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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과 힘

중화에 문자를 전파한 창힐

by 광명인 2024. 2. 16.

창힐(倉頡), 중국인들이 한자를 창제했다고 전하며, 황제의 사관을 지냈다고 알려진 고대의 인물

중국 고문서에 문자 발명의 주인공은 창힐로 나온다. 다만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는 <사기(史記)>에는 창힐에 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순자>(해폐), <여씨춘추>(군수), <설문해자>, <한 비자>(오두) 등에 단편적으로 보이는데 하나같이 그가 글을 좋아하여 문자를 발명 내지 창조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환단고기>(삼성기하) 창힐치우천황의 제후로 신시 배달국으로부터 부도지문符圖之文(부符 같고 그림 같은 모습을 한 글자)을 배워갔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사마천이 사기의 오제본기에 소전씨의 후손인 황제 헌원을 동방의 천자 치우천황을 죽인 중화의 시조로 날조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래는 왜곡된 역사 내용을 수정하지 않은 창힐에 대해 알려진 일반적인 견해들이다.

[한자 기원에 관한 설들]

한자를 창조했다는 창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순자>의 여러 편들 중에서 '가려진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뜻의 「해폐(解敵)」편에는 “본래 글을 좋아 했던 사람은 많은데 창힐의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가 글씨에 한결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 보인다. <여씨춘추>에는 그가 글자를 만들었다고 나오고, <설문해자>에는 황제(黃帝)의 사관으로 글자를 발명했다고 되어 있다. 또 새의 발자국을 보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초기 문자가 상형문자일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창힐은 글자를 만든 성인인 ‘서성(書聖)' 또는 '사문비조(斯文鼻祖)' 등으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오늘날 역사 학자들도 문자의 출현을 창힐과 연계시키는 일반적이다.

당시 역법 제정 등에는 문자 기록이 필요했고, 신탁 따위도 문자를 필요로 했다. 어떤 학자는 창힐이 처했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26세기 무렵(참고, 치우천황시기 BCE 2707~ BCE 2598)이고 전욱 부락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노신문자를 만든 사람이 창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이 만든 것을 사관이 채집하여 덧붙여 사건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했다.(문외문담門外文談) 다시 말해 한자는 창힐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창힐 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차츰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창힐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큰 작용을 했을 뿐이다.

[창힐의 문자 발명]

창힐은 성을 후강(侯剛)이라 했고 사황씨(史皇氏)로 불리기도 했다. 황제 때 사관을 지내면서(참고, 환단고기는 창힐이 치우천황의 제후로 황제를 돕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자를 창시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으로 추앙받았다. 지금의 하남성 남락현 서북쪽에 있는 오촌에는 창힐의 무덤과 사당 그리고 문자를 만들었다는 장소 등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창힐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죽었다고 본다.

창힐의 사당, 창힐은 서토에 문자를 보급했으므로 서토인들에게는 문자를 전해준 父祖격이다.

전해오기로 창힐은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을 대신했다고 한다. 문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결승, 즉 노끈을 매듭지어 특정한 일을 나타냈다. 큰일이면 매듭을 크게, 작은 일이면 매듭을 작게 짓는 식으로 나타냈다. 그 뒤 칼로 나무나 대나무에 부호 따위를 새겨 일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사 발전에 따라 문명도 진보하고 인간사도 복잡해졌다. 사물의 명칭도 번거로워졌다. 따라서 매듭을 짓거나 부호를 새기는 방법으로는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문자 발명의 필요성이 나타 났다.

황제 때(참고, 치우천황 때)는 여러 가지 발명품들이 나타난 시기였다. 양잠을 비롯하여 배, 수레, 활, 거울, 솥, 시루 등이 발명되었다. (참고, 치우천황 때는 실질적으로 많은 구리와 쇠를 캐어 각종 병장기를 만드는 등, 여러가지 물품들이 발명되었던 시기이다. 황제 헌원도 지남거를 만들어 치우천황의 군대에 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발명품들에 영향을 받아 창힐도 문자를 발명한 것 같다

창힐은 눈이 네 개에 눈동자가 두 개씩이어서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창힐이 남방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양허(陽虛)의 산(지금의 섬서성 낙남현으로 추정)에 올라 강을 내려다 보다가 문득 등에 푸른색 문양이 선명한 큰 거북을 보게 되었다. 이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은 창힐은 거북을 가져다 꼼꼼하게 연구했다. 보고 또 본 끝에 창힐은 거북 등의 문양이 어떤 뜻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문양이 어떤 의미를 나타낸다면 그에 따른 규칙을 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창힐은 밤낮으로 생각에 빠졌다.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관찰했다. 하늘의 별자리 분포와 산천대지의 모양은 물론 새, 짐승, 벌레의 흔적과 초목의 형상을 관찰하고는 그것을 그린 다음 다시 서로 다른 부호로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부호마다에 그것이 나타내는 뜻을 부여했다. 창힐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이 부호를 '자(字)'라 불렀다. (참고, 이 부분은 신지혁덕이 녹도문을 만들때 고민했던 내용과 그 서사가 흡사하다)

그런데 창힐이 글자 발명에 성공한 날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대낮에 갑자기 밤송이만한 비가 내리더니 밤에는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왜 낮에 느닷없이 비가 내렸을까?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 이를 이용하여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축하의 뜻으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밤에 귀신이 왜 곡을 했을까? 혹자는 문자가 생김으로써 사람들의 지혜는 밝아졌지만 덕은 쇠하여 속이고 죽이는 일이 갈수록 많아져 천하가 더 이상 태평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에 귀신조차 불안해 통곡했다고 한다. 

이런 설도 있다. 한 번은 창힐이 매듭을 지어 사건을 기록한 것을 황제에게 제 때에 전하지 못해 염제와의 영역 담판에서 손해를 보았다. 이 일로 창힐은 관직을 버리고 천하를 떠돌며 사건을 기록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았다. 3년 뒤 고향 백수 양무촌으로 돌아온 창힐은 홀로 별자리와 자연계를 관찰하여 세상만물을 대표하는 각종 부호를 창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부호들을 ‘자'라 불렀다. 창힐의 글자는 만물의 형상에 따라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일(日)자는 태양의 붉은 원을 본뜬 것이며, 월(月)자는 달의 상현달 형상을 본 뜬 것이다. 


*소전少典: 배달국 8세 안부련환웅(BCE 3240~BCE 3167) 때 소전少典이 천황의 명을 받아 섬서성 강수姜水에 가서 군사를 감독하였는데, 그곳(지금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상양산尙羊山)에서 낳은 아들 중에 맏이가 석년石年(염제신농)이고 둘째가 욱勖(공손公孫씨의 조상)이다. 욱의 10세 손이 바로 중국 한족의 태조인 황제헌원이다. 신농씨는 강수姜水에서 살아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