뜨니 정축(단기 1150, BCE 1184)년에 솔귀率歸(32세 왕)가 계승하였다. 솔귀가 세상을 뜨자 갑자(단기 1197, BCE 1137)년에 임나任那(33세 왕) 가 즉위하였다.
신미(단기 1204, BCE 1130)년에 천왕(25세 솔나단군)의 조칙으로 동쪽 교외에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께 제사 지낼 때, 많은 사람이 둥글게 모여 춤을 추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님께 장수를 축원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민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세상을 떠나고 병신(단기 1229, BCE 1105)년에 아우 노단魯丹(34세 왕)이 즉위하였다. 북막北漠이 침범하므로 노일소路日邵를 보내어 쳐서 평정하였다. 노단이 세상을 뜨니 기유(단기 1242, BCE 1092)년에 아들 마밀馬密(35세 왕)이 즉위하였다. 마밀이 세상을 뜨자 정묘(단기 1260, BCE 1074)년에 아들 모불牟弗(36세 왕)이 즉위하였다. 을해(단기 1268, BCE 1066)년에 천문을 관측하는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모불이 세상을 떠나고 정해(단기 1280, BCE 1054)년에 아들 을나乙那(37세 왕)가 즉위하였다. 갑오(단기 1287, BCE 1047)년에 주나라 임금,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 소련과 대련 형제를 군자로 섬긴 번한
[3년상 풍속의 기원]
을나가 세상을 떠나고 정묘(단기 1320 BCE 1014)년에 아들 마유휴麻維庥(
38세 왕)가 즉위하였다. 마유휴가 세상을 떠나자 기사(단기 1322, BCE 1012)년에 아우 등나登那(39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사당을 세우고, 3년상을 정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이를 따랐다.

[만주 구월산 삼성묘에 제사 지냄]
등나가 세상을 떠나고 무술(단기 1351, BCE 983)년에 아들 해수奚壽(40세 왕)가 즉위하였다. 임인(단기 1355, BCE 979)년에 아들 물한勿韓을 구월산에 보내어 삼성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삼성묘三聖廟 상춘의 주가성朱家城에 있다. 해수가 세상을 뜨자 기미(단기 1372, BCE 962)년에 아들 물한勿韓(41세 왕)이 즉위하였다. 물한이 세상을 떠나자 기묘(단기 1392, BCE 942)년에 아들 오문루奧門婁(42세 왕)가 즉위하였다. 오문루가 세상을 떠나자 정묘(단기 1440, BCE 894)년에 아들 누사婁沙(43세 왕)가 즉위하였다. 무인(단기 1451, BCE 883)년에, 누사婁沙가 천조天朝(진조선 조정) 에 들어가 천왕(30세 내휴단군)을 뵙고, 태자 등올登屼과 소자少子 등리登里와 함께 별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태자 형제에게 이렇게 노래를 지어 올렸다.

형은 반드시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작은 일로써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마소.
말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지어 가니
방 안에서는 비록 즐거우나
이간하는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

2. 삼한 전역에서 시행된 왕문의 이두법
[이두법의 창시자 왕문]

누사婁沙가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1468, BCE 866)년에 아들 이벌伊伐 (44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신(단기 1469, BCE 865)년에 한수漢水(지금의 대릉하)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어 올리니 천왕(31세 등올단군)께서 기뻐하시고 삼한에 명하여 시행하게 하셨다.

[주나라 격퇴와 흉노의 조공]

기미(단기 1492, BCE 842)년 상장上將 고력합高力合을 보내어 회군淮軍과 합세하여 주周나라를 격퇴하였다. 이벌이 세상을 뜨니 신유(단기 1494, BCE 840)년에 아들 아륵阿勒(45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인(단기 1499, BCE 835)년에 주나라의 이공二公(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아륵이 세상을 떠나고 기축(단기 1522, BCE 812)년에 아들 마휴麻休, 일명 마목麻沐 (46세 왕)가 즉위하였다. 마휴가 세상을 떠나자 병진(단기 1549. BCE 785)년에 아들 다두多斗 (47세 왕)가 즉위하였다. 다두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1582, BCE 752)년에 아들 내이奈伊(48세 왕)가 즉위하였다. 내이가 세상을 떠나자 기미(단기 1612, BCE 722)년에 아들 차음次音(49세 왕)이 즉위하였다. 차음이 세상을 떠나자 기사(단기 1622, BCE 712)년에 아들 불리不理(50세 왕)가 즉위하였다. 불리가 세상을 떠나니 을사(단기 1658, BCE 676)년에 아들 여을餘乙 (51세 왕)이 즉위하였다. 여을이 세상을 떠나고 갑술(단기 1687, BCE 647)년 엄루奄婁(52세 왕)가 즉위하였다. 무인(단기 1691, BCE 643)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감위甘尉(5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감위가 세상을 뜨자 무신(단기 1721, BCE 613)년에 아들 술리述理(54세 왕)가 즉위하였다. 술리가 세상을 떠나자 무오(단기 1731, BCE 603)년에 아들 아갑阿甲(55세 왕)이 즉위하였다.
경오(단기 1743, BCE 591)년 천왕(37세 마물단군)께서 사신 고유선高維先을 보내어 환웅천황 · 치우천황 · 단군왕검 세 분 성조의 상像을 반포하여 관가에서 받들게 하셨다.

3. 노자는 풍이족 혈통

아갑이 세상을 뜨고 계유(단기 1746, BCE 588)년에 고태(56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태가 세상을 떠나자 정해(단기 1760, BCE 574)년에 아들 소태이蘇台爾(57세 왕)가 즉위하였다. 소태이가 세상을 떠나고 을사(단기 1778, BCE 556)년에 아들 마건馬乾(58세 왕)이 즉위하였다. 마건이 세상을 떠나자 병진(단기 1789, BCE 545)년에 천한天韓(59세왕)이 계승하였다. 천한이 세상을 떠나고 병인(단기 1799, BCE535)년에 아들 노물老勿(60세 왕)이 즉위하였다. 노물이 세상을 떠나자 신사 (단기 1814, BCE520)년에 아들 도을道乙(61세 왕)이 즉위하였다.

[노자는 순수한 동이족 혈통-남방 문화권에 전수된 한 사상]

계미(단기 1816, 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孔丘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이다. 노자는 후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를 경유하여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곳 백성을 교화하였다.

[천지인과 오행과 한으로 지은 번한 왕들의 이름]

도을이 세상을 떠나고 병신(단기 1829, BCE 505)년에 아들 술휴述休(62세 왕)가 즉위하였다. 술휴가 세상을 떠나자 경오(단기 1863, BCE 471)년에 아들 사량沙良(63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량이 세상을 떠나자 무자(단기 1881, BCE 453)년에 아들 지한地韓(64세 왕)이 즉위하였다. 지한이 세상을 떠나자 계묘(단기 1896, BCE 438)년에 아들 인한人韓(65세 왕)이 즉위하였다. 인한이 세상을 떠나자 신사(단기 1934, BCE 400)년에 아들 서울西蔚(66세 왕)이 즉위하였다. 서울이 세상을 떠나고 병오(단기 1959, BCE 375)년에 아들 가색哥索(67세 왕)이 즉위하였다. 가색이 세상을 떠나자 경진(단기 1993, BCE 341)년에 아들 해인解仁(68세 왕)이 즉위하였는데, 일명 산한山韓이라 한다. 이 해에 해인이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4. 70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 사람 기후

신사(단기 1994, BCE 340)년에 아들 수한水韓(69세 왕)이 즉위하였다. 임오(단기 1995, BCE 339)년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번한성인 안덕향, 지금의 탕지보)을 공격하고 험독險瀆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수유 사람 [須臾人] 기후箕詡가 젊은 청년[子弟]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우니 군세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에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또 한 무리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계성薊城(연나라 수도, 지금의 하북성 북경) 남쪽에서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공자公子를 인질로 보냈다

[번조선의 왕통 단절과 연나라의 강성]

무술(단기 2011, BCE 323)년 수한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후가 명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 이 해에 연이 왕이라 칭하고 장차 침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기후箕詡도 명을 받들어 왕호를 써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비로소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5. 기비의 도움으로 해모수(북부여 시조)가 대권을 잡아 고조선을 계승함

기후가 세상을 뜨자 병오(단기 2019, BCE 315)년에 아들 기욱箕煜(71 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욱이 세상을 떠나고 신미(단기 2044, BCE 290) 년에 아들 기석箕釋(72세 왕)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각 주와 군에 명하여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일시에 선발된 자 가 270명이었다.

기묘(단기 2052, BCE 282)년에 번한 왕이 친히 교외에서 밭을 갈았다. 
을유(단기 2058, BCE 276)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기석이 세상을 떠나고 경술(단기 2083, BCE 251)년에 아들 기윤箕潤(73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윤이 세상을 뜨자 기사(단기 2102, BCE 232)년에 아들 기비箕丕(74세 왕)가 즉위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왕, 기준]

일찍이 기비가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 치려는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箕丕 그 사람이었다. 기비가 세상을 떠나고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아들 기준箕準(75세 왕)이 즉위하였다. 정미(단기 2140, BCE 194)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衛滿에게 속아 패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