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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국본기, 신시본기

신시본기-전문

by 광명인 2024. 6. 10.

1. 배달 개창기의 취화법 

진역유기震域留記 신시기神市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掌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縠 벼슬을 맡았으나, 당시 씨 뿌리고 거두는 법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또 불씨[火種]가 없어 걱정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높고 큰 나무가 말라 황량하게 줄기를 드러내고 오래된 나무 줄기와 말라버린 가지가 서로 얽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거센 바람이 숲 속에 불어닥치니, 땅 위의 크고 작은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고 오래된 나무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번쩍번쩍 빛나며 잠깐 일더니 곧 꺼졌다. 이에 문득 깨닫고 말하 기를, "이것이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는 방법이로다" 하고,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나뭇가지를 마찰하여 불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을 일으키는 방법이 불편하였다.

다음날 다시 높고 큰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러 이리저리 배회하며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줄무늬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고시가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빗나가 바위 귀퉁이에 맞고 불이 번쩍 일어났다. 이에 몹시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금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었다. 이로부터 백성이 음식을 불에 익혀 먹게 되었다. 쇠를 녹이고 단련 하는 기술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여 물건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2. 태고 문자의 창시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書契]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 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평평하게 모래가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와 같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 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다만 그 후로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태고 문자가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구조가 쓰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찍이 남해도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등과 그 외 지역의 암석에 문자가 조각된 것이 간혹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문자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전서篆書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성하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럽다.

3. 배달족의 문명화 과정과 동이 명칭의 유래


[초대 풍백, 우사, 운사의 사명과 공력]
환웅천황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비록 새, 짐승, 벌레, 물고기의 해는 없애게 하셨으나, 그래도 사람들은 아직 동굴과 움집 속에서 거처하였다. 땅의 습기 바깥바람의 기운이 사람에게 침범하여 질병을 일으키고, 또 금수와 벌레와 물고기 무리가 한 번 쫓겨난 뒤로 점차 인간을 피해 숨어버려 잡아먹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사雨師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이 살 집을 짓고, 소와 말, 개, 돼지, 독수리, 호랑이 같은 짐승을 잡아 길러서 이용하게 하셨다.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를 시켜 '남녀가 혼인하는 법'을 정하게 하시고, 치우治尤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직책'을 관장하게 하셨다.

[치우천황의 위무와 동이 명칭의 유래]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14세 환웅)천황이 등극하여 구치(채광 기계)를 만들어서 구리와 철을 캐시고, 철을 단련하여 칼과 창과 큰 쇠뇌(弩)를 만들게 하셨다. 사냥을 가거나 전쟁을 할 때 이것에 신처럼 의지하니, 주위 모든 부족이 대궁大弓의 위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진 지 오래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 민족을 '이夷'라 불렀다. 설문해자에 이른바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를 합한 자(大+弓)로 '동방 사람[東方人]을 뜻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공자 춘추春秋를 지을 때 이夷라는 명칭을 융적戎狄과 함께 오랑캐의 칭호로 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4. 이주족인 웅족의 정착과 환족으로의 귀화

삼성밀기三聖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強族]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삼신三神의 도로서 가르침을 베푸시고[乃以三神設敎] 백성을 모아 맹세하게 하시니, 이때부터 은밀히 그 강족을 제거하려는 뜻을 두셨다.


[환족과 웅족의 연합]
당시 부족 호칭이 통일되지 않고 풍속은 점점 갈라졌다. 원주민은 호족虎族이고, 새로 이주해 온 백성은 웅족熊族이었다. 호족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직 약탈을 일삼았고, 웅족은 성품이 고집스럽고 우둔하여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두 부족이 비록 한 고을에 살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원해져서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 주지 않았고 혼인도 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서로 승복하지 않아, 한 길을 같이 간 적이 없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웅족 여왕[熊女君]이 환웅천황께서 신령한 덕이 있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 천황을 뵙고 "원컨대 살 터전을 내려 주시어 저희도 한결같이 삼신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이를 허락하시고 살 곳을 정해주시어 자식을 낳고 살게 하셨다. 그러나 호족은 끝내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四海 밖으로 추방 하시니, 환족의 흥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 초대 거발환 환웅의 동방 문명 개척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람은 많고 물자는 적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였더니, 서자부庶子部의 대인 환웅이 민정을 두루 살펴 듣고 천계에서 내려와 지상에 광명 세상을 열고자 하셨다. 이때 안파견 환인(7세 지위리 환인)께서 금악산金岳山과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을 두루 살펴보시고, "태백산은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환웅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간과 만물이 제자리를 잡았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를 거느리고 몸소 하계에 내려가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베풀고천신에게 제사를 지내 부권父權을 세우라.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평화롭게 하나 되게 하여 사도를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자손만대의 홍범으로 삼을지어다." 하셨다. 그리고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시고 세상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셨다.

환웅께서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한다. 또한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 · 왕명 · 형벌 · 질병 · 선악을 주장하게 하시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신교의 진리로써 정치와 교화[在世理化]를 베풀어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웅족이 신교 문화의 광명 정신으로 교화됨]
이때 웅족과 호족[一熊一虎]이 이웃하여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와서 기도하며 환웅께 "하늘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환웅께서 신령한 주문[神呪]으로 체질을 개선시켜 신명을 통하게 하셨다. 또 삼신이 내려 주신 물건으로 신령한 삶을 얻게 하시니, 바로 쑥 한 단과 마늘 스무 개였다. 그리고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 그리하여야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르게 구제하며, 진정한 사람다운 인격을 갖춘 대인이 되리라" 하셨다.

웅족과 호족 양가는 이것을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삼가며 스스로 수련에 힘썼다.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와 고통을 참으며 하늘의 계율을 준수하고 환웅과 한 언약을 지켜서 건강한 '여자의 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거짓과 태만으로 하늘의 계율을 어겨 끝내 천업天業을 함께 이루지 못하였다. 이것은 두 부족의 천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웅씨족 여성들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음이 지나쳐서 이들과 혼인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매양 신단수 아래에 함께 모여 주문을 읽으며 아기를 가져 환웅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임시로 이들을 환족 백성으로 귀화시켜 살 곳을 주시고[得管境] 환족 남자와 혼인하게 하여 자녀를 낳게 하시니, 이로부터 모든 남녀가 점차 인륜의 도를 얻게 되었다.

[고조선 시대의 통치 영역]
그 후 단군왕검이라 불리는 분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이때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시니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할 영토였다.

6. 신교의 제사 문화와 책력의 기원: 칠회제신력

신시 시대에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 있었다. 첫째 날에 천신天神(삼신 상제님)께, 둘째 날에 월신月神께, 셋째 날에 수신水神, 넷째 날에 화신火神께, 다섯째 날에 목신木神께, 여섯째 날에 금신金神께, 일곱 째 날에 토신土神께 제사지냈다. 책력을 짓는 방법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계해癸亥를 쓰다가, (5세) 구을단군께서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쓰시고 10월을 상달[上月]로 삼으시니 이것이 한 해의 처음[歲首]이 되었다. 6계六癸는 신시(배달) 환웅[神市氏]께서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지은 것으로 그때부터 계癸로써 첫머리를 삼았다. 계癸는 계啓의 뜻이며, 해亥는 핵核(씨, 종자)의 뜻이니 '해가 뜨는 뿌리[日出之根]'라는 말이다.

[10천간과 12지지의 본래 뜻]
그러므로 계癸는 소라蘇羅요. 갑甲은 청차이清且伊, 을乙은 적강赤剛, 병丙은 중림仲林, 정丁은 해익海弋, 무戊는 중황中黃, 기己는 열호수烈好遂, 경庚은 임수林樹, 신辛은 강진強振, 임壬은 유불지流不地이다.
또 해亥는 지우리支于離요. 자子는 효양曉陽, 축丑은 가다加多, 인寅은 만량萬良, 묘卯는 신특백新特白, 진辰은 밀다密多, 사巳는 비돈飛頓, 오午는 융비隆飛, 미未는 순방順方, 신申은 명조鳴條, 유酉는 운두雲頭, 술戌은 개복皆福이다. 


7. 인류 전쟁의 시초

신시 환웅께서 처음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산에는 길이 없고 못에는 배와 다리가 없었으며, 금수는 무리를 이루고 초목이 무성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어울려 함께 살았고, 만물과 무리지어 같이 살았다. 짐승 떼에 굴레를 씌워 놀고 까마귀와 까치의 둥지에 기어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때로 짐승의 피와 고기를 이용하였다. 옷을 짓고 농사지어 먹으며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사니 이때를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는 세상[至德之世]'이라 일렀다. 백성이 살면서도 할 일을 모르고, 다니면서도 갈 곳을 모르며, 행동은 느리고 만족하며, 보는 것은 소박하고 무심하였다. 오직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지면 쉬니, 하늘의 은택이 넘쳐흘러 궁핍을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만물과 백성이 더욱 번성하자 소박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로이 일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게 되어 비로소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짓는 자는 이랑을 두고 다투고 고기잡는 자는 구역을 두고 다투어, 싸워서 얻지 않으면 궁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류의 전쟁은 하늘의 뜻인가?]
그 후에 활과 쇠뇌가 만들어지자 새와 짐승이 숨고, 그물이 펼쳐 지자 물고기가 숨어 버렸다. 심지어 창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며 피를 뿌리고,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지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선천의 상극질서) 본래 그러했기 때문[天意固然]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환족의 서방 영토 개척]
지금 인류의 근원을 상고해 보면 모두 한 뿌리의 조상[一源之祖]이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동서로 나뉘면서 각기 한 곳에 웅거하고 지역의 경계가 아주 단절되어 사람이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수렵하고 나무를 채벌하는 외에 다른 험난한 일이 없었다. 수천 년이 지나고, 세상 판도가 이미 변하자 중국[仲國]은 당시 서쪽 땅[西土]의 보고였다. 기름진 땅이 천 리요, 기후가 좋아 우리 환족이 그 땅에 이주할 때 앞을 다투어 나아갔고, 토착민도 몰려들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자기 편이면 돕고, 뜻을 달리하면 원수처럼 여겨 싸움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만고 전쟁의 시초이다.

8. 5세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

환웅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환웅이 계셨다.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반드시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잘 기르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장생의 법방이다.

[삼신의 성령을 받고 우주 삼계를 통한 태호복희]
태우의환웅의 아들은 열둘이었는데 맏이는 다의발多儀發환웅이시요. 막내는 태호太皞이시니 복희伏羲라고도 불렀다. 태호복희씨가 어느 날 삼신께서 성령을 내려 주시는 꿈을 꾸고 천지만물의 근본 이치를 환히 꿰뚫어 보시게 되었다. 이에 삼신산三神山에 가시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掛圖를 얻으셨다. 그 획은 세 개는 끊어지고[三絶] 세 개는 이어지는[三連] 음양 원리로 이루어졌다. 그 위치를 바꾸어 추리함은 오묘하게 삼극三極과 부합하여 변화가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 신시神市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직책을 대물림하셨다. 후에 청구, 낙랑을 지나 진陳 땅에 이주하여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쪽 땅[西土]에서 나라를 세우셨다. 그 후예가 풍산風山에 나뉘어 살면서 역시 풍風으로 성을 삼았다. 후에 패佩· 관觀·임任 · 기己 · 포庖 · 리理 · 사姒 · 팽彭의 여덟 씨족으로 나뉘어졌다. 지금의 산서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주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임任 · 숙宿 · 수구須句 · 수유須臾 등의 나라가 모두 에워싸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관직을 맡으셨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도掛圖를 만들고, 신시 시대의 계해癸亥를 고쳐 갑자甲子로 첫머리를 삼으셨다. 여와女媧(복희의 여동생)는 복희의 제도를 계승하고, 주양朱襄은 옛 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세상에 전하였다. 복희씨의 능은 지금의 산동성山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 남쪽에 있다.

[동양의학과 농사의 시조인 신농씨의 혈통]
신농神農 열산列山에서 창업을 하셨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시고, 소전은 소호少皞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失氏의 방계 자손이시다. 당시 백성이 정착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하여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다. 곡식과 삼을 많이 생산하고, 각종 의약과 치료법[藥石]도 점점 갖추어지자, 한낮에 저자(시장)를 열어 교역을 하고 돌아갔다.


9. 14세 치우천황의 서쪽 영토 대정벌

유망楡罔에 이르러 정치의 속박이 가혹해지자 여러 읍락이 사이가 나빠져 백성이 많이 흩어지고, 세상살이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 치우천황께서 배달 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치실 때,
하늘의 뜻을 밝혀 생명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開天知生]
땅을 개간하여 뭇 생명을 다스리게 하시고[開土理生]
사람의 마음을 열어 생명을 존중하게 하시니[開人崇生],
백성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그분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역량이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시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 북쪽[河朔]에 웅거하여 안으로 군사를 용맹하게 조련하고 밖으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셨다.

[탁록 대정벌과 12제후국 병합]
유망의 정치력이 쇠약해지자 치우천황께서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셨다. 형제와 부계 일족[宗黨]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인물 81명을 뽑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하시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 칼과 갑옷과 창과 큰 활과 호시楛矢(싸리나무로 만든 화살)를 많이 제작하셨다. 그리고 전군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여 탁록涿鹿을 함락시키고, 구혼九渾에 올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셨다. 그 형세가 자못 질풍과 같아 만군을 복종시키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셨다. 1년 사이에 아홉 제후의 땅을 함락시키고, 다시 옹호산雍狐山 나아가 구치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쌍날창(예과芮戈)과 옹호의 갈래창(극戟)을 만드셨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거느리고 양수洋水로 출진하여 빠르게 공상空桑까지 진격하셨다. 당시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 유망의 도읍지였다.

[유망과 소호 정벌]
이 해에 치우천황이 12제후의 나라를 모두 병합하실 때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니, 서토西土(지금의 중국땅)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楡罔이 소호少昊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예과와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울 때,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혼미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하니 소호少昊가 대패하여 황급히 공상空桑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다. 치우천황이 즉시 하늘에 제사 지내어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여 고하시고, 다시 진군하여 탁록涿鹿을 포위 압박하여 일거에 멸망시키셨다. 관자管子에 '천하의 임금 곧 치우천황이 급작스럽게 싸우며 한 번 노하심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10. 헌원을 토벌하여 신하로 삼다 

[중화문명의 발상지 탁록]
이때 공손公孫 헌원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천황께서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병마를 크게 일으켜 치우천황과 승부를 겨루려 하였다. 천황께서 항복한 장수 소호少昊를 먼저 보내 탁록涿鹿을 포위하여 멸하려 하실 때, 헌원이 오히려 항복하지 않고 감히 수 많은 전쟁에 나섰다.
천황께서 9군九軍에 명하여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시고,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탁록 유웅有熊 들판에서 여러 번 헌원과 맞붙어 싸울 때,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조이면서 참살하시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시니, 적군은 두렵고 손이 떨려 바쁘게 도망쳐 백 리 안에 병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수淮水, 태산泰山 땅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시고 회대淮岱(회수와 태산)에 집을 지으시니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체로 당시 서쪽 땅의 사람들은 한갓 화살과 돌팔매[矢石]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치우천황의 뛰어나고 강력한 법력에 부딪혀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 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탁록의 10년 대전쟁]
운급雲笈의 헌원기軒轅記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이라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적의 낭패가 얼마나 심하였겠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치우천황이 더욱 군용을 정비하여 사방으로 진격하셨다. 10년 동안 헌원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는 물러날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번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군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우리 배달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싸움마다 출전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불같이 진노하여 형제 종족으로 하여금 대격전에 힘써 싸우게 하여 위엄을 확고히 세우셨다. 그리하여 헌원의 군사로 하여금 감히 추격하거나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시고, 더불어 대전을 치뤄 한바탕 몰아쳐서 휩쓸어 버리신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치셨다.

[사마천 사기의 비열한 역사 왜곡]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급히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히도 전쟁터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금살치우擒殺蚩尤]"라고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천황께서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시니, 적진이 마침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 예芮와 탁涿을 지키게 하시고, 동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취하여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쪽으로 침투할 길을 막으셨다. 천황께서 붕어하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진실로 길이 남을 찬란한 그 위엄이 후세인의 가슴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11. 치우천황릉의 위치와 천황에 대한 서방 한족의 전설적 추앙

치우기의 전설과 유래
지금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鄉城에 있으며, 높이는 7장丈 이라 한다. 진한秦漢 시대에 주민들이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진홍색 비단처럼 펼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아마도 그분의 영웅적인 기백은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헌원軒轅은 이 뒤로 쇠미해졌고, 유망楡罔도 따라서 영구히 몰락하였다. 치우천황蚩尤天王의 웅렬하심은 대대로 온 천하를 진동시켰다. 특히 유주幽州, 청주靑州지방에서 그 명성과 위엄이 지속되니, 헌원 이래 대대로 스스로 불안하여 그 치세가 끝날 때까지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 길을 내어도 편안히 안주하지 못하고, 탁록의 강가에 도읍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정한 곳에 살지 못하며, 항상 군사로 보호하여야 했다”하였으니, 헌원이 얼마나 전전긍긍하였는지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 또한 이르기를, "옛 가르침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라고 했으니, 저들이 치우천황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기운을 잃고, 대대로 이 교훈을 전하여 후인을 크게 경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고, 다만 전욱顓頊과 한 번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척하여 새 시대를 여시고 18세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다. 바야흐로 단군왕검께서 웅씨 비왕裨王으로 신시 배달을 대신하여 구족이 사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시고 강역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니[三韓管境] 이를 일러 단군조선이라 한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희께서 서쪽 변방에 봉함을 받아 직책에 정성을 다하시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그 지역 백성이 감화되어 따랐다.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하여 영토 밖까지 호령하셨다. 후에 갈고환웅葛古桓雄(10세)께서 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시니 공상空桑의 동쪽이 우리 땅으로 귀속되었다.

세속에 전해 오는 '치우' 의 뜻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慈烏支환웅(14세)에 이르렀다. 이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하셨다. 능히 짙은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飛石迫擊之機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雄圖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와 태산 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12. 배달과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

[신교의 3도 정신과 성·명·정과 진·선·미의 실현 문제]
대변경大辯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시씨神市氏(배달 초대 환웅)는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닦아修戒 사람들에 제천祭天을 가르치셨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의 본래 온전한 바탕을 따라 능히 본성에 통해[通性] 참됨眞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靑邱氏(14세 치우천황)는 선仙의 도로써 법을 세워設法 사람들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법[管境]를 가르치셨다. 선仙이란 사람이 본래 저마다 타고난 바를 따라서 자신의 영원한 생명력을 깨달아[知命] 널리 선善을 베푸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단군왕검)는 종倧의 도로써 왕을 세워建王 사람들에게 책화[責禍]를 가르치셨다. 종倧이란 사람이 스스로 으뜸 되는 바에 따라 정기를 잘 보존[保精]하여 아름다움美을 실현하는 것이다.

[삼신과 삼재 [天·地·人]와 우주 본체인 삼극의 관계]
그러므로 (이러한 전佺과 선仙과 종倧의 도道 가운데) 
전佺은 텅 빈 자리로 천도天道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광명 자리로 지도地道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천지 도덕의 삶을 실현하는 강건한 자리로 인도人道에 근본을 둔다.

13.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대변경의 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큼[大], 하나[一]라는 뜻이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환, 단, 한의 의미]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桓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 풍백· 우사· 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14. 개천·개인·개지의 뜻
성인을 보내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일러 개천開天이라 하니, 하늘을 열었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이 세상이 하늘의 이법(천리)과 부합되어 하나로 조화되는 것[虛粗同體]이다.
인간의 본래 성性(인간 속에 있는 삼신의 마음)을 여는 것을 개인開人이라 하니,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열어 주기 때문에 세상일이 잘 순환하게 된다. 이로써 형체와 함께 영혼이 성숙해 가는 것[形魂俱衍]이다. 
산을 다스려 길을 내는 것을 일러 개지開地라 하니, 땅을 개척하기 때문에 능히 때에 알맞은 일을 지어서 세상일이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개척의 삶을 통해 지혜를 함께 닦게[智生雙修] 된다.

15. 한민족 역사 속의 백두산의 의미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거대한 산악이 광활한 대지 가운데 장중하게 자리잡아 가로로 천 리를 뻗고, 높이는 2백 리를 우뚝 솟았다. 웅장한 고산준령이 꿈틀거리며 널리 덮어 배달 천국 진산鎮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곳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妙香山이 단지 낭림산맥이 서쪽으로 뻗은 맥에 매여 있다는 사실 하나로 환웅천황께서 강림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속에서 묘향산妙香山을 태백산太白山이라 한다면, 그 소견은 동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 땅에 국한시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산의 조종은 곤륜산崑崙山이라 하여,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를 기꺼이 감수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수백 년이 지났으되 오히려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는 글을 폐하고 크게 통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지금 동방의 여러 산 가운데 태백산太白山으로 불리는 곳이 자못 많다. 세속에서는 대개 영변의 묘향산妙香山으로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실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의 눈알이 마치 콩알 같고 팥알 같으니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요,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 곳을 천지天池라 부르는데, 바로 환웅 신시씨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妙香山은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 없고,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도 아니니 거론할 것도 없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에서는 태황산太皇山이라 부른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 오줌을 누지 아니하고, 산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가져간 물건을 담아 갔다.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오신 곳이 이 산이다. 또 이곳은 신주神州(배달)의 왕업이 흥한 신령한 땅이니, 소도蘇塗에서 제천祭天하는 옛 풍속은 필시 이 산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리고 예로부터 (동방으로 이주한) 환족桓族이 삼신상제님을 숭배하고 공경함이 또한 이 산에서 비롯하였으니 평범한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금수조차 모두 신령한 감화에 젖어 이 산에서 편안히 살며 일찍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였다. 사람도 이 산에 올라 감히 오줌을 누어 신神을 모독하지 않았으니, 만세에 걸쳐 항상 공경하고 수호하는 표상이 되었다.

16. 삼신산과 동북방의 광명 정신

우리 환족은 모두 신시 배달 환웅께서 거느린 무리 3천 명의 후손이다. 후세에 비록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으나 실로 환단일원桓檀一源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시 환웅께서 처음 강세하신 공덕을 반드시 후세에 전하고 입으로 외고, 잊지 말아야 하니 선왕선민先王先民이 옛날 삼신께 제사 지내던 이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三神山이라 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신시 환웅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의 은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 갔다. 나라를 세워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근본이 다른 나라와 판이하게 달라 우리의 신이한 기풍과 거룩한 풍속이 멀리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 이에 천하만방의 백성 중에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를 흠모하는 자는 반드시 삼신三神을 숭배하였고, 동북방東北方 신명神明이 머무는 곳이라 일컬었다.

삼신산이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불린 이유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사실이 잊혀지고) 폐단이 생겨나 점점 근거 없고 허황된 길로 빠져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괴이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연燕, 제齊 두 나라의 바닷가에 사는 괴짜 방사들에게서 번갈아 나왔다. 그 땅이 구환九桓, 신시神市와 서로 인접하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특히 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풍문으로만 듣고도 기이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다시 미루어 부연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삼신산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하여 당시의 임금을 미혹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동쪽 바닷가에 이르러 바라보니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여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툭하면 "삼신산 역시 발해 가운데에 있다" 운운하나, 사실 삼신산은 각각 세 섬[三島]에 있는 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봉래蓬萊는 쑥대가 우뚝우뚝 자라고 묵은 풀이 길에 황량하게 우거진 곳이라는 뜻으로 곧 천황이 내려오신 장소요, 방장方丈은 사방이 일 장씩 되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곧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요, 영주瀛洲는 바다가 섬에 둘러싸인 모습이니 곧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다. 이를 총괄하여 삼신산三神山이라 한다. 삼신은 곧 한 분 상제님[三神卽一上帝]이시다. 그렇건만 더욱 황당하고 괴이한 것은 삼신의 본래 의미조차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금강산金剛山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漢拏山을 영주산瀛洲山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 있는데 일찍이 그곳에 가 본 자가 있고,  신선 불사약이 그곳에 있으며, 그곳의 사물과 금수禽獣는 모두 희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한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신산에 환혼초還魂草 불로초不老草등이 자라므로 일명 진단眞丹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부터 흰 사슴, 흰 꿩, 흰매 등이 있었다. 괄지지括地志에 “새와 짐승과 초목이 다 희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이 많이 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불로초라 여겼다. 산사람이 산삼을 캐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뒤에 산행을 떠나니, 환혼 · 불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생각컨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단군세기에 이르되, “오사구단군(4세) 원년에 임금께서 북쪽을 순수하시다가 영초靈草를 얻었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또한 그 증거이다.

삼신산은 태백산, 곧 백두산이다
10월에 천제를 지내는 풍속은 마침내 천하만세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풍속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주神州에만 있는 독특하고도 성대한 의식으로 다른 나라와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이 홀로 곤륜산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도다. 옛날의 삼신산三神山은 곧 태백산太白山이고,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이다. 그 옛날 배달 때의 인문 교화가 근세에 와서 비록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나,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세까지 전해져 온 나라의 남녀가 모두 은연 중에 믿고 받들며,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三神께서 주관하신다" 하고, 열 살 안 된 어린아이의 신명의 안위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뛰어남과 용렬함을 모두 삼신三神께 맡겼다. 대저 삼신三神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일신一神 하느님이시다.

17. 중국 한족에게 전파된 삼신상제님 신앙

옛적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漢나라 왕 유철劉徹[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겸양하시어 (봉선을 하기 위해) 출발하지 않으시니 이는 삼신三神의 환심을 끊으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위소韋昭의 주에 "삼신三神은 상제上帝님이시다"라고 하였으니, 삼신설三神說이 일찍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

동방 문명의 신교와 제나라의 팔신제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으니, 팔신은 천주天主·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므로 반드시 높은 산 아래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 지내는데,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던 유법이다.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반드시 못[澤] 가운데 모난 언덕에서 제사 지내는데, 또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하던 풍속이 전해진 것이다. 천주天主는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내고, 병주兵主는 치우蚩尤천황께 제사를 지내니, 삼신三神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시고, 치우蚩尤는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비조이시다.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부리시고 또 만세 도술의 종장[道術之宗]이 되어 풍우風雨를 부르고, 만신萬神을 부르셨다. 이 때문에 상고 시대에 항상 천하 군무의 주장[天下戎事之主]이 되셨다. 해대海岱지방에 엄奄· 남藍· 개介· 우嵎· 내萊· 서徐· 회淮 팔족이 살았는데, 팔신설八神說이 이 팔족八族에서 생겨 당시에 성행하였다.

한고조 유방이 숭경한 치우천황
유방劉邦은 동이 계통은 아니지만 풍패豐沛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풍패에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유방은 이 풍속에 따라 치우천황께 제사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다. 드디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진泰의 수도)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어 10월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의 역법을 답습한 것이지만 동황태일東皇太一을 숭상하고 경배하며 치우천황께 지극한 공정심으로 제사 지낸 것과 연관이 있다. 4년 후에 진나라 땅을 평정하고 축관祝官(제사를 담당한 관원)에게 치우 사당을 장안長安에 짓게 하였으니,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혜성의 주재자는 치우천황
진서晋書의 천문지天文志에 "치우기蚩尤旗 혜성慧星(살별)과 비숫하나 뒤가 굽어 그 모습이 깃발과 같고, 이 별이 나타나는 지방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치우천황이 천상에서 별의 주재자가 된 것이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창힐蒼頡과 고신高辛이 다 치우의 후손으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산동, 회수 북쪽에 옮겨 살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풍채와 굳세고 맹렬한 기상이 아주 멀리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방사들이 신비하고 이상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현혹된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제齊 위왕威王과 연燕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三神山을 찾았는데, 진한秦漢 때에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선문자고羨門子高와 최후最後 같은 무리는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 오리悟利, 공손경公孫卿, 신공申公 같은 무리는 다 제나라 사람이다.

18. 동방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전파한 강태공

중국 주나라에 영향을 끼친 신교 문화
옛날 여상呂尙(강태공) 역시 치우의 후손이다. 그래서 성이 강姜인데,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낳은 아들이 모두 강씨姜氏가 되었다. 강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도술道術을 수련하고 천제지天齊池에서 천제를 올렸다. 또한 제齊에 봉토를 받으니 팔신八神의 풍속이 제나라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후에 그 땅에 도술을 좋아하는 자가 많이 나와 신선 황로黃老(황제와 노자)와 뒤섞이고 부연하여 더욱 풍속을 윤색시켜 놓았으니, 이것은 강태공이 그 풍속을 장려했 기 때문이다.

중국 한족 문화에 전수된 신교의 도통
일찍이 강태공이 음부경주陰符經注를 지어 자부紫府 선생의 삼황내문의 뜻을 조술祖述하였으니 연나라, 제나라 선비가 어찌 괴이하고 허황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또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黄帝中經이 부루태자(2세 단군)에게서 나와 우虞 사공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洪範九疇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대저 그 학문은 본래 배달 신시 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19. 삼신을 수호하는 벼슬 삼랑

강화도 혈구 삼랑성의 뜻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장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고인돌)으로 표시를 하였다. 이것이 후에 변하여 단壇이 되었는데,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夕壇이라 불렀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城壇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土壇을 쌓은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의 승려들은 이를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壇이라 칭하는데, 옛날 우리의 고유한 법이 아니다.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郎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郎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말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郎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 신도[發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郎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郎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郎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절을 지어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것은 승려들이 옛 풍속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이요,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또 "승도儈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때의 능묘 법제는 천하의 으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백성이 계곡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곳에 장사 지내지 않았다. 위로 국왕부터 모두 동굴에 옮겨 천신과 짝하여 제사를 지내다가 후에는 더러 평지에 장사 지내고, 박달나무 · 버드나무 · 소나무 · 잣나무를 빙 둘러 심어 표시를 해 두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신시 시대에는 능묘陵墓 제도가 없었다.
그 후 중고中古 시대에 이르러 국가와 부족이 강성하여 사는 것이 풍족해지자 장사 지내는 것도 사치스럽게 되었다. 예로써 제사를 지내고, 묘지도 성대하게 단장하여 둥글거나 혹은 모나게 하고 사치스럽게 장식을 덧붙였다. 높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방정하여 일정한 법이 있었고, 내벽과 외분이 모두 잘 정비되고 꾸며졌다. 이후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능묘의 법제가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