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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과 힘

설문해자[說文解字]

by 광명인 2023. 12. 27.

[문명의 발전은 문자의 발전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의 시원을 밝히는 일은 곧 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일과 연관될 것입니다. 그럼 동북아 문명의 기초를 제공한 한자漢字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떠한 이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창조되고 발전되어온 것일까요? 아래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서문은 문자와 한자의 기원을 밝히는 단초端初를 제공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근본이 바로 서고, 천하의 도리를 아는 이들은 몇 가지 단초만으로도 뿌리를 찾겠지만, 왜곡된 기존의 틀에 갇혀 뿌리와 근본을 잃은 어두운 자들에겐 어떠한 증거도 근원을 밝히기엔 부족해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蓋文字者개문자자, 經藝之本경예지본이요, 王政之始왕정지시이니,
前人所以垂後전인소이수후하고, 後人所以識古후인소이식고라.
故曰고왈,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이며, 知天下之至賾而不可亂也지천하지지색이불가난야라.
무릇 문자란 경서와 예술의 근본이며 왕이 정치를 하는 시작인 것이다. 전인이 문자로써 (문화를) 후대에 전하고, 후인도 문자로 고대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이 세워져야 길(도)이 열리며, 천하의 깊은 도리를 알면 혼란스럽지 않다”고 한 것이다. (설문해자서 중)

[說文解字序 설문해자서]

古者庖羲氏之王天下也,仰則觀象於天,俯則觀法於地,視鳥獸之文 與地之宜,近取諸身,遠取諸物;於是 始作《易》八卦,以垂憲象。及神農氏,結繩為治,而統其事。庶業其繁,飾偽萌生。黃帝史官倉頡,見鳥獸蹄迒之跡,知分理之可相別異也,初造。百工以乂,萬品以察,蓋取諸夬。「夬,揚於王庭」,言文者,宣教明化於王者朝庭,「君子所以施祿及下,居德則忌」也。

옛날 포희씨(包犧氏)가 천하(天下)에 왕노릇할 때에 우러러 하늘의 상(象)을 관찰하고 굽어 땅의 법(法)을 관찰하며, 새와 짐승의 문(文)천지(天地)의 마땅함을 관찰하며,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자연의 물건에게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八卦)를 만들었[주역의 계사하 2장], 그것으로써 역법으로 정한 도형을 드러내었다. 신농씨(의 시대)에 이르러 결승(매듭)으로 다스리고 그 일들을 통솔하였다. 많은 일들이 매우 번잡해지며 가식과 거짓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관 창힐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나뉘어진 무늬가 서로 구별되어질 수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백관이 그것으로 다스리고 만물이 그것으로 살펴졌다. 대체로 쾌(夬)의 괘에서 그것을 취하였는데, "쾌夬는 왕의 조정에서 펼친다" 하니 문자란 왕의 조정에서 가르침을 펼치고 교화를 밝히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것으로 아랫사람에게 복을 베풀고, 덕을 쌓으니 곧 경계할 바를 알게 된다.

* 환웅천황의 명을 받아 신지 혁덕이 만든 녹도문鹿圖文문자의 기원이다. 이것을 복희씨, 창힐 등이 서토西土에 보급시켜 훗날 상商나라갑골문의 뿌리가 되었다. 녹도문의 원형은 고조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평양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16년에 평양 법수교 밑에서 발굴된 세 조각의 석비石碑 속에서 문자가 나왔다고 하며, 백두용이 펴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束歷代名家筆譜'에 고조선 신지神誌 전자篆字로 소개된 바 있다. 또한 평양북도 용천군 신암리와 요령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에도 녹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은 현재 중국 섬서성 백수현에 남아 있는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에 새겨진 창힐 문자와 일치한다. 이것은 동이족이 문자를 창안한 종주임을 입증하는 실례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주석 참조) 

倉頡之初作書,蓋依類象形,故謂之文。其後形聲相益,即謂之字。文者,物象之本;字者,言孳乳而寖多也。著於竹帛謂之書。書者,如也。以迄五帝三王之世,改易殊體,封於泰山者七十有二代,靡有同焉。

창힐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대체로 유형(종류)에 의거하여 형태를 본떴으니 그러므로 이를 文이라 하고, 그 뒤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더해지니(결합하니) 이를 곧 字라 한다. 문文이란 사물의 본래 모습이고, 자字란 말이 파생되어 차츰 많아진 것이다. 죽간이나 비단에 쓴 것을 서著라 하는데, 서著는 (사물의 모양과) 같다는 뜻이다. 오제, 삼왕의 시대에 이르러 서로 다른 모양으로 바뀌었다. 태산에 제단을 쌓은 것이 72대인데, (사용한 문자가) 같은 것이 없다.

《周禮》:八歲入小學,保氏教國子,先以六書。一曰指事。指事者,視而可識,察而見意,「上、下」是也。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三曰形聲。形聲者,以事為名,取譬相成,「江、河」是也。四曰會意。會意者,比類合誼,以見指撝,「武、信」是也。五曰轉注。轉注者,建類一首,同意相受,「考、老」是也。六曰假借。假借者,本無其事,依聲託事,「令、長」是也。

주례에 여덟 살에 소학에 들어가는데, 保씨가 제후의 자제들을 가르치매 먼저 육서六書로 한다. 첫째가 지사이다. 지사指事란 보아서 알 수 있고 살펴서 볼 수 있는 것(뜻을 알 수 있는 것)으로 上·下가 그것이다. 둘째가 상형이다. 상형象形이란 그려서 그 사물을 이루는 것으로 형체를 따라 구불구불 하게 되며, 日·月이 그것이다. 셋째가 형성이다. 형성形聲이란 일로써 이름을 삼고(사물을 나타내는 글자로 의부를 삼고) 비유를 취하여 서로 이루는(음이 비슷한 글자로 성부를 삼아 조합한) 것으로 江·河가 그것이다. 넷째가 회의이다.  회의會意라는 것은 종류를 엮고 뜻을 합하며 그리하여 가리키는 바를 드러내는 것 으로 武·信이 그것이다. 다섯 째가 전주이다. 전주轉注란 종류를 세워 한 부수를 이루고 같은 뜻을 서로 받는 것(互訓할 수 있는 것)으로 考·老가 그것이다. 여섯 째가 가차이다. 가차假借란 본래 그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거하여(음이 같은 자를 빌어) 일(의미) 을 기탁하는 것으로 令·長이 그것이다.

及宣王太史籀,著大篆十五篇,與古文或異。至孔子書六經,左丘明述春秋傳,皆以古文,厥意可得而說也。

주나라 선왕 때에 이르러 태사 '주籀'가 대전십오편(사주편)을 지었는데, 고문과는 같기도 하고 다른 점도 있다. 공자가 육경을 편찬하고 좌구명이 춘추전을 지을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문 으로 하여 그 뜻을 설명할 수 있었다.

其後諸侯力政,不統於王。惡禮樂之害己,而皆去其典籍。分為七國,田疇異畝,車涂異軌,律令異法,衣冠異制,言語異聲,文字異形。秦始皇帝初兼天下,丞相李斯乃奏同之,罷其不與秦文合者。斯作《倉頡篇》。中車府令趙高作《爰歷篇》。大史令胡毋敬作《博學篇》。皆取《史籀》大篆,或頗省改,所謂小篆也。

그 뒤에 제후들이 힘써 정벌하며 왕에게 거느려지지 않았고, 예악禮樂이 자신들(이 패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그 전적을 폐기하였다. 7국으로 나뉘니 밭은 크기가 다르고, 차도는 너비가 다르며, 법률제도는 규정이 다르고, 의복은 양식이 다르고, 언어는 소리(발음)가 다르며, 문자는 모양이 달랐다. 진시황秦始皇이 처음(막) 천하를 겸병하자 승상 이사가 곧 그것(도량형, 문자 등)을 같게(통일)하고, 그 진나라 문자와 들어맞지 않는 것을 버리자고 상소했다. 이사는 창힐편을 지었고, 중거부령 조고는 원력편을 지었으며, 태사령 호무경은 박학편을 지었는데, 비록 '창힐'로 그 이름을 삼았으나, 모두 사주편의 대전을 취하여 어떤 것은 다소 덜어(간화)고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소전小篆이다.

是時,秦燒滅經書,滌除舊典。大發吏卒,興戍役。官獄職務繁,初有隸書,以趣約易,而古文由此絕矣。自爾秦書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四曰蟲書,五曰摹印,六曰署書,七曰殳書,八曰隸書。

이 때 진왕조는 경서를 불태워 없애고 옛 전적을 폐기하며 대량으로 사졸을 징발하여 노역이나 변방수비를 시켰으니, 관부와 감옥은 직무가 번잡하여 처음 예서가 생겼고, 그것으로써 간략히하는 경향이 생기니 그리하여 고문은 이로부터 끊겨버렸다. 이로부터 진의 문자에는 여덟가지 글자체가 있었으니첫째가 대전大篆이요, 둘째는 소전小篆이며, 셋째는 각부刻符, 넷째는 충서蟲書이고, 다섯째는 모인摹印, 여섯째는 서서署書, 일곱째는 수서殳書, 여덟째는 예서隸書이다.

漢興有草書。尉律:學僮十七以上始試。諷籀書九千字,乃得為史。又以八體試之。郡移太史並課。最者,以為尚書史。書或不正,輒舉劾之。今雖有尉律,不課,小學不修,莫達其說久矣。

한나라가 일어나니 초서草書가 생겨났다. 위율(관아 벼슬아치의 법률)에 규정하기를 학동이 17세 이상이 되면 시험에 응하기 시작하고, 구천자九千字를 암송하고, 읽고 이해하며, 써낼 수 있으면 곧 사관이 될 수 있으며, 또 진나라 때의 여덟 글자체로 그들을 시험한다고 한다. 군에서 태사를 바꿀 때 (위의 두 가지를) 함께 시험 보았는데, 우수한 자로 상서사尚書史를 삼았다. 글자가 혹 바르지 않으면, 매번 잡아다 죄를 물었다. 지금 비록 위율이 있으나 시험 보지 않는다. 소학(문자를 익히는 학문)을 익히지 않으니 그 문자의 이치에 통달한 자가 없은 지 오래 되었다.

孝宣皇帝時,召通《倉頡》讀者,張敞從受之。涼州刺史杜業,沛人爰禮,講學大夫秦近,亦能言之。孝平皇帝時,徵禮等百餘人,令說文字未央廷中,以禮為小學元士。黃門侍郎揚雄,采以作《訓纂篇》。凡《倉頡》以下十四篇,凡五千三百四十字,群書所載,略存之矣。

한나라 선왕 때, 창힐편에 통달한 자를 불러다가 장창이 그를 따라 배우도록 했다. 양주자사 두업, 패인 원례, 강학대부 진근도 그것(문자)을 말할(강술할) 수 있었다. 한나라 평왕 때, 원례 등 백여 사람을 초빙하여 미앙궁중에서 문자를 강설하게 했고, 원례를 소학(문자학) 원사로 삼았다. 황문시랑 양웅이 (그들이 강설한 것을) 채집하여 그것으로 훈찬편을 지었다. (훈찬편까지) 모두 창힐편 이후로 14편이며, 모두 5,340자이니, 뭇 서적에 기재된 바(문자)가 대략 거기에 있었다.

及亡新居攝,使大司空甄豐等校文書之部。自以為應制作,頗改定古文。時有六書:一曰古文,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即古文而異也。三曰篆書,即小篆。四曰左書,即秦隸書。秦始皇帝使下杜人程邈所作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蟲書,所以書幡信也。

왕망이 새 왕조를 세우던 때에 이르러 대사공 견풍 등을 파견하여 문자를 교정케 했다. 스스로 (왕명에) 응하여 지어야 한다고 여겨서 덧붙여 고문을 개정하였다. 당시에 여섯 글자체[六書]가 있었으니, 첫째는 고문으로 공자의 벽중서壁中書이고, 둘째는 기자奇字로 곧 고문이면서 이체자인 것이며, 셋째는 전서篆書 즉 소전으로 진시황제가 하두 사람 정막으로 하여금 짓게 한 것이고, 넷째는 좌서左書 즉 진의 예서이며, 다섯째는 무전繆篆으로 그것으로써 도장을 베껴 세기는 것이며, 여섯째는 조충서鳥蟲書로 그것으로써 깃발이나 부절에 쓰는 것이다.

壁中書者,魯恭王壞孔子宅,而得《禮記》、《尚書》、《春秋》、《論語》、《孝經》。又北平侯張蒼獻《春秋左氏傳》。郡國亦往往於山川得鼎彝,其銘即前代之古文,皆自相似。雖叵復見遠流,其詳可得略說也。

벽중서壁中書란 노나라 공왕이 공자의 집을 뜯을 때 예기, 상서, 춘추, 논어, 효경을 얻었는데, 이를 말한다. 또 북평 제후 장창이 춘추좌씨전을 바쳤고, 각국은 또 종종 산천에서 솥과 그릇 등의 동기를 얻었는데, 그 명문(세겨진 글)이 곧 전대의 고문으로 모두 서로 비슷했다. 비록 멀리 흘러 온 그 자세한 면모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 대략적인 설명을 얻을 수는 있다.

而世人大共非訾,以為好奇者也,故詭更正文,鄉壁虛造不可知之書,變亂常行,以耀於世。諸生競逐說字,解經誼,稱秦之隸書為倉頡時書,云:「父子相傳,何得改易!」乃猥曰:「馬頭人為長,人持十為斗,虫者,屈中也。」廷尉說律,至以字斷法:「苛人受錢,苛之字止句也。」若此者甚眾,皆不合孔氏古文,謬於《史籀》。俗儒鄙夫,翫其所習,蔽所希聞。不見通學,未嘗睹字例之條。怪舊埶而善野言,以其所知為秘妙,究洞聖人之微恉。又見《倉頡篇》中「幼子承詔」,因曰:「古帝之所作也,其辭有神僊之術焉。」其迷誤不諭,豈不悖哉!

그러나 세인들은 모두 크게 비난하고 헐뜯으며, 기이한 것(옛것)을 좋아하는 자라 여긴다. 고의로 정규의 문자를 변경하여 벽을 향해 헛되이 알 수 없는 글자를 지어 통상적으로 쓰이는 것(글자)을 혼란시켜서 세상에 (자신을) 빛내 보인다. 뭇 서생들은 다투어 글자를 풀이하고 경전을 해석하면서 진나라의 예서가 창힐 때의 글이라고 떠들썩하게 일컬으며 말하기를, "부자간에 서로 전해왔는데 어찌 고쳐졌겠는가?"라고 한다. 그리고는 함부로 말하기를, "말머리를 한 사람이 長이며, 사람이 十을 가진 것이 斗이고, 虫者는 中이 굽은 것 이다"라고 한다. 관아의 벼슬아치가 법률을 말하는데 글자를 가지고 법을 판단하는 지경에 이르러 "사람을 괴롭혀 돈을 받는다[苛人受錢]"의 苛자를 "止句"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매우 많은데, 모두가 공자의 고문과 들어맞지 않고 史과도 맞지 않는다. 속된 선비와 비루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배운 것(예서체)만 아끼고 희귀한 사실에는 막혀서, 통달한 학문을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육서의 조례를 일찍이 목격한 바 없었다. 옛 문예를 이상하다 여기고는 속설만을 좋아하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는 오묘하다고 여기고 성인의 정미한 뜻을 모두 탐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창힐편 가운데 "아이들이 가르침을 이어받아[幼子承詔]"란 말이 보이는데, (이를 "어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다/황제의 명을 이어받아"로 해석하여) 이 때문에 말하기를 "(이 책은) 고대의 제왕이 만든 것이다. 그 말에 신선의 술법이 있다"라고 한다. 그 잘못이 깨우쳐지지 않으니 어찌 혼란하지 않겠는가!

《書》曰:「予欲觀古人之象。」言必遵修舊文而不穿鑿。孔子曰:「吾猶及史之闕文,今亡矣夫。」蓋非其不知而不問。人用己私,是非無正,巧說邪辭,使天下學者疑。

상서에 이르기를 "나는 고인의 사물 모양을 보고 싶다"하니, 이는 반드시 고대 문자 전통에 의거하여 연구해야지 견강부회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래도 역사기록에 빠진 글을 보았는데(우리 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도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그들이 알지 못하면서도 묻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만을 쓰니 시비가 바로 되지 않고 교묘한 설과 엉터리 말들은 세상의 배우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蓋文字者,經藝之本,王政之始。前人所以垂後,後人所以識古。故曰:「本立而道生。知天下之至賾而不可亂也。 今敘篆文,合以古籀;博采通人,至於小大;信而有證,稽譔其說。將以理群類,解謬誤,曉學者,達神恉。分別部居,不相雜廁也。萬物咸睹,靡不兼載。厥誼不昭,爰明以喻。其稱《易》孟氏、《書》孔氏、《詩》毛氏、《禮》周官、《春秋》左氏、《論語》、《孝經》,皆古文也。其於所不知,蓋闕如也。

무릇 문자란 경서와 예술의 근본이며 왕이 정치하는 시작이다. 전인이 그것으로써 (문화를) 후대에 전하고, 후인은 그것으로 고대문화를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근본이 세워져야 길(도)이 열리며, 천하의 깊은 도리를 알면 혼란스럽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제 小篆을 기술하는데 고문과 文으로 더하고 통달한 사람들의 것을 널리 채택하여, 작은 것이나 큰 것에 대해서도 믿음직하게 증거를 대었다. 그 설들을 고증하고 해석하여 무리와 부류를 설명하여 오류를 풀고 배우는 이를 깨우쳐 신묘한 뜻에 통달케 하였다. 부수로 나누고 정리하여 서로 섞이지 않게 하였다.갖가지 사물을 모두 볼 수 있고, 온전히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글자의) 뜻이 충분히 분명하지 않으면 전대의 경전을 인용하여 설명을 더했으니, 그 인용한 바 '주역'은 맹씨본, '상서'는 공씨본, '시경'은 모씨본, '예기'는 주관의 것, '춘추'는 좌씨본, '논어', '효경'이 모두가 다 고문이다. 그 알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闕자를 씌워 썼다(글자 위에 써서 의문을 표시함).

설문해자 원문출처

문자의 기원과 그 자취
동방 한민족 시원 문자의 발전 과정


이하 내용은 솔롱고의 설문해자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으로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하였으며, 한자 9,000여 자를 수집하여 540부로 분류하고, 문자학에서의 원리인 육서에 따라 글자꼴을 분석하고 풀이했다. 

설문해자의 작자는 동한의 허신(許愼)이다. 동한 화제 영원 12년(CE. 100) 초고가 쓰여졌고, 안제 건광 원년(CE. 121)에 탈고했다. 이는 중국 문자학의 기초를 닦은 작품이요, 또한 중국 최초의 체계적으로 완비된 자전(字典)이기도 하다. 거기에 수록된 자수는 9,353개며 따로 중문(重文: 이체자) 1,163개가 있다. 매개의 글자는 모두 맨 먼저 소전(小篆: 대전을 간략하게 만든 서체)의 형상으로 열거하고,  그 다음에 해설을 하되, 먼저 자의(字義)를 풀이하고 나서 형상과 짜임새를 설명했다.

이 책은 중화서국의 영인본이다. 서면의 테두리 위에 있는 해서(楷書)는 오늘날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새로 집어 넣은 것이고, 두 줄로 된 소자(小字)는 송나라의 서현(徐鉉)이란 사람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교정하면서 더 집어넣은 주석과 반절주음(反切注音)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서현은 손면의 당운(唐韻) 반절을 채용하였던 것이지, 허신 시대의 독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신이 풀이한 자의는 그가 인정한 원래의 뜻이다. 그는 소전(小篆)의 형상에 근거해서 자형(字形)의 짜임새를 분석하고 자의(字義)를 풀이하였는데 대부분 믿을 만한 것이다. 시대의 한계와 고문자 재료의 부족으로 인해 일부 착오도 있고, 앞서 인용한 첫째 쪽에도 바로 문제점이 비교적 많다. 우리가 자형의 짜임새를 분석한다거나 단어의 본의를 연구 ·토론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설문해자를 참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허신은 자형의 형상과 짜임새를 분석할 때 중간에  540개의 편방을 개괄해 내서 부수(部首)로 삼고, 그런 다음에 수집한 9천여 개의 글자를 그 540개의 부수 중에 배열해 넣었는데, 이것이 그의 일대 창작으로 후세의 검자법(檢字法)에 매우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설문(說文)의 부수의 배열에는 통일적인 표준이 없이 일반적으로 가능한 한 형상이 비슷하거나 서로 관련이 있는 것들을 모두 한 곳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이런 배열 방법은 철저하게 관철되지 않았고, 게다가 허신도 이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설문해자를 근거로 검자(檢字)한다는 것이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

청대의 몇몇 설문(說文)연구가들이 강희자전(康熙字典)의 214부에 근거해서 따로 '통검(通檢)'을 편찬했는데 그 가운데 비교적 통용된 것으로는 여영춘(黎永春)의 설문통검(說文通檢)인데 검색에 공할 만하다. 중화서국에서 새로 찍어낸 본서의 말미부록에 해체필획검자표(楷體筆劃檢字表)가 있는데 부수검색도 할 수 있으며, 본문의 각 글자를 검색할 수도 있다.

당 · 송 이래 설문(說文)을 연구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고, 청대에 극성하였는데 가장 추천을 받을 4대가는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저술한 단옥재(段玉裁), 설문해자의소(說文解字義疎)를 저술한 계복(桂馥), 설문구두(說文句讀)를 저술한 왕균(王筠),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을 저술한 주준성(朱駿聲)이다. 단옥재의 설문해자주는 설문을 학습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주본(注本)이다. 주준성의 설문통훈정의는 자의의 내원과 발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분석을 하였는데, 고대 한어를 학습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상당히 도움이 되는 공구서이다.

허신의 공적은 부수(部首)를 처음으로 만들어 한자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배열하는 방법을 맨 처음 창설하였고, 육서(六書)의 체계를 확립하여, 문자학(文字學)을 건립하였으며, 게다가 전문(篆文)의 사법 체계(寫法體系)와 한나라 이전의 옛 훈고음(訓古音)을 고스란히 간직함으로써, 후인들이 고문자학(古文字學) · 고음운학(古音韻學) 한어사원학(漢語詞源學)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대한 참고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만들어 진 뒤 전전하면서 베껴 써 오는 과정에서 오류가 너무 많아 송태종 옹희 3년(986)에 서현(徐鉉) 등에게 명하여 잘못된 곳을 조사하고 교정해서 책을 찍어냄으로써 비로소 널리 퍼져 전해지게 되었다. 서현의 동생 서개 설문계전(說文繫傳)을 썼다. 그래서 서현의 교정본을 대서본(大徐本)이라고 하고 서개의 계전을 소서본(小徐本)이라고 한다.


설문해자를 논하다

이상 설문해자서를 살펴본바 설문해자는 먼저 역易의 음양팔괘설에 기초하고, 창힐의 사물 본래 형상에 의해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역易은 한문의 기원이고, 육서(상형.지사.회의.형성.전주.가차.)는 즉 한문을 여섯가지로 구성하여 만든 자전(사전)이다. 이 여섯가지 구분에 따라 한문을 문(文)과 자(字)로 분류 하는데, '문文'에는 상형(象形)(물체 모양을 본뜸,日,月,山,水,..)과 지사(指事)(추상개념 기호,一,二,三,上,下,...)가 있고, '자字'에는 회의(會意)(상형, 지사 등 독립된 글자들의 조합, 明,林,...)와 형성(形聲)(글자들의 조합인데 한쪽은 뜻을, 한쪽은 음을, 城, 詩指,...)이 있으며, 문六과 자字를 활용전주(轉注)(글자본래 뜻과 연관 전용한것, 樂:풍류악, 즐거울락, 좋아할요. 說:말씀설, 기뿔열, 달랠세, 벗을탈)와 가차(假借)(음이나 뜻이 비슷한 것을 빌려씀, 외래어 표기)가 있다. 이처럼 설문은 육서 분류로 문六과 자字의 구성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글자수가 많아짐에 따라 허신 자신도 지켜지지 않았고, 후대로 갈수록 정리가 불분명 해지는 한자 자체의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설문해자가 최초의 자전임은 인정해야한다. 또한 창힐의 기록물(허신: 새와 짐승의 발자욱, 중국사서: 세족문, 한국 재야학계: 금문, 신지녹도전문, 신지신획)을 중화사상에 입각해 한자의 시원기록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학계논란의 소지가 있는 대목이다.

한편 허신의 설문이나 이후의 한문 고증학자들이 한문의 기원 및 구성과 관련하여 간과한 사실은 한자라는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에 사용된 기본 부호 (○,□,△)나 초기 금문, 음양 부호(󰁌 , —)나 괘가 한자의 창제과정에 어떻게 반영 되었느냐 이다. 서문에도 나타나듯 고문서가 망실 되였음의 기록의 그 고문자가 어떠하다란 구체성이 없기에 다분히 동이계 문자가 아니겠느냐 라는 추론을 내리게 한다. 

인류는 의사소통과 기록과 전승을 위해 그림이나 부호(기호)를 발명해 쓰기 시작했고 이후 그림과 부호는 문자로 진화 발전하였다. 문자로 진화 발전한 그림과 부호 중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부호와 그림은 주역(周易)의 음양(陰陽) 부호와 괘(卦)이다. 괘는 음양 원리가 담긴 하도낙서(河圖洛書)를 근거로 만들어졌으며 괘에는 하도낙서의 상(象)과 수(數)와 이(理, 이치)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이 말과 글이 많지않던 관계로 후에 '역易'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그 '역易'의 음양원리가, 오행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오행의 원리가 한자 형성에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공자는 주역(周易)의 계사하전 2장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혔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에 仰則觀象於天하고 俯則觀法於地하며
(옛적에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적에 우러러 하늘에서 상을 보고, 구부려 땅에서 법을 보며)
觀鳥獸之文과 與地之宜 하며 近取諸身하고 
遠取諸物하야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며, 가까이는 사람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자연의 물건에서 취
하여)
於是에 始作八卦하여 以通神命之德하여 以類萬物之情하니
(이에 비로소 팔괘를 지음으로써 신명의 
덕을 통하여 만물의 실정을 분류하니)

이에 허신도 설문해자 서문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보아도 이를 뒤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자가  동그라미(日: 해 일)를 쓰지 않았는지를 살펴 보면, 우리글의 시원에서 어떻게 한자가 갈라져 나온것을 알 수 있고, 여타의 정황도 포착된다 할 것이다.  

한자는 주역의 ‘체불용(體不用)’ 법칙에 준한다. 체(體)는 근원이자 원칙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체불용(體不用)’이란 체는 드러내 놓고 쓰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만물의 시원(始原)이 되는 하늘의 경우 상징 형상이 둥근 모양(天圓, 천원)이지만 실제로 한자에서는 원모양을 쓰지 않는다. 

'日'자의 변형과정은 분명 '○'모양에서 '□'모양으로 바뀌는데, '진'나라의 '대전', '소전'부터이다. 이는 '진' 이전에는 '○' 모양을 사용하였고, 주역의 법칙에도 얽메이지 않았고, 근원인 체(體)인 나라 휘하에서 함께 체를 사용하다가 중국 독자적인 한문으로 발전시켜 사용했는데, 그때 까지도 중국은 나라는 있으나 근본국이 아닌 제후국의 형태로 유지된 것으로 보니, '○'를 쓰지못한체 지내온 것이라 추론해 보고, 나아가 당시 '순수', '봉선'이라는 왕들의 정치형태를 보아서도 중국 역사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를 쓰는 거대제국의 존재 유무나 정황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자가 상형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등글고 땅은 네모나다)에서 표현하듯이 땅을 뜻하는 글자에는 네모(□)모양이 들어가 있고, 하늘을 뜻하는 글자에는 둥근 모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자에는 도형상으로 네모를 뜻하는 ‘□’는 있는데 비해 둥그런 모양을 형상하는 ‘○’는 없다. 주역에 의하면 하늘은 끝없이 움직이며 베풀어 만물을 내는 존재로서 만물의 바탕(건괘: 萬物資始)이라고 본다. 하늘이 음양의 기운으로 만물의 바탕이 되지만 딱히 육안 상으로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예기: 天無實形). 따라서 형상화하기도 어렵다. 동양철학에서는 이것을 체(體)라고 하는데 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땅은 하늘이 베푼 음양의 기운에 따라 만물의 생장수장을 다 드러내 보인다(곤괘: 萬物資生). 이를 용(用)이라 하는데 용은 육안 상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 보인다. 이러한 것으로 땅의 속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그쳐 안정되어 있다’ 라고 보고 땅을 네모(□)로 표상하였다. 반면에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여 순환반복을 거듭하며 변화하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天圓地方(천원지방)의 개념은 실제의 모양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갖고 있는 성정(性情)을 표현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를 나타낼 때 口에 양(陽)부호이자 으뜸과 하나라는 '一'을 넣어 '日'로표현하고, 달은 점점 차오르는 초승달 모양에서 변하여 훗날 음부호(月)를 아래 위로 겹친 모양이자, 해 다음이라는 二를 넣어 나타내었다. 이처럼 설문해자 이전부터 있어온 갑골문, 금문 등 고문은 한글이나 한문의 시원이 되었고, 한자는 '진'의 대전, 소전 부터 그 시원이 되어 설문해자라는 고대 사전이 나왔고, 우리글은 원래의 기본형인 ○, □, △ 형과 고문 (신지녹도전문, 신지신획, 금문, 가림토 등)에서 부터 한글 창제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자는 역의 기본형인 □, ㅡ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문출처: 솔롱고의 설문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