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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10

규원사화 원문 및 번역본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 2024. 12. 21.
규원사화 만설-1 [만설은 북애자 개인의 철학적 사유를 풀어놓은 글이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삶에 관한 상당히 깊고 다양한 철학적 질문들과 이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기술한 글인데, 매우 깊이 있는 질문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감히 망령되게 단언하지는 못하나,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이 세상을 주재하며, 진실을 북돋우고 선을 기르며 흉악함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서 만물을 통솔하고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일 것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리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며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힘써 일하면서 함부로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곧 착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품성을 보존하고 뜻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함에 태.. 2024. 12. 16.
규원사화 단군기-5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신(환기 5913, 신시개천 2613, 단기 1049, BCE 1285)년이다. 색불루 단군은 송화강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후기조선 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체제로 바꾸게 된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여전히 병권은 진조선만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색불루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는데,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의 종류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그리고 우화충의 난으로 43세 물리단군이 붕어한 후 44세 단군으로 추대된 구물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진(환기 6773, 신시개천 3473, 단기 1909, BCE 425)년이다.. 2024. 12. 14.
규원사화 단군기-4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다.  신축년은 부루 임금의 원년이다. 부왕의 뜻을 이어 천하를 다스리니, 무릇 삼년만에 나라안으로 순행을 나가서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제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냄을 예전처럼 하게 하였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일으키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학문을 계도하여 널리 가르치니, 백성의 생활은 더욱 윤택하여지고 이를 기리는 소리는 천하.. 2024. 12. 13.
규원사화 단군기-3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강화도]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2024. 12. 12.
규원사화 단군기-2 [단군은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 가르침은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 2024. 12. 11.
규원사화 단군기-1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천제(天祭)는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환인으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지금의 유학자들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 2024. 12. 10.
규원사화 태시기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태시기는 배달국의 환웅천황, 신시씨와 주요 3대 성씨인 치우씨, 신지씨, 고시씨의 업적과 특히 치우천황의 업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교의 영향으로 중화주의 사관에 빠진 유학자들의 역사의식을 개탄하는 글들이 들어있다."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 2024. 12. 7.
규원사화 조판기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조판기는 수백만 년간의 우주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일월성신이 운행하며, 지상에 수화의 순환과 사시의 질서가 잡히고, 천상계에서 하늘의 최고신인 환인과 환웅천왕, 그리고 그들이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신령한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그들을 조화롭게 다스릴 사람들이 화생되어, 궁극적으로 환인의 명으로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와 무리 3천을 .. 2024. 12. 4.
북애자 규원사화 서문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에 관해 만담형식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북애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결국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어느 산골에서 천우신조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규원사화를 쓰게 된다. 최태영 박사는 "북애는 실로 주체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사관을 세운 선각자이다"라고 북애를 평했다. 규원사화 서문엔 잃어버린 동방의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그의 비애감이 녹아 있다.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한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나라에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 《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 2024.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