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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소도경전본훈

9. 한글의 원형 가림다와 후세의 자취

by 광명인 2023. 9. 24.

9. 한글의 원형 가림다와 후세의 자취

배달 신시 때에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천황 때에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 때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목算木은  (아래 참조)  이고,   전목個目은  (아래 참조)  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가륵단군(3세) 2년에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지어 가림다加臨多라 하였다.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이태백 전서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발해국에서 당나라에 글을 써서 보냈는데, 온 조정에 그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이 능히 이를 해석하여 답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헌강왕 12년 봄에, 북진北鎭에서 ‘대진국大第國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 편목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습니다'라고 아뢰고 편목을 왕께 갖다 바쳤다. 그 나무에 쓰여진 열다섯 글자의 내용은 곧 ‘보로국이 흑수국 사람과 함께 신라국과 화친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또 고려 광종 때는 장유張儒가 접반사接伴使로 명성이 났는데, 초기에 난을 피해 오吳 · 월越에 가 있었다. 월나라 사람 중에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우리 동국東國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거문고 밑에 새겨 역류하는 물결 위에 띄워 놓았다. 월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풀지 못하던 차에 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문장의 뜻을 물었다. 장유가 즉석에서 한시로 풀어 말하기를,
 
한송정 달 밝은 밤에 
물결 고요한 경포대의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것은 
가을의 마음 실어 나르는 
저 백사장의 갈매기 한 마리. 

라고 하였으니, 아마 거문고 밑에 새겼던 글은 옛날의 가림다 종류인 것 같다.

9.한글의 原形 加臨多와 後世의 자취

神市에 有算木하고 蚩尤는 有鬪佃目하고 夫餘에 有書算하니 其曰算木은 [ ] 也오. 其曰佃目은 [ ] 也라.
檀君世紀檀君嘉勒二年에 三郞乙普勒이 撰正音三十八字하니 是謂加臨多라.
其文에 曰 李太白全書玉塵叢談에 云 「渤海國이 有書於唐하니 擧朝無解之者라 李太白이 能解而答之라」하고
三國史記에 云「憲康王十二年春에 北鎭이 奏호대 狄國人이 入鎭하야 以片木掛樹而去라 遂取以獻하니
其木書十五字에 云호대 寶露國이 與黑水國人으로共向新羅國和通이라」

且高麗光宗時에 張儒가 接伴使로 著閒이라 初에 避亂하야 到吳越이러니 
越氏에 有好事者가 刻東國寒松亭曲於琴底하고 漂逆波하니 越不得解其사한대
張儒가 卽席에 以漢詩로 解之하니 日月寒松夜 波晏鏡浦秋라
哀鳴來又去는 有信一沙鷗라 하니 盖琴底所刻文이 疑古加臨多之類也니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훈민정음 해례본에 표현된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가림다加臨多: 가림다는 한글의 원형이며 모태 글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이미 3,600여 년 전 3세 가륵단군 때 만든 가림다를 원형으로 하여 발전시킨 것이 훈민정음이다. 이찬구는, "단군세기에는 가림토加臨土라 했는데, 토土는 토착土着이라는 말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있다"라고 하였다. 고준환은 "원형 한글에 대하여 같은 의미로 가림토와 가림다라는 표현이 있다.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를, 이맥은 '가림다'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 다(따, 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고준환, 신명나는 한국사 68쪽) 

발해(대진국)의 문자는 청나라 때 김육불이 지은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권 20에도 20여 자가 소개되었는데, 전자篆字도 예자隸字도 아닌 독특한 문자이다. 심지어 한자를 꺼꾸로 적은 반자反字도 보인다.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 관직. 

한송정곡寒松亭曲: 작자 미상의 고려 초기 가요. 고려사, 악지, 속악俗樂조에 오언절구의 한역 시와 그 내력이 수록되어 있으나, 작가와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사 악지에는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노래는 거문고 밑바닥에 써서 둔 것이 중국 강남까지 흐르고 흘러갔는데, 강남 사람들이 그 가사를 해석하지 못한 채 있었다. 광종때 고려 사람 장진공張晉公[장유張儒]이 사신이 되어 강남에 가니, 강남사람들이 장진공에게 물었으므로 그가 한시로써 해석하여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 시가는 원본이 전하지 않고 한역된 것이 전한다. 거문고 밑바닥에 씌어진 노랫말을 중국인들이 해석하지 못하고 고려 사람 장진공이 하였다는 것은「한송정곡」이 향찰로 씌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디지털강릉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