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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삼성기

4. 배달의 전성기-삼성기 하

by 광명인 2024. 1. 13.

4. 배달의 전성기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14세 치우천황]

그 후 10세 갈고환웅 때는 염제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였다.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구리와 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銅頭鐵額]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九治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고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만드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분을 치우천황이라 불렀는데, 속언에 치우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의 신하였던 한족의 시조 헌원]

치우천황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지켜보시고 드디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여러번 서쪽에서 천자의 군사[天兵]를 일으키셨다. 삭도索度에서 군사를 진격시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을 점령하시고 헌후索度(헌원)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탁록涿鹿의 광야로 진격하여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이후 오장군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셨다.

이때 천하의 형세는 세 세력이 세발솥의 솥발과 같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록涿鹿의 북쪽에 대요大撓동쪽에 창힐倉頡서쪽에 헌원軒轅이 자리잡고 무력으로 승패를 겨루었으나 서로 이기지 못했다.
당초에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으므로 싸울 때마다 불리하였다. 이에 대요大撓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다시 창힐倉頡에게 의지하려 하였으나 여기서도 역시 도움을 얻지 못했으니, 이들 두 나라는 모두 치우천황을 추종하는 세력이 었다.
대요大撓는 일찍이 배달로부터 육십갑자의 '간지干支의 술법'을 배웠고, 창힐倉頡은 '부符 같고 그림 같은 모습을 한 글자, 즉 부도지문符圖之文을 전수받았다. 이때 모든 제후는 치우천황의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 또한 배달로부터 문물을 배워갔기 때문이다.

[史記에서 왜곡된 치우천황]

사마천의 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하의 제후가 모두 황제헌원에게 와서 복종하였으나, 치우가 가장 강포하여 천하에서 능히 그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원문: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為暴, 莫能伐) 헌원이 섭정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명으로,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머리가 구리같이 단단하고 이마는 철같이 강하였으며 모래를 먹었다. 오구장五丘杖과 칼[刀]과 가지가 있는 창[載]과,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쏘는 태노太弩를 만들어 천하에 그 위세를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호칭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

4. 倍達의 全城期


靑銅器 文化를 꽃피운 十四世 蚩尤天皇

後에 有葛古桓雄이 與炎農之國으로 劃定疆界하시며 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이시니 
神勇冠絶하사 以銅頭鐵額으로 能作大霧하시며 造九治而採鑛하사 鑄鐵作兵하시니
天下大畏之하야 世號爲蚩尤天王이라하니 蚩尤俗言에 雷雨大作하야 山河改換之義也라.

蚩尤天王의 臣下였던 漢族의 始祖 軒轅
蚩尤天王이 見炎農之衰하시고 邏抱雄圜하사 展起天兵於西하시고
又自索度로 進兵하사 據有淮岱之間하시고 及軒候之立也에 直赴涿鹿之野하사 擒軒轅而臣之하시고
後에 遣吳將軍하사 西撃高辛하사 有功케하시니라.  
時에 天下鼎峙하야 涿之北에有大撓하고 東有倉頡하고 西有軒轅하야 自相以兵으로 欲專其勝而未也러라
初에憲轅이 稍後起於蚩尤하니 每戰不利하야 欲依大撓而未得하고叉依倉頡而不得하니 二國은 皆蚩尤之徒也라
大撓는 嘗學干支之術하고 倉頡은 受符圖之文하니 當時諸侯가 罔不臣事者는 亦以此也라.

史記에서 歪曲 蚩尤天皇
司馬遷史記에 曰 諸侯咸來賓從이로대 而蚩尤가 最爲暴하야 天下莫能伐이라 한대
軒轅이 攝政에 蚩尤有兄弟八十一人하야 並獸身人語하며 銅頭鐵額하며 食沙하며
造五丘杖과 刀戟太弩하야 威振天下하니 蚩尤는 古天子之號也니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자오지환웅: 일명 치우천황. 백두산 신시에서 서방을 개척하여 ‘청구’ 로 도읍을 옮겼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시조로 받드는 황제헌원을 제후로 삼아다스린 분이다(태백일사의 신시본기)
 
구치九治: 광석을 캐어 주조하는 기계. 

치우: 지위智爲라고도 발음한다(이유립). 

뇌우雷雨: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는 비. 

염제신농의 나라: 염제신농의 8세 후손인 유망(BCE 2758~BCE 2688)이 다스리던 때를 말한다. 

삭도索度: 삭두索頭. 독사방여기요讀史方與紀要, 산동山東편에는 "삭두성은 산동성 임치현에서 동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여수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헌후: 헌원(BCE 2692~BCE 2593)을 말함. 성은 공손公孫, 호는 유웅有熊이다. 희수姬水에서 오래 살면서 성을 희姬로 고쳤다. 후대에 황제黃帝로 추존되었고, 중국 한족의 실질적인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탁록涿鹿: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최대 격전지.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으로 북경 서쪽에 있다.

고신高辛: 여기서 고신은 황제헌원의 증손인 제곡고신帝嚳高辛(BCE 2435~BCE 2365)이 아니라 지명으로 보아야한다.
 
대요大撓에게 의지: 여씨춘추의 맹하기에 “황제는 대요를 스승으로 삼았다[黃帝師大撓]”하였고, 그 주석에 “대요가 갑자를 만들었다[大撓作甲子]"라고 하여 헌원이 대요에게 의지하려했던 이유를 알려 주고 있다. 

치우천황에 대한 기록: 사기의 오제본기에 "軒轅之時,,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為暴,莫能伐" 여기서 치우가 가장 강포하여 누구도 벌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치우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는 뜻이다. 치우에 관한 기록은 이 밖에도 산해경, 관자, 술이기, 서경, 열자, 장자, 좌전, 여씨춘추, 전국책, 한비자, 포박자, 한서, 노사, 일주서, 논형, 국어 등 많은 서적에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