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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단고기 해제 등

2. 수메르 문명의 주요 특징

by 광명인 2024. 1. 26.

2.  수메르 문명의 주요 특징

수메르 문명의 실상은 19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설형문자로 쓴 점토판, 돌과 청동으로 만든 여러 가지 조각상, 원통형 인장 등이 발굴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70 년대에 프랑스 탐사대가 라가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였고 1880 년대부터는 미국 고고학자들이 니푸르에서 수만 점의 점토판을 발굴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암흑 속에 묻혀 있던 수메르 문명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의 문명사회 29곳을 거론하며 각 문명권의 여러 관계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명을 창조한 것수메르와 이집트 둘 뿐이라고 말하였다. 비록 이집트 문명의 출원지가 수메르인 것을 알지 못했지만, 수메르 문명의 독자성을 토인비도 충분히 인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수메르 연구가가 '수메르 문명은 처음부터 거의 완성된 상태로 역사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문명의 구체적인 모습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도시국가를 건설한 수메르] 

수메르 문명은 그 기원이 대체로 BCE 5000년경에 시작되었고 BCE 3500년경에는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성숙한 고대 문명이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이 두 강 사이의 땅에 스무 개에 가까운 도시를 세웠다. 그곳은 하류 지역으로 잦은 홍수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홍수 대책과 관개를 위해 농경민들을 집단으로 조직한 것이 도시국가 성립의 배경이다. 

각 도시국가는 저마다의 수호신을 모셨는데, 그 이유는 그 신들이 우주의 최고신으로부터 태초에 그 도시를 할당받아 다스리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앙에 신전을 짓고 그 둘레에 주거지를 지어 생활하였다. 

대표적인 도시국가 몇 개를 말하자면 우르, 우루크, 니푸르, 라가시 등이 있다. 우르는 '구약전서'에 나오는 유대족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고, 우루크는 곧 '구약전서'의 에레크이다. 도시들은 물의 사용권을 놓고 물 전쟁을 벌였고, 강한 도시들이 약한 도시들을 병합하였다. 

수메르의 도시는 저마다 다른 모양을 취하였다. 우루크는 널찍한 원형에, 전체 길이가 약 9.5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이 도시를 둘러쌌다. 니푸르는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운하로 인해 두 지구로 나뉘며, 주변은 직사각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세기 말 펜실베이니아 대학 발굴단이 점토판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점토판에는 BCE 1500년 무렵의 니푸르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지도는 실제 발굴 작업에 이용되었을 만큼 내용이 정확했다. 라가시는 몇 개의 지구로 나누어진 아주 큰 도시국가이다. 각 지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으며, 각 지구마다 따로 성벽을 쌓았고 다른 수호신을 모셨다. 수메르의 도시들이 남긴 뛰어난 문명의 자취는 점토판 기록을 통해 그 전모가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다신신앙을 한 수메르]

수메르인에게 종교는 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자신들이 창조된 것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고 믿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수메르인들은 신이 대기, 태양, 바람 등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신관은 다신관多神觀으로, 인간적 속성과 성격을 지닌 수많은 신이 존재하며, 신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존재로서 계급 구조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다.
 
계급 구조의 최상부에는 안An이 있었다. 안은 '신들의 왕'으로서 다른 모든 신을 낳은 우주 최고의 신이다. 안은 수메르의 초기왕조 시대에는 우루크의 수호신이었지만, 그 후 인간 세상을 직접 다스리지 않고 하늘 세계에만 존재하는 신으로 바뀌었다. 지상에 사는 신들의 우두머리는 안의 큰 아들인 엔릴Enlil이었다. 안과 엔릴의 관계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제우스의 관계와 같다.
 
수메르의 신관에서 독특한 개념은 신들 중에 제일 ‘큰 일곱 신’이 있고, 그들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며 그들에게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일곱 신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 하늘에 자리잡은 안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신은 수메르의 수호신이 되었다.
 
'대기大氣의 신'이자 수메르 중앙 지역의 도시인 니푸르의 수호신인 엔릴이 서열의 머리이고, '산기슭 언덕의 여신' 이면서 북쪽 키시 지방의 신인 닌후르상, '물의 신'이자 '지혜의 신'이며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위치한 에리두의 신인 엔키, '달의 신'이면서 우르의 신인 난나, '정의의 신'이자 '태양신'이며 라르사의 신인 우투,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자 우루크의 신인 인안나의 순서로 서열이 매겨졌다.
 
수메르의 다신 숭배 전통 수메르가 망한 이후에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같은 후대 메소포타미아에 전승되었고, 이것이 후에 그리스·로마 신화의 근간이 되었다. 

[최초의 양원제]

그리스인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오래 전인 BCE 3000년경에, 이미 수메르의 한 도시에서 '최초의 양원제'가 운영되었다. 수메르의 양원은 연장자들의 회합인 '상원'과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남자 시민의 회합인 '하원'으로 구성되었다. 우루크가 이웃 도시인 키시와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집회에서, 상원이 평화를 선택하자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그 문제를 하원으로 가져간 일이 있었다. 하원은 전쟁을 선택하였고, 왕은 그것을 승인하였다. 서양 민주주의정치의 바탕인 의회제도는 바로 수메르에서 출발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앞서는 수메르 법전] 

가장 오래된 고대의 법전은 BCE 1750년, 셈족의 왕인 함무라비에 의해 공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 보다 더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법전이 지금까지 세 가지나 발굴되었다. 

그 중 가장 오랜 것이 바로 1948년 이라크 박물관의 한 큐레이터가 바그다드의 구석진 언덕에서 캐낸 두 점의 점토판이다. 햇볕에 구운 밝은 갈색의 그 점토판을 판독한 결과, BCE 2350년경에 우르를 다스리던 우르남무 왕이 제정한 법령으로 밝혀졌다. 함무라비 법전이 성립되기 500년 전에 수메르는 이미 문명 사회의 특정인 법적 질서와 체계를 벌써 확립하였던 것이다.
 
손상이 심해 겨우 5개의 법규만 복원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물과 관련된 재판에 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노예의 처리에 대한 것이었다. 나머지 3개는 남의 신체를 상하게 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벌금 액수를 정한 것이었다. 수메르 법전에서 유래된 많은 법조문이 후대의 히브리 법문 속에 여실히 나타난다. 고대 법률제도 연구의 권위자인 E. A. 스파이저는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혼에 관해서 말할 때에 수메르 법 용어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이 토라를 읽을 때 경전의 끝에다 손을 대는 풍습이 옛날 수메르의 풍습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금도 실행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현대법이 수메르 법에서 그 근원을 얼마나 찾아야 될지는 모르지만 영국 사학자 삭스H.Saggs는 "땅 거래하는 법은 궁극적으로 수메르 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알파벳을 낳은 수메르] 

수메르인은 BCE 3200년경에 이미 문자를 사용했다. 초기의 문자는 그림문자(상형문자)였으나, 서서히 진화하여 BCE 3100년경 기호와 부호가 음가音價를 가진 문자가 되었다. 그 문자가 바로 수메르의 설형문자(쐐기문자)이다. 그 지역에서 많이나던 갈대의 뾰족한 끝으로 젖은 점토판에 쐐기 모양의 자국을 내어 다양한 글자를 만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설형문자 점토판은 역사상 최초의 '공식 기록 문서'가 되었다. 

처음 5백 년 동안은 수메르의 문자가 곡물의 양, 가축의 수를 계산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초기에 문자가 표현하는 개념이 단순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수메르인의 문자는 명사를 수식하는 동사와 형용사까지 갖춘 서술적 글쓰기가 가능할 정도로 섬세해져 결국 600여 개의 설형문자 기호가 만들어졌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많은 문명이 수메르의 문자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고유 언어에 적용하였다. 수메르 문자를 택한 아카드어는 고대 세계의 국제어가 되었다. 반면에 보기에는 더 아름답지만 필기가 성가신 그림문자를 사용한 이집트어는 끝내 국제어가 되지 못하였다. 아카드어는 그 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계속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문자와 그리스 문자를 거쳐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설형문자로 기록을 남긴 수메르인의 말은 우리말과 똑같이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 다음에 조사(토씨)가 붙는 언어, 즉 교착어이다. 놀랍게도 지구상 언어 가운데 교착어는 한국어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알타이어뿐이다. 수메르어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메르 말의 어순이 우리말과 거의 같고 단어 자체가 같은 것이 100가지나 된다고 한다.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두드러진 유사성은 두 집단의 공통된 뿌리를 암시한다.

[서양 최초의 학교]
 
크레이머에 의하면 수메르에서는 이미 BCE 3000년경에 학교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 BCE 2500년경에는 점토판으로 만든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수메르의 학교에서는 수메르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서기를 양성하였다. 왕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왕에게 봉사하는 서기는 글을 모르면 일을 할 수 없었다. 서기라는 전문 직업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를 다녀야했고, 그 교육은 아주 엄격하였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수메르인들의 강한 교육열을 보여주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지각하기 일쑤이고 복장도 단정치 않고 글씨도 서툴러 선생님께 늘 야단맞던 학생이, 아버지께 선생님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 옷을 입히고, 선물을 주었으며, 반지를 끼워 주었다. 푸짐한 접대를 받은 선생님은 학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형제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친구들 중에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학교 활동을 잘해 왔으므로 이제 지식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촌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의 학교 제도에서 특이한 점은 학교 선생을 '학교 아버지(school father)', 학생을 '학교 아들(school son)' 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스승을 아버지, 학생을 아들이라 한 것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동양의 군사부일체 사상과 상통한다. 

['노아의 방주'의 원형]
 
수메르 문명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 중의 하나는 수백 편에 달하는 문학 작품이다. 그 작품들 중에 인간 탄생 이야기, 신 이야기, 전설적 영웅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들이 전해지는데, 천지창조의 설화를 담은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영생을 추구하며 모험에 나선 영웅의 이야기인 '길가메시 서사시'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여러 언어로 옮겨져 아카드인, 아시리아인, 갈데아인, 바빌론인의 문학 세계에 모두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그리스와 로마 시대 작품이 인류의 고전이 되어 세계 언어로 꾸준히 번역되는 것처럼, 수메르의 문학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전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특히 「에누마 엘리쉬」는 아시리아 시대와 바빌론 시대를 거쳐 유대인의 창세 설화인 「창세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BCE 2700년경 우루크의 5대 왕이었던 길가메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쾌락과 압정壓政을 일삼던 그가 자신의 방탕을 뉘우치고 영생의 비밀을 찾아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우트나피쉬팀이 그에게 들려주는 대홍수 이야기이다. 인간의 타락에 진노한 신이 홍수를 일으켜 인류를 전멸시키는데 방주를 만든 우트나피쉬팀 가족만 살아남아 홍수후에 등장한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대홍수 이야기는 '구약전서'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흡사한데, 대홍수 설화는 BCE 2000~10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에 등장한 여타 민족의 기록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에누마 엘리쉬」,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수메르의 문학 작품이 여러 나라 말로 필사되어 널리 읽혀진 것에서, 수메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피어난 모든 오리엔트 문명의 원천이었음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상투를 튼 수메르 왕]
 
수메르의 철학과 사상동북아와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안키Anki(천지)'라 불렀다. "우주는 둥근 하늘 '안An'과 평평한 땅 '키Ki'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믿은 그들의 사상은,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또한 동양의 제왕 문화에서 나타나는 천명天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수메르 역대 왕의 이름을 기록한 왕명록王名錄의 1단 1행은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라고 말한다. 왕권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자는 하늘이 내는 것이며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린다는 동양의 천자사상과 상통한다. 

수메르인은 오늘날 시간을 초, 분, 시로 나누는 데 사용하고 있는 60진법을 사용하였다. 손가락은 모두 10개이므로 단순한 손가락 셈은 10진법에 머문다. 북서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셈족의 도시국가에서 출토된 경제 문서를 보면 그들은 10진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수메르 사람들은 두 손과 다섯 손가락을 사용하여 60진법을 썼던 젓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양의 60갑자와 그 사상적 배경이 동일하다.
 
수메르와 한국의 동질성은 의식주 문화와 생활 풍습에서도 나타난다. 1923년부터 우르를 발굴하여 대홍수의 흔적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고고학자 울리(1880 ~ 1960)가 당시 우르의 묘지에서 황금으로 만든 두 자루의 단도를 지닌 왕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그 왕은 황금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어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한다. 상투는 동방 한민족의 독특한 머리형이 아닌가.
 
또한 수메르 사람들은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씨름을 즐겼고, 순장殉葬을 하였으며 결혼 전 신부가 될 여자의 집에 함을 지고 갔다. 여인들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는데, 이것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부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메르인의 씨름 청동상과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

[수메르 왕조의 시작과 끝] 

BCE 5000년경에 '두 강 사이의 땅'에서 보리를 재배하면서 싹튼 수메르 문명은 BCE 3100년경에는 전역에 도시국가 체제가 확산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도시 생활은 모든 사람이 농업에 종사하던 촌락 사회와 사뭇 달랐다. 수만 명이 사는 도시에 잉여 생산물이 늘어나자 식량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자가 많아졌다. 왕이 생겨났으며 지배조직도 정비되었다. 일상용품도 복잡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도시국가가 발달하면 할수록 도시들 간에 분쟁도 더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BCE 2900년경에 수메르의 우루크, 우르, 키시, 니푸르 등의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교역로와 영토 문제로 전쟁을 되풀이하는 '초기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혼란기를 끝내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한 사람은 사르곤 왕(BCE 2334~ BCE 2279)이었다. 사르곤 왕은 셈족 가운데 하나인 아카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제국을 아카드 제국이라 부른다. 이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땅을 100여 년 정도 지배하다가 5세 왕에 이르러 북쪽의 구티인에게 멸망당하였다(BCE 2193).
 
이렇게 '아카드왕조 시대’가 끝나고 80년이 지나 수메르 출신의 우르남무가 이민족을 축출하고 다시 통일왕조를 세웠다. '우르 제3왕조 시대'(BCE 2112~BCE 2004)가 시작된 것이다. 약 100년에 걸친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의 전성기이자 마지막 통일왕조였다. 이 왕조가 동쪽에 자리한 엘람족의 침입을 받아 BCE 2004년경에 멸망함으로써 수메르인은 역사의 정식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땅에서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가 주도하는 오리엔트 문명이 전개되었고, 수메르의 유산은 오리엔트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