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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과 힘

문자의 기원과 발전

by 광명인 2024. 2. 15.

낭하리 석벽에 세겨진 고대문자(신지씨의 녹도문으로 추정)
수메르 쐐기문자

[문자문명 발생의 필수 요소이다. 한민족은 배달 시대부터 이미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초대 환웅천황 (BCE 3897~BCE 3804)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알려진 BCE 3200년경쐐기문자(수메르)상형문자(이집트)보다 앞서는 세계 최초의 문자이다. 고조선 3세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한글과 매우 흡사하다. 가림토는 일본에 전해져 아히루阿比留문자를 낳았다. 아히루 문자는 일본 신사의 고대 비석에서 자주 발견되는 신대神代문자의 일종이다. 가림토의 첫 세 글자는 삼신 사상에서 나온 천지인 삼재를 나타낸다. 흔히 음양오행론으로 한글의 소리 체계를 설명하지만, 한글은 사실 음양사상의 출원처인 신교의 삼신오제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 문명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문자의 사용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고대 사회에서 일찍이 문자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BCE 2000~1500년경의 도화문자圖畵文字). 문자가 창제되기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노끈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도 통용되었다.

고조선 이전 신시 배달 건국 때부터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창제하게 하셨다.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환웅 대성께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태백산으로) 내려 오신 뒤에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이를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환웅천황께서 녹도문(사슴 발자국 모양의 글)으로 천부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녹도란 문자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진서眞書라는 상형문자이다.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태호복희씨 때 용서龍書가 있었다[伏羲有龍書]"라고 했고, 신시본기에는 "주양朱襄은 옛 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세상에 전하였다[朱襄仍舊文字而始傳六書]"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황오제 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이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殷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 연구한 중국학자 낙빈기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이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가 한족이 아니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은나라의 갑골문甲骨文, 주나라의 대전大篆,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나라때 한자漢字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문자가 바로 중국 문자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갑골문자상나라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기 때문에, 갑골하면 으레 상나라의 것으로 연상한다. 그러나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갑골문자는 우리 민족과 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발해연안의 동이족 문화권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간 갑골문화가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 상나라의 도읍지인 은허 지역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갑골문이 상나라 문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상고금문과 마찬가지로 동이족의 문자이다.(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138~141쪽) 

배달국에서는 숫자로서 산목算木이 통용되었고, 14세 자오지환웅 때는 화서花書(전목佃目)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시 배달 때부터 있던 문자를 3세 가륵단군 때 수정·보완하여 만든 것이 가림토加臨土 문자이다.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조와 태백일사 소도 경전본훈에서는 가림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삼랑을보륵이 창안한 가림토 문자

가륵단군 재위 2년 경자(단기 153, BCE 2181)년, 이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랐다. 비록 상형象形• 표의表意문자진서眞書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땅이 백리가 되는 나라에서도 문자가 서로 이해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단군세기).

그런데 '가림토'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특히 모음 11자는 똑같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옛 전서를 모방하였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고 하여 한글이 옛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혔다.

은나라 말기의 금문

서토(중국)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갑골문과 주나라의 대전大篆(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졌다. 이에 BCE 865년 한수漢水(지금의 대릉하)사람 왕문王文부예符藉를 만들어 임금(31세 등올단군)께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BCE 8세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용 문자가 되었고 가림토신지문자는 점차 한자를 보조하는 글로 사용되다가 잊히게 되었다.

한국의 한글 학자들은 훈민정음이 독창적이었다는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여, 여기에 나오는 옛 전문몽골 파스파 문자[蒙字]나 한자漢字 자체字體의 하나인 전서篆書 또는 범자梵字(산스크리트 문자)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몽골문자나 전서, 범자와 닮은 데가 전혀 없다. 인류 문명사에서 한글처럼 고도의 체계를 가진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물에 의해서 발명된 사례는 찾을 수 없다. 한마디로 15세기 중엽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독창적으로 처음 만들었다는 견해는 역사 발전 법칙에 맞지 않는 억설일 뿐이다.

한글의 모태인 가림토문자몽골, 만주, 서역 등 당시 단군조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본에는 가림토문자로 된
비석과 문서까지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대神代 문자, 혹은 대마도 아히루 가문에서 처음 발견 되었다고 해서 아히루阿比留문자라 하여 매우 신성시한다. 가림토 문자가 일본뿐 아니라 중원의 서쪽인 서역에서까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만리가 "오직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등의 무리가 각기 그 문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로 족히 도道라 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여러 지역에서 옛 전문을 모방한 문자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자들의 원형이 바로 가림토였을 것이다. 가림토 문자는 일본은 물론이고 멀리 중원의 서하, 서번 지역까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도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書契]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 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평평하게 모래가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와 같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 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참조 1: 신시본기- 태고 문자의 창시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관직을 맡으셨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도掛圖를 만들고, 신시 시대의 계해癸亥를 고쳐 갑자甲子로 첫머리를 삼으셨다. 여와女媧(복희의 여동생)는 복희의 제도를 계승하고, 주양朱襄(복희국 13세 임금)은 옛 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세상에 전하였다. 
*주양朱襄: 태호복희씨의 후손으로 복희국 13세 임금, 태호 복희씨는 '역철학과 태극기의 시조이며, 또한 한자 만드는 방법인 육서六書의 원칙을 발명하여 '문자의 비조'가 되었다.

참조 2: 신시본기-태호복희씨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날부터 있었으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 암벽에 신시 시대의 옛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쓴 서법은 부符 전서篆書와 비슷하다. 또 자부 선생의 '삼황내문' 부루태자의 오행은 모두 환단桓檀 시대에 나온 것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유래한 한문漢文은 왕문이 남긴 법이다. 유기留記(진역유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령한 글자 획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ㄱ 자와 같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신지 선인이 전한 것이라 한다. 혹자는 이것을 문자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 획이 곧게 나가서 굽은 형으로, 관제管制(거느리어 다스림)하는 뜻이 있으며, 그 형태와 소리는 어떤 의도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
참조 3: 소도경전본훈-문자의 기원과 자취

배달 신시 때에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천황 때에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 때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목算木은 (위 참조)이고, 전목個目은 (위 참조)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가륵단군(3세) 2년에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지어 가림다加臨多라 하였다.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위 참조)
참조 4: 소도경전본훈-한글의 원형 가림다

고조선의 진한辰韓과 부여[餘]와 왜국[倭國]은 혹 횡서하고 혹 노끈을 맺고[結繩], 혹은 나무에 문자를 새겼는데[契木]오직 고구려는 붓 글씨를 썼다[모사영법模寫潁法], 생각컨대 필시 환단桓檀의 상고 시절에 문자를 본떠서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리라. 일찍이 최치원이 신지神誌가 옛 비문에 새겨 놓은 천부경을 얻어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자와 함께 확실히 모두 실제했던 자취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시 시대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 선생 때 우서雨書가 있었고, 치우천황 때 화서花書가 있었다고 했는데, 투전문鬪佃文 등은 바로 그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흔적이다. 복희 때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 때 신전神篆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자가 백두산, 흑룡강, 청구, 구려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부여 사람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서篆書가 복잡하다 하여 그 획수를 약간 줄여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사신으로 숙신에 왔다가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서 필법筆法을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체이다. 진晉나라 때 왕차중王次仲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 이제 그 글자의 내력을 고찰해 보면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참조 5: 소도경전본훈-시원문자의 발전과정

이때 천하의 형세는 세 세력이 세발솥의 솥발과 같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록涿鹿의 북쪽에 대요大撓동쪽에 창힐倉頡서쪽에 헌원軒轅이 자리잡고 무력으로 승패를 겨루었으나 서로 이기지 못했다. 당초에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으므로 싸울 때마다 불리하였다. 이에 대요大撓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다시 창힐倉頡에게 의지하려 하였으나 여기서도 역시 도움을 얻지 못했으니, 이들 두 나라는 모두 치우천황을 추종하는 세력이 었다. 대요大撓는 일찍이 배달로부터 육십갑자의 '간지干支의 술법'을 배웠고, 창힐倉頡은 '부符 같고 그림 같은 모습을 한 글자, 즉 부도지문符圖之文을 전수받았다. 이때 모든 제후는 치우천황의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 또한 배달로부터 문물을 배워갔기 때문이다.
참조 6: 삼성기 하-배달의 전성기

재위 2년 경자(단기 153 , BCE 2181)년, 이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랐다. 비록 상형 표의 문자인 진서眞書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땅이 백 리가 되는 나라에서는 서로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가륵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글자는 아래와 같다.(위 도표 참조) 재위 3년 신축(단기 154, BCE 2180)년에 신지 고설에게 명하시어 '배달유기(최초의 역사서)'를 편찬하게 하셨다.
참조 7: 단군세기-3세 가륵단군

누사婁沙가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1468, BCE 866)년에 아들 이벌伊伐 (44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신(단기 1469, BCE 865)년에 한수漢水(지금의 대릉하)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어 올리니 천왕(31세 등올단군)께서 기뻐하시고 삼한에 명하여 시행하게 하셨다.
참조 8: 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


옛날 포희씨(包犧氏)가 천하(天下)에 왕노릇할 때에 우러러 하늘의 상(象)을 관찰하고 굽어 땅의 법(法)을 관찰하며, 새와 짐승의 문(文)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관찰하며,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자연의 물건에게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八卦)를 만들었 [주역의 계사하 2장], 그것으로써 역법으로 정한 도형을 드러내었다. 신농씨(의 시대)에 이르러 결승(매듭)으로 다스리고 그 일들을 통솔하였다. 많은 일들이 매우 번잡해지며 가식과 거짓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관 창힐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나뉘어진 무늬가 서로 구별되어질 수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백관이 그것으로 다스리고 만물이 그것으로 살펴졌다. 대체로 쾌(夬)의 괘에서 그것을 취하였는데, "쾌夬는 왕의 조정에서 펼친다" 하니 문자란 왕의 조정에서 가르침을 펼치고 교화를 밝히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것으로 아랫사람에게 복을 베풀고, 덕을 쌓으니 곧 경계할 바를 알게 된다. 창힐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대체로 유형(종류)에 의거하여 형태를 본떴으니 그러므로 이를 文이라 하고, 그 뒤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더해지니(결합하니) 이를 곧 字라 한다. 문文이란 사물의 본래 모습이고, 자字란 말이 파생되어 차츰 많아진 것이다. 죽간이나 비단에 쓴 것을 서著라 하는데, 서著는 (사물의 모양과) 같다는 뜻이다. 오제, 삼왕의 시대에 이르러 서로 다른 모양으로 바뀌었다. 태산에 제단을 쌓은 것이 72대인데, (사용한 문자가) 같은 것이 없다. 주례에 여덟 살에 소학에 들어가는데, 保씨가 제후의 자제들을 가르치매 먼저 육서六書로 한다.
참조 9: 설문해자-설문해자 서문


*녹도문鹿圖文: 환웅 천황의 명을 받아 신지 혁덕이 만든 녹도문이 문자의 기원이다. 이것을 복희씨, 창힐 등이 서토西土에 보급시켜 훗날 상나라 갑골문甲骨文의 뿌리가 되었다. 녹도문의 원형은 고조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평양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16년에 평양 법수교 밑에서 발굴된 세 조각의 석비 속에서 문자가 나왔다고 하며, 백두용이 펴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고조선 신지神誌 전자篆字로 소개된 바 있다. 또한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와 요령성 여대시 윤가혼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에도 녹도문鹿圖文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은 현재 중국 섬서성 백수현에 남아 있는 창성조적서비創聖鳥跡書碑에 새겨진 창힐 문자와 일치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문자를 창안한 종주임을 입증하는 실례이다.

*일본신대문자를 두고 존재설과 조작설이 팽팽하다. 존재설을 주장하는 쪽은, 신대에 거북점이 존재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인용하며 신대에 점을 치는 데 문자가 사용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조작설은 일본 내에서 에도 시대부터 이미 나타났다. 조작설을 주장한 사람들로는 貝原益軒, 太宰春台, 賀茂眞淵, 本居宣長, 藤原貞幹 등이 있다. 국내 학자중에서는 "에도 말기국학자인 히라다아쯔다네가 수백년간 내려온 무가정치를 못마땅히 여기고 일본국민들에게 고전의 신비를 불어넣기 위한 수단으로 위작한 것이다"라고 하여 위작임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송호수 교수는 가림토아히루문자와의 유사성을 들어서 가림토가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고 신대문자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왕차중王次仲: 중국 후한의 장제(章帝, 재위 75~86) 때의 서예가. 남조南朝 유송劉宋의 서예가 왕음王愔은 "차중次仲이 비로소 파세波勢를 띠어 건초建初 연간에 예초隸草로 해법楷法을 이루었으니 자방字方 팔분으로 말하기를 모범이라”라고 하였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참조). 또 진晉의 위항衛恒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차중을 상곡上谷 사람이라 하였다.

*창힐倉頡: 역대신선통감에는 창힐이 진창陳倉 사람으로, 태호복희의 신하가 되어 거북 등과 새 발자국을 보고 여섯 가지의 글자체[六書]를 만든 인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그보다 약 700년 후에 치우천황의 제후로서 배달국 신지문자를 중원에 전파시킨 인물이라 밝히고 있다. 창힐의 고향인 섬서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조적서비에는 배달국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와 동일한 문자가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창힐의 무덤은 하남성 남락현南樂縣에 보존되어 있다. 

창힐의 창성조적서비

*가림토: 가림토는 한글의 원형이며 모태 글자이다. 세종실록 103권 갑자년 2월 경자일 기록을 보면 "언문은 다 옛 글자에 근본한 것이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하였고, "언문은 전조前朝부터 있었던 것을 빌어 쓴 것이다[借使諺文自前朝有之]" 라고 하여, 이미 전 시대에 한글의 모체가 되는 문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글의 위대성은 그 창제 원리가 신교의 우주 사상인 천·지·인 삼재三才 원리와 철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천지만물의 구성 원리인 음양오행은 인간의 언어에도 내재해 있다. 한민족은 이것을 가장 깊이 깨달은 위대한 민족이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훈민정음에 삼극三極(천·지·인 삼재)의 뜻이기理氣(음양)의 묘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훈민정음은 역易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으며, 삼라만상의 소리를 다 표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문자로서 대자연의 법칙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윤덕중·반재원의 훈민정음 기원론). 이성구 교수도 한글 자음子音에는 주역의 오행, 삼재三才 원리를 적용하였고, 모음母音은 천지 개벽론과 팔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고준환은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뜻하는 말로 같은 의미인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는 표현이 있다.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를, 이맥은 ‘가림다’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 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고준환의 신명나는 한국사 68쪽)

*왕문王文: 2,900년 전 31세 등올단군 때 사람. 이두법의 창시자. 이두는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서 우리말식으로 적던 문자이다. 일반적으로 이두법은 신라 말의 정치가요 대학자인 설총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보다 약 1,600년이 앞선 (BCE 865) 단군조선 때에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설총은 왕문이 창안한 이두를 더욱 발전·체계화시켰다. 568년(진흥왕 29) 북한산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문에도 이두가 나오는데, 이것은 설총 이전에 이미 이두문이 쓰였다는 증거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부여 사람 왕문王文이 쓴 서법은 부符나 전서篆書와 비슷하다. ,,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유래한 한문漢文 왕문王文이 남긴 법이다. ,,, 부여 사람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서篆書가 복잡하다 하여 그 획수를 약간 줄여 새로 부예符藉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避이 사신으로 숙신에 왔다가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서 필법을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체이다.,, 진晉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 이제 그 글자의 내력을 고찰해 보면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도전

허대웅은 명도전에 새겨져 있는 각종 고문자는 한자로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라는 점에서 그것이 고조선 문자라 제기하고 있다(허대웅 고조선문자), 그런데 이 명도전보다 앞서 나온 첨수도尖首刀라는 도폐가 있다 머리가 뾰족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최소 2,500년 전의 춘추 시기 화폐로 추정된다. 이 첨수도를 연구하고 있는 이찬구는 “첨수도에 새겨진 문자 중에는 완전한 모양의 한글이 발견되고 있다” 라고 한다(2012.2.8 이찬구 대담).


수메르 문명의 실상은 19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설형문자로 쓴 점토판, 돌과 청동으로 만든 여러 가지 조각상, 원통형 인장 등이 발굴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70 년대에 프랑스 탐사대가 라가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였고 1880 년대부터는 미국 고고학자들이 니푸르에서 수만 점의 점토판을 발굴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암흑 속에 묻혀 있던 수메르 문명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설형문자의 발전과정: 상형문자에서 차츰 설형문자로 발전하는 과정

수메르인은 BCE 3200년경에 이미 문자를 사용했다. 초기의 문자는 그림문자(상형문자)였으나, 서서히 진화하여 BCE 3100년경 기호와 부호가 음가音價를 가진 문자가 되었다. 그 문자가 바로 수메르의 설형문자(쐐기문자)이다. 그 지역에서 많이나던 갈대의 뾰족한 끝으로 젖은 점토판에 쐐기 모양의 자국을 내어 다양한 글자를 만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설형문자 점토판은 역사상 최초의 '공식 기록 문서'가 되었다. 

신을 의미하는 딘기르(딩기, Dinger)의 쐐기꼴이 시대에 따라 변한 모습.

처음 5백 년 동안은 수메르의 문자가 곡물의 양, 가축의 수를 계산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초기에 문자가 표현하는 개념이 단순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수메르인의 문자는 명사를 수식하는 동사와 형용사까지 갖춘 서술적 글쓰기가 가능할 정도로 섬세해져 결국 600여 개의 설형문자 기호가 만들어졌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많은 문명이 수메르의 문자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고유 언어에 적용하였다. 수메르 문자를 택한 아카드어는 고대 세계의 국제어가 되었다. 반면에 보기에는 더 아름답지만 필기가 성가신 그림문자를 사용한 이집트어는 끝내 국제어가 되지 못하였다. 아카드어는 그 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계속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문자와 그리스 문자를 거쳐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설형문자로 기록을 남긴 수메르인의 말은 우리말과 똑같이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 다음에 조사(토씨)가 붙는 언어, 즉 교착어이다. 놀랍게도 지구상 언어 가운데 교착어는 한국어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알타이어뿐이다. 수메르어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메르 말의 어순이 우리말과 거의 같고 단어 자체가 같은 것이 100가지나 된다고 한다.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두드러진 유사성은 두 집단의 공통된 뿌리를 암시한다.

참조 10: 환단고기 해제-수메르문명의 특징

동방에서 온 수메르인들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계속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지금의 터커), 시리아,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문명 수메르보다 대략 500년 후에 번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집트의 건축, 기술, 문자 둥은 모두 수메르 문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원기둥 모양으로 된 인장, 이집트의 건축술 가운데 받침대를 받치는 것 등은 수메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집트의 문자도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변형한 또 다른 설형문자였다.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후 수메르 문명은 다시 크레타 섬으로 전파되었다. 크레타 섬에서 유럽의 최초 문명인 미노아 문명(BCE 2700~BCE 1420)이 탄생하였고, 이 문명은 다시 그리스 문명으로 계승되었다. 때문에 수메르 문명 '서양 문명 의 모체’ 또는 '서양 문명의 창시자'라 부른다. 

수메르문명은 동쪽으로 인도까지 전파되었다. 지금의 이란 북쪽 국경 너머의 카프카스 산맥에 살면서 인도-유럽어를 쓰던 한 종족 BCE 2000년경에 남쪽으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메르의 도시국가에서 멀리 떨어져 북쪽에 살았지만, 당시 가장 부흥했던 수메르 문명과 무관하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하한 때는 수메르 왕조 말기이다. 수메르의 혼란한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도록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내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한 그들을 당시 인더스 사람들은 '아리안Aryan'이라 불렀다. 

아리안은 고귀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왜 그들이 고귀한 사람들이라 불렸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아리안족은 BCE 1500년경에 베다(브라만교와 힌두교의 경전) 이야기를 인도에 구전으로 전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히브리(유대) 문명도 수메르 문명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유대인의 역사가 기록된 구약전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 갈데아 우르(이라크남부)에 살던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거대 도시국가에 살던 전형적인 수메르인이었다. 

수메르 문명은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있는 이슬람 문화(페르시아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이란의 아라타Aratta란 도시는 수메르와 똑 같은 정치적 조직과 종교적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란의 고대 종족인 엘람은 수메르의 마지막 왕조인 우르 제3왕조를 무너뜨린 침입자이지만, 엘람의 법률, 문학, 종교 등은 모두 수메르의 것이었다. 그리고 엘람족의 신 이름은 수메르 신들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메르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유대 문명, 이슬람 문명의 근원이 되었고, 인도의 인더스 문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한마디로 수메르 문명은 오늘날 서양문명의 요람인 것이다. 

수메르가 서양 문명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양에서 수메르인이 최초로 사용 바퀴와 수레이다. 수메르인은 한 번에 많은 흙이나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네 바퀴 달린 수레를 발명하였는데, 덕분에 로마 군인은 마차를 타고 유럽을 평정할 수 있었다. 서양의 천문학도 수메르에서 유래하였다. 수메르인들은 춘분과 추분을 따지고 달의 운행 법칙을 발견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황소자리, 사자자리 등 별자리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수메르인이 최초로 시작하였고, 점성술도 이미 이때 성행하였다. 서양의 건축과 음악도 그 원형이 전부 수메르에셔 나왔다. 서양 문명의 요소들 중에서 수메 르에 뿌리를두지 않은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참조 11: 환단고기 해제-수메르에서 뻗어나간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