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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북부여기

북부여기, 가섭원 부여기-전문

by 광명인 2024. 6. 8.

[고조선의 국통 계승자, 해모수단군 즉위]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 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策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劍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시고, 날이 저물면 하늘의 뜻에 따르셨다.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재위 2년 계해(단기 2096, BCE 238)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에 임금께서 하늘에 제祭를 올리시고, 연호법烟戶法을 만들어 백성을 살피셨다. 오가五加의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屯田으로 자급하게 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오가의 공화정 종결]

재위 8년 기사(단기 2102, BCE 232)년에 임금께서 무리를 거느리고 옛 수도에 가서 오가를 설득하시니, 오가가 드디어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였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단군으로 추대하여 받드니, 이분이 바로 북부여의 시조이다. 겨울 10월에 태아를 가진 임신부를 보호하는 법[공야태모지법 公養胎母之法]을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부터 시작하게 하셨다. 

재위 11년 임신(단기 2105, BCE 229)년에 북막北漠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한 뒤 돌아갔다.

[기준이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왕위에 오름]

재위 19년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기비箕丕가 홍서하자 아들 준準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 임금께서 관리를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 더욱 힘쓰게 하셨다. 이보다 앞서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재위 20년 신사(단기 2114, BCE 220)년에 임금께서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궁궐 366칸을 새로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재위 22년 계미(단기 2116, BCE 218)년에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왕秦王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수행하던 수레[副車]를 맞혔다.

재위 31년 임진(단기 2125, BCE 209)년에 진승陳勝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燕, 제齊, 조趙 나라 백성 가운데 번조선으로 망명해 온 자가 수만 명이었다준왕이 곧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수용하고 장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재위 38년 기해(단기 2132, BCE 202)년에 연나라노관盧綰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패수浿水는 지금의 조하潮河(지금의 조백하)이다.

재위 45년 병오(단기 2139, BCE 195)년에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衛滿이 우리나라[번조선]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이해(환기 7003, 신시개천 3703, 단기 2139, BCE 195) 겨울에 해모수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태자 모수리慕潄離께서 즉위하셨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

고조선 삼한 유민들의 중삼한 건국

모수리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미(환기 7004, 신시개천 3704, 단기 2140, BCE 194)년이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모두 풍요롭고 생활이 넉넉하였다. 

중마한의 시조 탁과 경향분수법 제정
후에 기준箕準이 떠돌이 도적 위만[流賊]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오가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로 여정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이다. 이를 일러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때 변한과 진한도 각각 그 백성과 함께 백 리 땅에 봉함을 받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변한弁韓, 진한辰韓은 모두 마한馬韓의 정령政令을 따라서 그대로 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재위 2년 무신(단기 2141, BCE 193)년에 임금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보내 평양平壤에 성책城柵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재위 3년 기유(단기 2142, BCE 192)년에 임금께서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부속시켜 아우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다. 이 때 중부여中夫餘 사람들이 모두 식량 조달에 참여하였다. 겨울 10월에 수도와 지방을 나누어 지키는 법[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여 수도는 천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위수를 총괄하고, 지방은 사방 네 개 구역[四出]으로 나누어 (오가가)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윷놀이에서 말판 싸움을 보는 듯했으며, (천지의 창조 설계도인) 용도龍圖로써 변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았다.

재위 25년 신미(환기 7028, 신시개천 3728, 단기 2164, BCE 170)년에 모수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해서高奚斯 즉위하셨다.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번조선 유민 최승의 낙랑국 건설

고해사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신(환기 7029. 신시개천 3729. 단기 2165, BCE 169)년이다. 정월에 낙랑  최숭崔崇이 해성에 곡식 3백 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에 이르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이 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

재위 42년 계축(단기 2206, BCE 128)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셨다.

재위 49년 경신(환기 7077, 신시개천 3777, 단기 2213, BCE 121)년 일군국一群國에서 사절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이 해 9월에 고해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高于婁께서 즉위하셨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일명 해우루) 재위 34년]


위만정권 우거왕의 침략과 해성 수복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환기 7078, 신시개천 3778, 단기 2214, BCE 120)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게 하셨는데, 고진이 점차 병력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을 세웠다. 고진의 벼슬을 높여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으셨다. 

재위 3년 계해(단기 2216, BCE 118)년에 우거의 도적떼가 대거 침략해 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재위 4년 갑자(단기 2217, BCE 117)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재위 6년 병인(단기 2219, BCE 115)년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셨다. 이로써 구려하九黎河(지금의 요하) 동쪽이 전부 항복하였다.

재위 7년 정묘(단기 2220, BCE 114)년에 임금께서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澈(무제)* 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郡을 설치 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
이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海夫婁 즉위하였다.

해부루의 가섭원 부여 건국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때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주청하기를 “통하通河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혹은 동부여東夫餘라 한다.

[동명왕 재위 22년, 북부여 단군 재위 27년]

동명왕 고두막한의 북부여 재건과 시대 배경

고두막단군 재위 원년은 계유(환기 7090, 신시개천 3790, 단기 2226, BCE 108)년이다. 이때는 북부여 고우루단군 13년이다. 임금께서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준하며 용병用兵을 잘 하셨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 후예라 말한다.

재위 3년 을해(단기 2228, BCE 106)년에 임금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돌리니 이르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 달이 채 안 되어[不旬月] 군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나라 도적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望風] 스스로 무너졌다. 임금께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句麗河 건너 계속 추격하여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에 이르셨다. 그곳은 바로 옛 고리국槀離國 땅이다.

재위 22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이 해는 4세 고우루단군 34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고, 유민과 합세하여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연달아 쳐부수었으며, 그 수비 장수를 사로잡아 방비를 갖추어 적을 막기에 힘쓰셨다.

고두막한의 북부여 국통 계승
재위 23년 을미(단기 2248, BCE 86)년에 북부여가 성읍을 바쳐서 항복하고 왕실만은 보존시켜 주기를 여러 번 애원하였다. 고두막 단군께서 들어 주시어, 해부루解扶婁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이주해 살게 하셨다. 임금께서 북 치고 나팔부는 악대[鼓吹]를 앞세우고 무리 수만명을 이끌고 도성에 입성하셨다. 나라 이름을 여전히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셨다.

가을 8월에, 한나라 도적과 여러 번 서압록하西鴨淥谷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셨다.

고주몽의 탄강
재위 30년 임인(환기 7119, 신시개천 3819, 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 고주몽高朱蒙 차릉岔陵에서 태어났다.

재위 49년 신유(환기 7138, 신시개천 3838, 단기 2274, BCE 60)년 고두막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城에 장사를 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께서 즉위하셨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덕을 갖추고 민심을 얻어 작은 해모수라 불림
고무서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7139, 신시개천 3839, 단기 2275, BCE 59)년이다. 임금께서 졸본천에서 즉위하셨다.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백악산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천제를 지내셨다. 여러 가지 사례를 반포하여 널리 행하게 하시니 안팎에서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께서는 태어날 때 신령스러운 덕을 갖추시어 능히 주술呪術로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시며[呼風喚雨], 자주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시니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慕慕漱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이때에 한나라 도적이 요하遼河 동쪽에서 분란을 일으키므로 여러번 싸워서 승리를 거두셨다.

재위 2년 계해(환기 7140. 신시개천 3840. 단기 2276. BCE 58)년에 임금 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으셨다. 겨울 10월에 고무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고주몽高朱蒙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대통을 이으셨다.

이에 앞서 고무서단군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高朱蒙이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시고 공주(소서노)와 맺어 주어 아내로 삼게 하셨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당시 나이 23세였다.

고주몽이 북부여를 계승하기 전에 피난한 과정
당시 동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주몽이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사람과 친구의 의를 맺고 함께 길을 떠났다. 차릉수岔陵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하여 강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천상 상제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오늘 달아나는 길인데 쫓는 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리까?" 하니,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수없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다.


가섭원 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동부여 수도 가섭원은 차릉

시조 해부루왕의 재위 원년은 을미(환기 7112, 신시개천 3812, 단기 2248, BCE 86) 년이다. 왕이 북부여의 제재를 받아 가섭원迎葉原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가섭원 차릉岔陵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토지가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였는데, 특히 보리가 많이 났다. 또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에 좋았다. 

재위 3년 정유(단기 2250, BCE 84)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구흘을 베풀고 원근의 유민을 불러 위로하며,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하였다. 또 밭을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니,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때를 맞추어 비가 내려 차릉을 축축이 적시므로 백성이 「왕정춘王正春」이라는 노래를 불러 임금을 찬양하였다. 

고주몽의 혈통과 주몽이란 말의 어원
재위 8년 임인(단기 2255, BCE 79)년, 이보다 앞서 하백의 딸[河伯女] 유화柳花가 밖에 나가 놀다가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漸의 꾐에 빠졌다. 고모수는 강제로 유화를 압록강 변에 있는 궁실로 데려가 은밀히 정을 통하고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升天不歸]. 유화의 부모는 중매도 없이 고모수를 따라간 것을 꾸짖고 먼 곳으로 쫓아 보냈다. 

고모수의 본명은 불리지弗離支인데 혹자는 고진高辰(북부여 2세 모수리단군의 아우)의 손자라 한다. 해부루왕이 유화를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태워 환궁하여 궁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해 5월 5일, 유화 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고주몽高朱豪이니 골격이 뚜렷하고 늠름하며 위엄이 있었다. 나이 겨우 7세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을 쏘면 백 번을 다 맞추었다. 부여 말[夫餘語]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왕자 금와의 탄생
재위 10년 갑진(단기 2257, BCE 77)년이었다. 해부루왕이 늙도록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하루는 산천에 후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더니 그 앞에 마주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 보게 하였더니, 거기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과인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내려 주신 것이로다"하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는데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재위 28년 임술(단기 2275, BCE 59)년에 사람들이 고주몽을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여겨 죽이려 하였다. 이에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도착했다. 이듬해 새 나라를 여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재위 39년 계유(환기 7150, 신시개천 3850, 단기 2286, BCE 48)년에 해부루왕이 훙서薨逝하였다. 태자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고구려와의 대외관계와 유화 부인의 죽음
금와왕의 재위 원년은 갑술(환기 7151, 신시개천 3851, 단기 2287, BCE 47)년이다.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재위 24년 정유(단기 2310, BCE 24)년에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에서는 위병衛兵 수만 명으로 호위하게 하여 영구靈柩를 졸본으로 모셔 와서 장사를 지냈다. 주몽 성제께서 황태후의 예로써 모후母后의 영구를 모셔와 능陵을 조성하고 그 곁에 묘사廟祝를 지으라 명하셨다. 
재위 41 년 갑인(환기 7191, 신시개천 3891, 단기 2327, BCE 7)년에 금와왕이 훙서하였다.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대소왕의 재위 원년은 을묘(환기 7192, 신시개천 3892, 단기 2328, BCE 6, 고구려 2세 유리명열제 14)년이다. 봄 정월에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 열제烈帝(2세 유리명열제)께서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셨는데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졸본성을 쳐들어갔으나 큰 눈이 와서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아 물러났다. 
재위 19년 계유(단기 2346, CE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대소랑의 죽음
재위 28년 임오(단기 2355, CE 22, 고구려 대무신열제 5)년 2월에 고구려가 국력을 다하여 쳐들어왔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꿀고 나가 싸우다가 왕이 탄 말이 진구렁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때 고구려 상장 괴유怪由가 곧장 나아가 왕을 죽였다.
부여군은 오히려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마침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계속되자 고구려 열제께서 밤을 틈타 군사를 비밀리에 움직여 포위망을 벗어나 셋길로 달아나셨다.
 
대소왕 아우의 갈사국 건설
여름 4월, 왕의 아우가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悔頭國 왕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曷思水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이 나라가 바로 갈사국(갈사부여)이다.
 
고구려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단기 2401, CE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都頭왕(갈사국 3세)이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니, 시조로부터 3세, 역년 47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 열제께서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아 살 집을 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주어 동부여후東夫餘候로 봉하셨다.
 
대소왕 종제가 고구려에 투항하여 연나부 왕에 임명됨
이 해 가을 7월에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백성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선왕先王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국은 한쪽에 치우쳐 있어 안락하기는 하나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도다. 나 또한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여 살기를 도모하자"라고 하였다. 드디어 옛 도읍의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띠 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絡氏 성을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에서 백랑산白狼山 계곡으로 옮겨갔는데 연燕나라와 가까운 곳이었다. 

고구려 21세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갑술(환기 7691, 신시개천 4391, 단기 2827, CE 494)년에 이르러 나라가 고구려에 굴복하여 들어가니 연나부의 낙씨는 마침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