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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소도경전본훈

7. 문자의 기원과 그 자취

by 광명인 2023. 9. 21.

남해 상주리 석각(사진출처:문화재청)

7. 문자의 기원과 그 자취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날부터 있었으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 암벽에 신시 시대의 옛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쓴 서법은 부符 전서篆書와 비슷하다.
자부 선생의 '삼황내문'
부루태자의 오행은 모두 환단桓檀 시대에 나온 것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유래한 한문漢文은 왕문이 남긴 법이다. 

유기留記(진역유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령한 글자 획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ㄱ 자와 같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신지 선인이 전한 것이라 한다. 혹자는 이것을 문자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 획이 곧게 나가서 굽은 형으로, 관제管制(거느리어 다스림)하는 뜻이 있으며,
그 형태와 소리는 어떤 의도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인神人의 덕으로 이 세상을 구하고자 법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니, 즉 신교의 참된 가르침이 행해짐에 반드시 인사人事도 모두 바르게 되었을 것이다.
현자와 유능한 자가 벼슬자리에 있고,
노인과 어린이를 공동으로 부양하고,
장정이 의무를 다하고,
많이 가진 자가 베풀어 주고,
간사한 자가 송사를 그치고,
전쟁 도모를 막으니,
이것이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교화하는 한결같은 도리였던 것이다.

대변설주大辯說註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 시대의 옛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글에 환웅께서 사냥을 나가서 삼신께 제사를 올리셨다고 하였다.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득한 태고 시절에는 옛 일들이 에만 의지해 전해 오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형태를 본떠서 그림을 그리고 다시 그림이 변해 글자가 되었으니, 문자가 생긴 근원은 나라의 풍속을 높이 받들고 믿은 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7. 文字의 起源과 그 자취

我國文字가 自古有之하니 今南海縣郎河里岩壁에 有神市古刻하고 
夫餘人王文所害之法에 類符凝篆하고 紫府先生之内文과 太子扶妻之五行이
皆出松桓檀之世오 而殷學漢文이 盖王文遺範也라. 
留記에 云「神劃이 會在太白山青岩之壁하야 其形如 ㄱ 하니
世稱神誌仙人所傅也라 或者가 以是로 爲造字之始하니
則其劃이 直一曲二之形이오 其義는 有管制之象이오 其形其聲은 又似出於計意然者也라.
故로 以神人之德으로 爱求人世以準焉이니 則眞敎之行也에 必人事皆正也라
賢能在位하며 老幼公養하며 壯者服義하며 多者權化하며 
姦詐息訟하며 干戈閉謀하니 是亦理化之一道也니라. 

大辯說註에 曰
南海縣郎河里之溪谷岩上에 有神市古刻하니 其文에 曰桓雄出獵하사 致祭三神하시니라」
又曰「大始傳古가 只憑口舌이라가 久而後에 乃形以爲하고 又復畵變而爲之라 하니
蓋文字之源이 莫非出於國俗之所尊信也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낭하리: 지금의 행정 구역명은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良阿里이다. 

옛 글자: 신지씨가 발명한 소위 태고문자太古文字는 녹도서로 고조선 때까지 사용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각주 참조.

상주 신시고각_경남기념물 제 6호. 이 신시 고각을 서불과차徐市過此에 빗대어 해석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대변설大辯說: 세조실록 권7, 세조 3년 5월 무자戊子조에 따르면 대변설大辯說은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거두어들이도록한 20여 종의 비기秘記, 참서讒書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조선 시대까지도 이 책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