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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단고기 해제 등

고려사에 기록된 단군(檀君)

by 광명인 2024. 12. 9.

[고려때 지어진 고려사제왕운기에 기록된 단군(檀君)에 관한 기사는 각각 4회씩 총 8회 발견된다. 아래는 고려사 기사 4편과 제왕운기 기사 1편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이 기사들을 살펴보면 전부 고려의 유학자의 시각에서 사마천의 사기를 100%로 인용해 단군조선을 중화사관의 시각으로 왜곡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고려의 유교적 역사관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참으로 사기詐欺의 정석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사기詐欺란 99%의 진실속에 1%의 거짓을 슬쩍 소극적으로 흘려넣어 상대방의 정신을 기만하는 것인데, 그 1%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내용이라면 완벽한 사기詐欺가 되는 것이다. 동방의 정통 신교문화가 외래 문화에 의해 잠식되고 특히 중국의 유학이 고려에 퍼지면서 사마천이 왜곡한 사실역사의 진실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조선말까지 누구도 단군의 실체와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역사왜곡으로 지금의 강단사학은 단군의 역사 또한 신화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강화현(江華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혈구군(穴口郡)【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정주(貞州)의 바로 서남쪽에,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에 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高宗) 19년(1232)에 몽고(蒙古) 군대를 피해 들어가 도읍으로 삼으면서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 강도(江都)로 불렀다. 〈고종〉 37년(1250)에 중성(中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칸이다. 원종(元宗) 원년(1260)에 다시 송도(松都)로 환도하였다【부(府)의 동쪽 10리에 위치한 송악리(松嶽里)에 옛 궁궐 터가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 인주(仁州)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후 예전대로 복구시켰다. 우왕(禑王) 3년(1377)에 승격하여 부(府)가 되었다. 마리산(摩利山)【부(府)의 남쪽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 한다.】, 전등산(傳燈山)【일명 삼랑성(三郞城)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이 있다. 구음도(仇音島)·파음도(巴音島)·금음북도(今音北島)·매잉도(買仍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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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儒州)는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柳璥)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화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시령(始寧)이다【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다.】·장장평(庄庄坪)【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는데, 곧 당장경(唐莊京)이 와전되었다.】·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사(檀君祠)가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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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唐)나라와 함께 협공하여 멸망시키니 그 땅은 결국 신라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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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보(白文寶)는 자(字)가 화부(和父)이고 직산현(稷山縣) 사람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검열(春秋檢閱)에 보임되었고 여러 번 옮겨 우상시(右常侍)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기게 되자 글을 올려 10과(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선발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후에 상소하여 일을 말하기를, “국가에서 대대로 동방의 사직(社稷)을 지켜 문물예악(文物禮樂)에 옛 유풍(遺風)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도적의 환란이 여러 번 일어나 홍건적(紅巾賊)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임금의 수레가 남쪽으로 순행하였으니, 이를 말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난리를 당한 뒤라서 민(民)이 의지하여 살지를 못하니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내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또 하늘의 운수는 순환하여 한번 돌면 다시 시작하니 700년이 1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여 1대주원(大周元)이 됩니다. 이는 삼황(三皇)과 오제(五帝), 왕업(王業)과 패업(覇業), 치란(治亂)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주기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경과하여 주원(周元)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요(堯)·순(舜)과 육경(六經)의 도(道)를 따르고 공리(功利)와 화복(禍福)의 설(說)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하늘이 크게 도와 음양(陰陽)이 시기에 따라 순조롭게 되고 나라의 복이 연장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예종(睿宗)께서 청연각(淸閣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한 옛 일을 생각하시어 천인(天人)과 도덕(道德)의 설(說)을 강구하여 성학(聖學)을 밝히십시오. 또 시골구석이 모두 올바르게 되어야 국가가 다스려질 수 있으므로 당(唐)은 향촌에 대중정관(大中正官)을 두었고 우리나라도 초기에 역시 사심관(事審官)을 두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크고 작은 주군(州郡)에 다시 사심관을 두어서 비위(非違)를 규찰하게 하십시오. 신라(新羅)에서 처음 불법(佛法)을 숭상한 이래로 민이 출가하기를 좋아하여 향리(鄕吏)와 역리(驛吏)들이 모두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피하게 되었으며, 사대부(士大夫)들은 아들 1명만 있어도 역시 모두 머리를 깎게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관청에서 도첩(度牒)을 발급받아야만 비로소 출가할 수 있게 하고, 3정(丁)이 되지 않은 집은 모두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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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帝王韻紀]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네.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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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는데 환웅(桓雄)이라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땅으로〉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弘益人間]?” 라고 하였으므로 환웅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분을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손녀(孫女)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남자 아이를 낳게 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하였다. 조선의 영역에 자리잡고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沃沮), 동북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註 001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으니, 〈이는 단군이〉 죽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이후 164년 동안 비록 부자관계는 있었으나 군신관계는 없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