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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

삼한관경 번한세가7-왕문의 이두법

by 광명인 2024. 2. 15.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2. 삼한 전역에서 시행된 왕문의 이두법
[이두법의 창시자 왕문]

누사婁沙가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1468, BCE 866)년에 아들 이벌伊伐 (44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신(단기 1469, BCE 865)년에 한수漢水(지금의 대릉하)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어 올리니 천왕(31세 등올단군)께서 기뻐하시고 삼한에 명하여 시행하게 하셨다.

[주나라 격퇴와 흉노의 조공]

기미(단기 1492, BCE 842)년상장上將 고력합高力合을 보내어 회군淮軍과 합세하여 주周나라를 격퇴하였다. 이벌이 세상을 뜨니 신유(단기 1494, BCE 840)년에 아들 아륵阿勒(45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인(단기 1499, BCE 835)년에 주나라의 이공二公(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아륵이 세상을 떠나고 기축(단기 1522, BCE 812)년에 아들 마휴麻休, 일명 마목麻沐 (46세 왕)가 즉위하였다. 마휴가 세상을 떠나자 병진(단기 1549. BCE 785)년에 아들 다두多斗 (47세 왕)가 즉위하였다. 다두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1582, BCE 752)년에 아들 내이奈伊(48세 왕)가 즉위하였다. 내이가 세상을 떠나자 기미(단기 1612, BCE 722)년에 아들 차음次音(49세 왕)이 즉위하였다. 차음이 세상을 떠나자 기사(단기 1622, BCE 712)년에 아들 불리不理(50세 왕)가 즉위하였다. 불리가 세상을 떠나니 을사(단기 1658, BCE 676)년에 아들 여을餘乙 (51세 왕)이 즉위하였다. 여을이 세상을 떠나고 갑술(단기 1687, BCE 647)년엄루奄婁(52세 왕)가 즉위하였다. 무인(단기 1691, BCE 643)년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감위甘尉(5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감위가 세상을 뜨자 무신(단기 1721, BCE 613)년에 아들 술리述理(54세 왕)가 즉위하였다. 술리가 세상을 떠나자 무오(단기 1731, BCE 603)년에 아들 아갑阿甲(55세 왕)이 즉위하였다.
경오(단기 1743, BCE 591)년천왕(37세 마물단군)께서 사신 고유선高維先을 보내어 환웅천황 · 치우천황 · 단군왕검 세 분 성조의 상像을 반포하여 관가에서 받들게 하셨다.

2. 三韓 全域에서 施行된 王文의 吏讀法
吏讀法의 創始者 王文

婁沙가 薨하니 乙未에 子伊伐이 立하니라
丙申에 漢水人王文이 作吏讀法하야 以獻한대 天王이 嘉之하사 命三韓하사 如勅施行케 하시니라.

周 擊退와 匈奴의 朝貢
己未에 遣上將高力合하사 與淮軍으로 敗周하니라.
伊伐이 薨하니 辛酉에 子阿勒이 立하니라 丙寅에 周二公이 遣使하야 獻方物하니라.
阿勒이 薨하니 己丑에 子麻休一云麻沐이 立하니라
薨하니 丙辰에 子多斗가 立하니라 
薨하니 己丑에 子奈伊가 立하니라 
薨하니 己未에 子次音이 立하니라 
薨하니 己巳에 子不理가 立하니라 
薨하니 乙巳에 子餘乙이 立하니라 
薨하니 甲戌에 奄婁가 立하니라 
戊寅에 匈奴가 遣使番韓하야 求見天王하고 稱臣貢物而去하니라.
奄婁가 薨하니 子甘尉가 立하니라 
薨하니 戊申에 子述理가 立하니라
薨하니 戊子에 子阿甲이 立하니라
庚午에 天王이 遣使高維先하사 頒桓雄蚩尤檀君王儉三祖之像하사 以奉官家하시니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한수漢水: 지금의 대릉하다(이유립, 「대배달민족 사).

*왕문王文: 2,900년 전 31세 등올단군 때 사람. 이두법의 창시자. 이두는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서 우리말식으로 적던 문자이다. 일반적으로 이두법은 신라 말의 정치가요 대학자인 설총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보다 약 1,600년이 앞선 (BCE 865) 단군조선 때에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설총은 왕문이 창안한 이두를 더욱 발전·체계화시켰다. 568년(진흥왕 29) 북한산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문에도 이두가 나오
는데, 이것은 설총 이전에 이미 이두문이 쓰였다는 증거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부여 사람 왕문王文이 쓴 서법은 부符나 전서篆書와 비슷하다. ,,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유래한 한문漢文왕문王文이 남긴 법이다. ,,, 부여 사람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서篆書가 복잡하다 하여 그 획수를 약간 줄여 새로 부예符藉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避이 사신으로 숙신에 왔다가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서 필법을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체이다.,, 진晉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 이제 그 글자의 내력을 고찰해 보면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군淮軍:
지금의 중국 회수 일대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특히 이 지역은 단군조선의 분조가 있던 지역 중에서도 핵심 요충지로서, 주 나라에 대항한 대표적인 세력의 하나였다.


[한자漢字의 시대적 변천]

  (1) 갑골문자(甲骨文字): 
기원전 15세기 경, 거북의 등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예리한 칼로 새긴 글자를 말하며 중국 하남성(河南省) 소둔촌(小屯村)의 은허(殷墟), 은(殷)나라의 수도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나라 역대 제왕들의 이름과 점괘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상형문자의 단계를 넘어 육서(六書)의 원리를 갖추고 있어 한자로서 손색이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2) 금석문(金石文): 
기원전 11세기 경, 주(周)나라에서 주로 돌이나 비석, 종, 그릇 등에 문자를 새길때 쓰던 글씨체이며, 금문(金文)이라고도 한다.

1.대전(大篆): 기원전 9세기 경, 은(殷)나라의 갑골문이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크게 바뀌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대전이라고 하며, 주나라 선왕(宣王)이 당시 태사(太史)인 사주에게 명하여 만든 글씨체이다. 일반적으로 소전(小篆)이전의 글자와 글씨체를 통털어 부르는 명칭이다.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하여 조형미가 있다. 주문(周文)이라고도 부른다. 

2. 소전(小篆): 기원전 3세기 경,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서로 다른 글씨체를 사용하였으나,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승상인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만든 글씨체이다. 대전을 가다듬어서 둥글게 굴려서 만들었는데, 대전에 비해서 정제된 글씨체이다. 전문(篆文)이라고도 부른다.

3. 예서(隸書): 전국시대부터 진(秦에)나라의 통일기에 걸쳐 전서(篆書)의 번잡한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글씨체인데, 당시 옥리(獄吏)였던 정막(程邈)이 대전을 변화시켜서 만들었다고 하며, 예서란 죄인이나 노예들도 사용기에 편리한 글자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며, 가로획을 중심으로하여 매우 장식적인 글씨체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쓰던 한자를 정서(正書)라 하고 새로 등장한 한자를 정서에 속했다 하여 예서(隸書)로 칭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일설에 예서는 부여(夫餘)의 왕문(王文)이 만들었으며, 정막(程邈)이 사신으로 왔다가 이를 얻어 갔다고도 하며, 여기에서 예(隸)란 노예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풍류도를 익히는 낭도의 무리를 말한다고 한다.

4. 해서(楷書): 후한(後漢)의 왕차중(王次中)이 예서를 다듬어서 만든 것으로 예서체보다 단정하고 필법이 법도가 있어 이를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체의 표준이 되는 글씨체이다. 일설에 왕차중이 부여인 왕문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5. 행서(行書): 후한(後漢)때에 유덕승(劉德昇)이 만든 것으로 해서체를 약간 흘려서 모나지 않게 부드럽게 쓴 반 흘림의 글씨체를 말한다.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6. 초서(草書): 행서를 더욱 간략화하여, 이를 편리하고 빨리 쓸수 있도록 글씨의 짜임새와 필획을 단순화 시킨 글씨체로써 곡선위주의 흘림체이다. 초서 역시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에 의해서 극치를 이루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고서들이 초서체로 작성되었다. 후한(後漢)의 두탁(杜度)을 초서의 창안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글이나 영어의 필기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7. 간체자(簡體字): 중국은 1956년 문맹(文盲) 퇴치를 목적으로 문자개혁위원회(文字改革委員會)를 만들어, 기존 한자 2,235자의 형태와 획수를 간략하게 만들어 간체자라 하고 인민들로 하여금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 중국에서는 모두 간체자를 쓰고 있으며, 그 전에 쓰던 한자를 번체자(繁體字)라고 불러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간체자는 실용성만을 추구하여 만들었으므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간체자를 사용하므로서 수천년의 전통과 고전문화의 단절이 발생하여 또 다른 문맹자를 양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자는 원래 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 글자에 뜻이 담겨있는데, 간체자는 뜻 글자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는 기존의 한자를 고수하고 있으며, 현재 중국에서도 간체자를 폐지하고 번체자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한자는 누가 만들었을까 / 갑골문, 금문, 소전,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