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은 7세를 전하니, 그 역년이 3,301년이며, 배달국은 18세를 전해, 역년이 1,565년이다. 그리고 단군조선은 47세를 전하였으며 3왕조로 나뉘어, 역년은 총 2,096년이다. 따라서 환국, 배달, 조선으로 이어진 삼성조 시대의 역년을 합하면 총 6,960년으로 한민족의 고대사는 정확히 40년이 빠진 약 7,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래는 한민족의 고대사를 밝히는 열쇠인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기를 비롯해서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천석)의 삼성기 하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그리고 일십당 이맥의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의 한글 번역본을 모은 것이다. 비록 각 사서를 지은 저자들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연결해서 분석해보면 각각의 내용들이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내용에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 사서들은 환국과 배달 그리고 단군조선의 삼성조의 역사를 소상히 밝히는 내용들로 한민족의 고대사와 건국정신을 복원하는 소중한 사료들이다.]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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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께서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시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서자(庶子)부의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天下)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늘, 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이런 뜻을 아시고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아들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며 그곳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셨다. 이에 환웅(桓雄)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오시어 이를 신시(神市)라 이르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시다.
환웅께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와 주곡(主穀)·주명(主命)·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을 거느리시어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교화하셨다.
이때에 웅족과 호족이 같은 굴에 살았는데, 늘 신성하신 환웅(桓雄)님께 환족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께서 영험한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매를 내려주면서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야 사람의 참모습을 회복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웅족과 호족이 환웅께서 주신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21일 동안을 삼가함에 웅족은 여자의 참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참모습을 얻지 못하였다. 웅족 여인이 혼인할 곳이 없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 와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웅족 여인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혼인해 아들을 낳으셨다.
그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니 당(唐)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경인(庚寅)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금미달이라고도 하니,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 BCE 1122)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이에 단군이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가셨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山神)이 되시니 수(壽)가 1,908세 이셨다.
[1908년이란 구체적인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단군세기에 나와있는 47대 단군의 역년을 조사해 고조선 1, 2왕조의 연대를 합하면 정확히 1,908년이란 숫자가 나온다. 마지막 3왕조까지 합하면 단군조선의 역년은 2,096년이지만, 일연스님은 당시 부족하고 한정된 사료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기술을 했으나 단군조선에 관한 정확한 고증엔 분명 한계가 많았을 것이며 그에 대한 오해와 오류도 있었으리라 본다. 1왕조 1,048년+ 2왕조 860년 = 1,908년]
[한글번역: 상생문화연구소]
삼성기 상-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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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인천제의 환국 개창
우리 환족의나라 세움이 가장 오래 되었다.
하느님[一神]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가장 밝은 하늘)에 계시며 홀로 우주의 조화를 부리는 신神이시다. 광명光明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대권능의 조화[權化]로 만물을 낳으며, 영원토록 사시며[長生久視] 항상 즐거움을 누리신다. 지극한 조화기운[至氣]을 타고 노니시고 스스로 그러함[道]에 오묘하게 부합하며, 형상 없이 나타나고, 함이 없이 만물을 지으시며, 말없이 행하신다.
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보내시니, 이에 환인께서 만백성의 우두머리[監群]가 되어 천계天界(천산 동방의 환국)에 거주하시며 돌을 부딪쳐서 불을 피워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니 이 나라를 환국(광명의 나라)이라 했다. 이 환국을 다스리신 분을 '천제 환인씨'라 부르고,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불렀다. 환국은 7세를 전했으나, 그 연대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
2. 환웅천황의 배달 시대
그 후 환웅씨桓雄氏가 환국을 계승하여 일어나 하늘에 계신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의 지역에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천평天坪에 우물[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파고 청구靑邱에 농사짓는 땅을 구획하셨다. 환웅께서 천부와 인을 지니고 오사五事를 주관하시어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 주시고[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시며[弘益人間], 신시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셨다.
삼칠일(21일)을 택하여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바깥 일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하셨으며, 선약을 드시어 신선이 되셨다. 괘卦를 그어 미래의 일을 아시고, 천지변화의 움직임[象]을 파악하여 신명을 부리셨다.
여러 신령한 인물과 명철한 인재를 두루 모아 신하로 삼고, 웅씨족 여인[熊氏女]을 맞아들여 황후로 삼으셨다. 혼인 예법을 정하여 짐승 가죽으로 폐백을 삼게 하시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하시고 시장을 열어 교역을 하게 하시니, 구환족九桓族이 사는 모든 지역에서 공물과 세를 바치고, 뭇 새와 짐승들까지 따라서 춤을 추었다. 후세 사람이 이분을 지상의 최고신으로 모시고 세세토록 제사 지내기를 그치지 않았다.
배달국 신시 시대 말기에 치우천황이 계시어 청구靑邱를 널리 개척 하셨다. 환웅천황의 배달 시대는 18세를 전하였으며 1,565년을 누렸다.
3. 단군왕검의 조선 개국
이후에 신인神人 왕검이 불함산不咸山의 박달나무가 우거진 터[墟]에 내려오셨다. 왕검께서 지극히 신성한 덕성과 성인의 인자함을 겸하시고, 능히 선대 환인 · 환웅 성조의 법을 이어 받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륜의 푯대를 세우시니, 그 공덕이 높고 커서 찬란하게 빛났다.
이에 구환九桓의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천제의 화신으로 추대하여 임금으로 옹립하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이시다. 왕검께서는 신시 배달의 옛 법도를 되살리시고,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여시니 그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셨다.
단군왕검께서는 두 손을 맞잡은 채 함이 없이 단정히 앉아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시고, 현묘한 도를 깨치어, 뭇 생명을 접하여 교화하실 때,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고,
고시高矢에게 농사일을 맡게 하시고,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시고,
기성奇省에게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고,
희羲에게 괘서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를 담당하게 하셨다.
단군왕검께서 비서갑菲西岬에 사는 하백의 따님[河伯女]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관장케 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천하가 태평해졌다.
마흔일곱 분의 단군, 2,096년간의 대조선사
병진(단기 1909, BCE425)년 주나라 고왕考王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고 도읍을 백악산自白岳에서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으며, '8조 금법禁法'으로 법도를 세우셨다.
책읽기와 활쏘기에 힘쓰게 하고, 하늘(삼신상제님)에 제사 지내는 것을 근본 가르침으로 삼았으며,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고 산과 못을 일반 백성에게 개방하셨다. 죄를 지어도 처자식에게 미치지 않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힘을 합하여 다스리셨다.
남자에게는 일정한 직업이 있고 여자에게는 좋은 배필이 있었다. 집집마다 재물이 풍족하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으며, 악기 소리와 노랫소리가 온 나라에 넘쳐흘렀다. 시조 단군왕검께서 무진(BCE 2333)년에 나라를 다스리신 이래 47세世를 전하니, 역년은 2,096년이다.
4.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와 동명왕 고두막한
임술(단기 2095, BCE 239)년 진왕秦王 정政 때 신인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정미(단기 2140, BCE 1940)년 한나라 혜제惠帝때 연나라 유민의 우두머리 위만衛滿이 서쪽 변방 한 모퉁이를 도적질하여 차지하였다. 이에 번한의 왕, 준準이 맞서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에 속한 백성들은 대부분 한수(한강)" 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한때 여러 영웅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힘을 겨루더니, 계유(단기 2226, BCE 108)년 한무제 때 한나라가 쳐들어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였다. 이때 서압록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 칭하였다. 을미(단기 2248, BCE 86)년 한나라 소제昭帝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하고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칭하시니, 이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고추모(고주몽)의 북부여 계승과 고구려 건국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 하-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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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의 시조와 동서 문명의 시원 국가
인류의 조상은 나반那般이시다. 나반께서 아만阿曼과 처음 만나신 곳은 아이사비阿耳斯庇이다. 두 분이 꿈에 천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니 환족의 모든 족속[九桓族]이 그 후손이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 백성들은 풍요로웠고 인구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桓仁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得道長生] 몸에는 병이 없으셨다. 하늘(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代天宣化]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굶주림과 추위를 사라지게 하였다.
[환국의 통치자와 열 두 나라 연방]
초대 안파견환인에서 2세 혁서환인, 3세 고시리환인, 4세 주우양환인, 5세 석제임환인, 6세 구을리환인을 이어 7세 지위리환인에 이르렀는데, 환인을 단인檀仁이라고도 한다.
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리요, 동서로 2만여 리이니 통틀어 환국桓國이라 했다.
이 환국은 다시 여러 나라로 구성되었는데, 그 이름은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일명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일명 직구다국), 사납아국, 선패국(일명 시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으로 합하여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이다.
환국은 7세를 전하니, 그 역년은 3,301년인데, 혹자는 63,182년이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2. 환국 말, 환웅의 동방 개척
[3천명 환족 무리의 백두산 문명 개척]
환국 말기에 안파견께서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을 내려다 보시며 이렇게 물으셨다.
“두 곳 모두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할 수 있는 곳이다. 과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은가?"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桓雄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太白山(백두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에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명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洪範]으로 삼을지어다."
[신시를 열어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신 환웅천황]
환웅께서 동방을 개척할 당시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던 반고盤固라는 인물이 있었다. 반고가 개척의 길을 따로 나누어 가기를 청하므로 환인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드디어 반고는 많은 재화와 보물을 싣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신장을 거느리고 공공共工 · 유소有巢 · 유묘有苗 · 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 납림拉林 동굴에 이르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을 제견諸畎이라 하고, 반고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불렀다.
이때 환웅桓雄께서는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오시어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桓雄天王이시다. 환웅께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 · 왕명 · 형벌 · 질병 · 선악을 주관하게 하시고,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弘益人間].
3. 배달의 건국
[신교의 수행 계율, 100일 기도와 21일 수행]
이때 웅족과 호족[一熊一虎]이 이웃하여 함께 살았다. 일찍이 이 족속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기도 드리는 신단수에 가서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빌었다. 환웅께서 이 소식을 듣고 "가히 가르칠 만하도다" 하시고, 신령한 주문과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 주신 정해법靜解法으로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것을 먹을지어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참된 인간이 되리라."
이에 웅족과 호족 두 족속이 함께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21일)을 지내더니, 웅족은 능히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 내고 계율을 지켜 인간의 참모습[儀容]을 얻었으나, 호족은 방종하고 게을러 계율을 지키지 못하여 좋은 결과[善業]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두 족속의 성정이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웅족 여인[熊女]들이 시집갈 곳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주문을 외우며 아이 갖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이들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환족 남자들과 혼인하게 하셨는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환桓의 핏줄을 이은 자손으로 입적시키셨다.
[배달의 발전과 치우천황의 계승]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동방 배달민족의 새 역사 시대를 열고[開天] 백성에게 교화를 베푸실 때, 천부경을 풀어 설명[演天經]하시고 삼일신고를 강론[講神誥]하여 뭇 백성에게 큰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후에 치우천황(14세 환웅, 자오지환웅)께서 영토를 개척하고, 구리와 철을 캐어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병사를 훈련시키고 산업을 일으키셨다. 이때에 구환족이 모두 삼신을 한뿌리의 조상으로 삼았다. 천황께서 소도蘇塗와 관경管境과 책화責禍를 주관하고, 백성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는 화백和白제도를 두셨다. 또한 백성으로 하여금 지혜와 생명력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전佺의 도에 머물게 하셨다.
그 후 구환족이 관경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에 의해 모두 통일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웅족과 호족의 대립과 환족의 교화]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强族]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에서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以三神說敎] 전계[佺戒]로써 삶의 본업[業]을 삼으며, 백성을 모아 맹세하게 하여 권선징악의 법을 두셨다. 이때부터 은밀히 그 강족을 제거하려는 뜻을 두셨다.
이때 각 부족의 이름[族號]이 한결같지 않고 풍속은 점점 갈라졌다. 본래 살고 있던 사람들은 호족이고,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탐욕이 많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웅족은 어리석고 괴팍하며 고집스러워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비록 같은 곳에 살았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소원해졌다. 그리하여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 주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으며, 매사에 서로 불복하여 함께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이 지경에 이르자 웅족의 여왕이, 환웅께서 신령한 덕[神德]이 있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 환웅을 뵙고 아뢰기를, "원하옵건대 저희들에게 살 곳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들도 하나같이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환족의 백성이 되고자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환웅에서 이 말을 듣고 허락하시어 웅족에게 살 곳을 정해 주시고 자식을 낳고 살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호족은 끝내 성격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四海 밖으로 추방하셨다. 환족의 흥성이 이때 부터 시작되었다.
4. 배달의 전성기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14세 치우천황]
그 후 10세 갈고환웅 때는 염제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였다.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銅頭鐵額]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九治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고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만드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분을 치우천황이라 불렀는데, 속언에 치우는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의 신하였던 한족의 시조 헌원]
치우천황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지켜보시고 드디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여러번 서쪽에서 천자의 군사[天兵]를 일으키셨다. 삭도索度에서 군사를 진격시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을 점령하시고 헌후索度(헌원)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탁록涿鹿의 광야로 진격하여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이후 오장군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셨다.
이때 천하의 형세는 세 세력이 세발솥의 솥발과 같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록涿鹿의 북쪽에 대요大撓, 동쪽에 창힐倉頡, 서쪽에 헌원軒轅이 자리잡고 무력으로 승패를 겨루었으나 서로 이기지 못했다.
당초에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으므로 싸울 때마다 불리하였다. 이에 대요大撓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다시 창힐倉頡에게 의지하려 하였으나 여기서도 역시 도움을 얻지 못했으니, 이들 두 나라는 모두 치우천황을 추종하는 세력이 었다.
대요大撓는 일찍이 배달로부터 육십갑자의 '간지干支의 술법'을 배웠고, 창힐倉頡은 '부符 같고 그림 같은 모습을 한 글자, 즉 부도지문符圖之文을 전수받았다. 이때 모든 제후는 치우천황의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 또한 배달로부터 문물을 배워갔기 때문이다.
[史記에서 왜곡된 치우천황]
사마천의 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하의 제후가 모두 황제헌원에게 와서 복종하였으나, 치우가 가장 강포하여 천하에서 능히 그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원문: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為暴, 莫能伐) 헌원이 섭정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명으로,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머리가 구리같이 단단하고 이마는 철같이 강하였으며 모래를 먹었다. 오구장五丘杖과 칼[刀]과 가지가 있는 창[載]과,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쏘는 태노太弩를 만들어 천하에 그 위세를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호칭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
5. 신시역대기
배달倍達은 환웅桓雄께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정하신 나라의 이름이다. 수도는 신시神市요, 후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겼다. 18세를 전하니, 역년은 1,565년이다.
1세는 환웅천황桓雄天皇이시니 일명 거발환居發桓이라. 재위 94년이요 천수 120세이시다.
(신시개천 원년, BCE 3897~신시개천 94, BCE 3804)
2세는 거불리居佛理환웅이시니 재위 86년이요 천수 102세이시다.
(신시개천 94, BCE 3804~신시개천 180, BCE 3718)
3세는 우야고右耶古환웅이시니 재위 99년이요 천수 135세이시다.
(신시개천 180, BC3718-신시개천 279, BCE 3619)
4세는 모사라慕士羅환웅이시니 재위 107년이요 천수 129세이시다.
(신시개천 279, BCE 3619 ~신시개천 386, BCE 3512)
5세는 태우의太虞儀환웅이시니 재위 98년이요 천수 115세이시다.
(신시개천 386, BCE 3512~신시개천 479. BCE 3419)
6세는 다의발多儀發환웅이시니 재위 98년이요 천수 110세이시다.
(신시개천 479, BCE 3419~신시개천 577, BCE 3321)
7세는 거련居連환웅이시니 재위 81년이요 천수 140세이시다.
(신시개천 577, BCE 3321~신시개천 658, BCE 3240)
8세는 안부련安夫連환웅이시니 재위 3년이요 천수 94세이시다.
(신시개천 658 BCE 3240-신시개천 731, BCE 3167)
9세는 양운養雲환웅이시니 재위 96년이요 천수 139세이시다.
(신시개천 731, BCE 3167~신시개천 827, BCE 3071)
10세는 갈고葛古환웅이시니 일명 갈태천왕葛台天王 또는 독로한瀆盧韓이라. 재위 100년이요 천수 125세이시다.
(신시개천 827, BCE 3071~신시개천 927, BCE 2971)
11세는 거야발居耶發환웅이시니 재위 2년이요 천수 149세이시다.
(신시개천 927, BCE 2971~신시개천 1019. BCE 2879)
12세는 주무신州武愼환웅이시니 재위 105년이요 천수 123 세이시다.
(신시개천 1019, BCE 2879~신시개천 1124, BCE 2774)
13세는 사와라斯瓦羅환웅이시니 재위 67년이요 천수 100세이시다.
(신시개천 1124, BCE 2774~신시개천 1191, BCE 2707)
14세는 자오지慈烏支환웅이시니 세칭 치우천왕이요 도읍을 청구국으로 옮기셨다. 재위 109년이요 천수 151세이시다.
(신시개천 1191, BCE 2707~신시개천 1300. BCE 2598)
15세는 치액특蚩額特환웅이시니 재위 89년이요 천수 118세이시다.
(신시개천 1300, BCE 2598~신시개천 1389, BCE 2509)
16세는 축다리祝多利환웅이시니, 재위 56년이요 천수 99세이시다.
(신시개천 1389, BCE 2509~신시개천 1445. BCE 2453)
17세는 혁다세赫多世환웅이시니 재위 72년이요 천수 97세이시다.
(신시개천 1445, BCE 2453~신시개천 1517, BCE 2381)
18세는 거불단居弗檀환웅이시니 혹은 단웅이라 재위 48년이요 천수 82세이시다.
(신시개천 1517, BCE 2381~신시개천 1565, BCE 2333)
환국본기-전문
1. 인류 창세 문명의 아버지, 환인천제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환인이 계셨다. 천산에 내려와 거처하시며 천신께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셨다. 백성의 목숨을 안정되게 보살피고, 세상의 뭇 일을 겸하여 다스리셨다. 사람들이 비록 들에 거처하나 벌레와 짐승의 해가 없었고, 무리지어 행동해도 원망하거나 반역하는 근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사귐에 친하고 멀리하는 구별이 없고,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고,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평등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소임을 나누었다.
당시에는 비록 법규와 명령이 없었으나 백성들 스스로가 화평하고 즐거워하며 도리에 순종하였고, 병을 제거하고 원한을 풀어 주며, 다친 자를 돕고 약한 자를 구제하니, 원한을 품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환桓(밝은 사람)이라 부르고, 무리를 다스리는 사람 을 인仁이라 하였다. 인仁이란 '임무를 맡는다'는 뜻이다. 환인이라 부른 이유는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사람을 구제하고, 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려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함에 반드시 어진 마음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가와 무리가 서로 번갈아 백성에게서 환인을 선출 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업적을 살펴서 좋아함과 싫어함을 구별하고 각자 마음으로 판별하여 스스로 선택하였다. 이렇게 환인을 선출하는 궁극 목적은 오직 공公(공공의 이익)을 위해 구환족이 대동단결하여 한마음이 되는 데 있었다. 또한 마땅히 대상자의 잘잘못을 비교하여 반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은 연후에야 선출하였고, 다른 모든 무리도 감히 성급하게 독단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대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준비가 없으면 우환이 뒤따르고[無備有患] 준비를 잘 하면 우환이 없으리니[有備無患], 반드시 미리 준비하여 넉넉하게 하며, 무리를 잘 다스려 만 리나 떨어져 있는 사람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말하지 않아도 교화가 행해지게 하였다. 이때에 만방의 백성이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와서 모인 자가 수만 명이 되었고, 서로 둥글게 모여 춤을 추며 환인을 추대하였다. 환인께서 환화桓花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앉으시니, 모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기뻐하는 소리가 산에 가득하고, 귀화해 오는 자가 저자를 이루었다. 이분이 바로 인류 최초의 우두머리 조상이시다.
2. 12환국과 그 위치
삼성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파내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부르는데,
그 땅의 넓이가 남북으로 5만 리요 동서로 2만여 리이다.
이 땅을 모두 합하여 말하면 환국桓國이요.
나누어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일명 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일명 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일명 시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하면 열 두 나라이다. 천해는 오늘날 말하는 북해이다.
삼성밀기의 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으로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과 2백 리 떨어져 있다.
구다국의 옛 명칭은 독로국으로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다.
월지국은 구다국 북쪽 5백 리에 있다.
직구다국은 매구여국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는 오난하에 있었으나,
후에 독로국에게 패하여 마침내 금산金山(알타이 산)으로 옮겼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이 나는 곳이다.
쑥은 달여 먹어 냉冷을 치료하고, 마늘은 구워 먹어 마魔를 다스린다.
3. 환국의 통치자 7세 환인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는데, 백성이 많고 살림은 넉넉하였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물며 득도하여 장생하시고, 몸을 잘 다스려 병이 없으셨다.
하늘을 대행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시니,
모두 부지런히 힘써 생산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저절로 없어졌다.
(초대 안파견환인에서) 혁서환인, 고시리환인, 주우양환인, 석제임환인,
구을리환인을 이어 지위리환인 혹은 단인에 이르렀다.
7세를 전하니, 역년이 3,301년이요, 혹은 63,182년이다.
환국에 오훈五訓이 있고 배달에 오사五事가 있었다.
이른바 오훈이란,
첫째, 매사에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여 거짓이 없게 하고,
둘째, 공경하고 근면하여 게으름이 없게 하고,
셋째, 효도하고 순종하여 거역하지 말고,
넷째, 청렴하고 의를 지켜 음란하지 말고,
다섯째, 겸양하고 화평하게 지내어 싸움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른바 배달의 오사란,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왕명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猪加는 질병을 주관하고,
양가羊加(혹은 계가鷄加)는 선악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4. 환桓의 뜻과 광명신앙
환국주桓國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桓은 온전한 하나됨[全一]이며 광명이다.
온전한 하나 됨이란 삼신의 지혜와 권능이고,
광명은 삼신이 지닌 참된 덕성이니, 곧 우주 만물보다 앞선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 풍속에 광명을 숭상하여 태양을 신으로 삼고, 하늘을 조상으로 삼았다.
만방의 백성이 이를 믿어 서로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경배함을 일정한 의식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모인 곳으로 삼신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그 광명을 얻어 세상 일을 하면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모두 함께 동산東山에 올라 갓 떠오르는 해를 향해 절하고,
저녁에는 모두 함께 서천西川으로 달려가 갓 떠오르는 달을 향해 절하였다.
이에 앞서 환인께서는 태어나면서 스스로 깨달은 분이시다.
오물五物을 기르고, 오훈五訓을 널리 펴고, 오사五事를 주관하여 다스리셨다.
오가와 무리가 모두 부지런히 애쓰거늘, 수행修行을 통해 지극한 선에 이르게 하시고,
광명으로 지혜를 열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상서롭게 하시며,
세상에서 유쾌하고 즐거이 살게 하셨다.
환인께서는 높고 높은 하늘[上上天] 나라에 임어해 계시며
오직 온 천하가 모두 저절로 화평해지기를 간절히 생각하시니,
이때에 백성이 환인을 천제(천상 상제님)의 화신이라 부르며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었고, 구환의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었다.
신시본기-전문
1. 배달 개창기의 취화법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掌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縠 벼슬을 맡았으나, 당시 씨 뿌리고 거두는 법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또 불씨[火種]가 없어 걱정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높고 큰 나무가 말라 황량하게 줄기를 드러내고 오래된 나무 줄기와 말라버린 가지가 서로 얽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거센 바람이 숲 속에 불어닥치니, 땅 위의 크고 작은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고 오래된 나무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번쩍번쩍 빛나며 잠깐 일더니 곧 꺼졌다. 이에 문득 깨닫고 말하 기를, "이것이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는 방법이로다" 하고,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나뭇가지를 마찰하여 불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을 일으키는 방법이 불편하였다.
다음날 다시 높고 큰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러 이리저리 배회하며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줄무늬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고시가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빗나가 바위 귀퉁이에 맞고 불이 번쩍 일어났다. 이에 몹시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금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었다. 이로부터 백성이 음식을 불에 익혀 먹게 되었다. 쇠를 녹이고 단련 하는 기술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여 물건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2. 태고 문자의 창시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書契]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 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평평하게 모래가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와 같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 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다만 그 후로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태고 문자가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구조가 쓰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찍이 남해도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등과 그 외 지역의 암석에 문자가 조각된 것이 간혹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문자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전서篆書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성하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럽다.
3. 배달족의 문명화 과정과 동이 명칭의 유래
[초대 풍백, 우사, 운사의 사명과 공력]
환웅천황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비록 새, 짐승, 벌레, 물고기의 해는 없애게 하셨으나, 그래도 사람들은 아직 동굴과 움집 속에서 거처하였다. 땅의 습기와 바깥바람의 기운이 사람에게 침범하여 질병을 일으키고, 또 금수와 벌레와 물고기 무리가 한 번 쫓겨난 뒤로 점차 인간을 피해 숨어버려 잡아먹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사雨師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이 살 집을 짓고, 소와 말, 개, 돼지, 독수리, 호랑이 같은 짐승을 잡아 길러서 이용하게 하셨다.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를 시켜 '남녀가 혼인하는 법'을 정하게 하시고, 치우治尤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직책'을 관장하게 하셨다.
[치우천황의 위무와 동이 명칭의 유래]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14세 환웅)천황이 등극하여 구치(채광 기계)를 만들어서 구리와 철을 캐시고, 철을 단련하여 칼과 창과 큰 쇠뇌(弩)를 만들게 하셨다. 사냥을 가거나 전쟁을 할 때 이것에 신처럼 의지하니, 주위 모든 부족이 대궁大弓의 위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진 지 오래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 민족을 '이夷'라 불렀다. 설문해자에 이른바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를 합한 자(大+弓)로 '동방 사람[東方人]을 뜻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을 때 이夷라는 명칭을 융적戎狄과 함께 오랑캐의 칭호로 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4. 이주족인 웅족의 정착과 환족으로의 귀화
삼성밀기三聖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強族]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삼신三神의 도로서 가르침을 베푸시고[乃以三神設敎] 백성을 모아 맹세하게 하시니, 이때부터 은밀히 그 강족을 제거하려는 뜻을 두셨다.
[환족과 웅족의 연합]
당시 부족 호칭이 통일되지 않고 풍속은 점점 갈라졌다. 원주민은 호족虎族이고, 새로 이주해 온 백성은 웅족熊族이었다. 호족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직 약탈을 일삼았고, 웅족은 성품이 고집스럽고 우둔하여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두 부족이 비록 한 고을에 살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원해져서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 주지 않았고 혼인도 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서로 승복하지 않아, 한 길을 같이 간 적이 없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웅족 여왕[熊女君]이 환웅천황께서 신령한 덕이 있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 천황을 뵙고 "원컨대 살 터전을 내려 주시어 저희도 한결같이 삼신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이를 허락하시고 살 곳을 정해주시어 자식을 낳고 살게 하셨다. 그러나 호족은 끝내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四海 밖으로 추방 하시니, 환족의 흥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 초대 거발환 환웅의 동방 문명 개척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람은 많고 물자는 적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였더니, 서자부庶子部의 대인 환웅이 민정을 두루 살펴 듣고 천계에서 내려와 지상에 광명 세상을 열고자 하셨다. 이때 안파견 환인(7세 지위리 환인)께서 금악산金岳山과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을 두루 살펴보시고, "태백산은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환웅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간과 만물이 제자리를 잡았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를 거느리고 몸소 하계에 내려가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 부권父權을 세우라.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평화롭게 하나 되게 하여 사도를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자손만대의 홍범으로 삼을지어다." 하셨다. 그리고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시고 세상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셨다.
환웅께서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한다. 또한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 · 왕명 · 형벌 · 질병 · 선악을 주장하게 하시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신교의 진리로써 정치와 교화[在世理化]를 베풀어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웅족이 신교 문화의 광명 정신으로 교화됨]
이때 웅족과 호족[一熊一虎]이 이웃하여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와서 기도하며 환웅께 "하늘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환웅께서 신령한 주문[神呪]으로 체질을 개선시켜 신명을 통하게 하셨다. 또 삼신이 내려 주신 물건으로 신령한 삶을 얻게 하시니, 바로 쑥 한 단과 마늘 스무 개였다. 그리고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 그리하여야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르게 구제하며, 진정한 사람다운 인격을 갖춘 대인이 되리라" 하셨다.
웅족과 호족 양가는 이것을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삼가며 스스로 수련에 힘썼다.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와 고통을 참으며 하늘의 계율을 준수하고 환웅과 한 언약을 지켜서 건강한 '여자의 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거짓과 태만으로 하늘의 계율을 어겨 끝내 천업天業을 함께 이루지 못하였다. 이것은 두 부족의 천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웅씨족 여성들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음이 지나쳐서 이들과 혼인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매양 신단수 아래에 함께 모여 주문을 읽으며 아기를 가져 환웅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임시로 이들을 환족 백성으로 귀화시켜 살 곳을 주시고[得管境] 환족 남자와 혼인하게 하여 자녀를 낳게 하시니, 이로부터 모든 남녀가 점차 인륜의 도를 얻게 되었다.
[고조선 시대의 통치 영역]
그 후 단군왕검이라 불리는 분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이때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시니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할 영토였다.
6. 신교의 제사 문화와 책력의 기원: 칠회제신력
신시 시대에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 있었다. 첫째 날에 천신天神(삼신 상제님)께, 둘째 날에 월신月神께, 셋째 날에 수신水神, 넷째 날에 화신火神께, 다섯째 날에 목신木神께, 여섯째 날에 금신金神께, 일곱 째 날에 토신土神께 제사지냈다. 책력을 짓는 방법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계해癸亥를 쓰다가, (5세) 구을단군께서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쓰시고 10월을 상달[上月]로 삼으시니 이것이 한 해의 처음[歲首]이 되었다. 6계六癸는 신시(배달) 환웅[神市氏]께서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지은 것으로 그때부터 계癸로써 첫머리를 삼았다. 계癸는 계啓의 뜻이며, 해亥는 핵核(씨, 종자)의 뜻이니 '해가 뜨는 뿌리[日出之根]'라는 말이다.
[10천간과 12지지의 본래 뜻]
그러므로 계癸는 소라蘇羅요. 갑甲은 청차이清且伊, 을乙은 적강赤剛, 병丙은 중림仲林, 정丁은 해익海弋, 무戊는 중황中黃, 기己는 열호수烈好遂, 경庚은 임수林樹, 신辛은 강진強振, 임壬은 유불지流不地이다.
또 해亥는 지우리支于離요. 자子는 효양曉陽, 축丑은 가다加多, 인寅은 만량萬良, 묘卯는 신특백新特白, 진辰은 밀다密多, 사巳는 비돈飛頓, 오午는 융비隆飛, 미未는 순방順方, 신申은 명조鳴條, 유酉는 운두雲頭, 술戌은 개복皆福이다.
7. 인류 전쟁의 시초
신시 환웅께서 처음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산에는 길이 없고 못에는 배와 다리가 없었으며, 금수는 무리를 이루고 초목이 무성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어울려 함께 살았고, 만물과 무리지어 같이 살았다. 짐승 떼에 굴레를 씌워 놀고 까마귀와 까치의 둥지에 기어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때로 짐승의 피와 고기를 이용하였다. 옷을 짓고 농사지어 먹으며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사니 이때를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는 세상[至德之世]'이라 일렀다. 백성이 살면서도 할 일을 모르고, 다니면서도 갈 곳을 모르며, 행동은 느리고 만족하며, 보는 것은 소박하고 무심하였다. 오직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지면 쉬니, 하늘의 은택이 넘쳐흘러 궁핍을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만물과 백성이 더욱 번성하자 소박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로이 일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게 되어 비로소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짓는 자는 이랑을 두고 다투고 고기잡는 자는 구역을 두고 다투어, 싸워서 얻지 않으면 궁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류의 전쟁은 하늘의 뜻인가?]
그 후에 활과 쇠뇌가 만들어지자 새와 짐승이 숨고, 그물이 펼쳐 지자 물고기가 숨어 버렸다. 심지어 창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며 피를 뿌리고,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지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선천의 상극질서) 본래 그러했기 때문[天意固然]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환족의 서방 영토 개척]
지금 인류의 근원을 상고해 보면 모두 한 뿌리의 조상[一源之祖]이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동서로 나뉘면서 각기 한 곳에 웅거하고 지역의 경계가 아주 단절되어 사람이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수렵하고 나무를 채벌하는 외에 다른 험난한 일이 없었다. 수천 년이 지나고, 세상 판도가 이미 변하자 중국[仲國]은 당시 서쪽 땅[西土]의 보고였다. 기름진 땅이 천 리요, 기후가 좋아 우리 환족이 그 땅에 이주할 때 앞을 다투어 나아갔고, 토착민도 몰려들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자기 편이면 돕고, 뜻을 달리하면 원수처럼 여겨 싸움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만고 전쟁의 시초이다.
8. 5세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
환웅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환웅이 계셨다.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반드시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잘 기르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장생의 법방이다.
[삼신의 성령을 받고 우주 삼계를 통한 태호복희]
태우의환웅의 아들은 열둘이었는데 맏이는 다의발多儀發환웅이시요. 막내는 태호太皞이시니 복희伏羲라고도 불렀다. 태호복희씨가 어느 날 삼신께서 성령을 내려 주시는 꿈을 꾸고 천지만물의 근본 이치를 환히 꿰뚫어 보시게 되었다. 이에 삼신산三神山에 가시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掛圖를 얻으셨다. 그 획은 세 개는 끊어지고[三絶] 세 개는 이어지는[三連] 음양 원리로 이루어졌다. 그 위치를 바꾸어 추리함은 오묘하게 삼극三極과 부합하여 변화가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神市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직책을 대물림하셨다. 후에 청구, 낙랑을 지나 진陳 땅에 이주하여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쪽 땅[西土]에서 나라를 세우셨다. 그 후예가 풍산風山에 나뉘어 살면서 역시 풍風으로 성을 삼았다. 후에 패佩· 관觀·임任 · 기己 · 포庖 · 리理 · 사姒 · 팽彭의 여덟 씨족으로 나뉘어졌다. 지금의 산서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주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임任 · 숙宿 · 수구須句 · 수유須臾 등의 나라가 모두 에워싸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관직을 맡으셨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도掛圖를 만들고, 신시 시대의 계해癸亥를 고쳐 갑자甲子로 첫머리를 삼으셨다. 여와女媧(복희의 여동생)는 복희의 제도를 계승하고, 주양朱襄은 옛 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세상에 전하였다. 복희씨의 능은 지금의 산동성山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 남쪽에 있다.
[동양의학과 농사의 시조인 신농씨의 혈통]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창업을 하셨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시고, 소전은 소호少皞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失氏의 방계 자손이시다. 당시 백성이 정착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하여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다. 곡식과 삼을 많이 생산하고, 각종 의약과 치료법[藥石]도 점점 갖추어지자, 한낮에 저자(시장)를 열어 교역을 하고 돌아갔다.
9. 14세 치우천황의 서쪽 영토 대정벌
유망楡罔에 이르러 정치의 속박이 가혹해지자 여러 읍락이 사이가 나빠져 백성이 많이 흩어지고, 세상살이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 치우천황께서 배달 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치실 때,
하늘의 뜻을 밝혀 생명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開天知生]
땅을 개간하여 뭇 생명을 다스리게 하시고[開土理生]
사람의 마음을 열어 생명을 존중하게 하시니[開人崇生],
백성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그분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역량이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시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 북쪽[河朔]에 웅거하여 안으로 군사를 용맹하게 조련하고 밖으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셨다.
[탁록 대정벌과 12제후국 병합]
유망의 정치력이 쇠약해지자 치우천황께서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셨다. 형제와 부계 일족[宗黨]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인물 81명을 뽑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하시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 칼과 갑옷과 창과 큰 활과 호시楛矢(싸리나무로 만든 화살)를 많이 제작하셨다. 그리고 전군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여 탁록涿鹿을 함락시키고, 구혼九渾에 올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셨다. 그 형세가 자못 질풍과 같아 만군을 복종시키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셨다. 1년 사이에 아홉 제후의 땅을 함락시키고, 다시 옹호산雍狐山 나아가 구치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쌍날창(예과芮戈)과 옹호의 갈래창(극戟)을 만드셨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거느리고 양수洋水로 출진하여 빠르게 공상空桑까지 진격하셨다. 당시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 유망의 도읍지였다.
[유망과 소호 정벌]
이 해에 치우천황이 12제후의 나라를 모두 병합하실 때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니, 서토西土(지금의 중국땅)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楡罔이 소호少昊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예과와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울 때,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혼미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하니 소호少昊가 대패하여 황급히 공상空桑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다. 치우천황이 즉시 하늘에 제사 지내어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여 고하시고, 다시 진군하여 탁록涿鹿을 포위 압박하여 일거에 멸망시키셨다. 관자管子에 '천하의 임금 곧 치우천황이 급작스럽게 싸우며 한 번 노하심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10. 헌원을 토벌하여 신하로 삼다
[중화문명의 발상지 탁록]
이때 공손公孫 헌원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천황께서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병마를 크게 일으켜 치우천황과 승부를 겨루려 하였다. 천황께서 항복한 장수 소호少昊를 먼저 보내 탁록涿鹿을 포위하여 멸하려 하실 때, 헌원이 오히려 항복하지 않고 감히 수 많은 전쟁에 나섰다.
천황께서 9군九軍에 명하여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시고,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탁록의 유웅有熊 들판에서 여러 번 헌원과 맞붙어 싸울 때,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조이면서 참살하시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시니, 적군은 두렵고 손이 떨려 바쁘게 도망쳐 백 리 안에 병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수淮水, 태산泰山 땅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시고 회대淮岱(회수와 태산)에 집을 지으시니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체로 당시 서쪽 땅의 사람들은 한갓 화살과 돌팔매[矢石]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치우천황의 뛰어나고 강력한 법력에 부딪혀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 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탁록의 10년 대전쟁]
운급雲笈의 헌원기軒轅記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이라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적의 낭패가 얼마나 심하였겠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치우천황이 더욱 군용을 정비하여 사방으로 진격하셨다. 10년 동안 헌원과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는 물러날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번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군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우리 배달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싸움마다 출전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불같이 진노하여 형제 종족으로 하여금 대격전에 힘써 싸우게 하여 위엄을 확고히 세우셨다. 그리하여 헌원의 군사로 하여금 감히 추격하거나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시고, 더불어 대전을 치뤄 한바탕 몰아쳐서 휩쓸어 버리신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치셨다.
[사마천 사기의 비열한 역사 왜곡]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급히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히도 전쟁터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금살치우擒殺蚩尤]"라고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천황께서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시니, 적진이 마침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 예芮와 탁涿을 지키게 하시고, 동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취하여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쪽으로 침투할 길을 막으셨다. 천황께서 붕어하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진실로 길이 남을 찬란한 그 위엄이 후세인의 가슴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11. 치우천황릉의 위치와 천황에 대한 서방 한족의 전설적 추앙
치우기의 전설과 유래
지금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鄉城에 있으며, 높이는 7장丈 이라 한다. 진한秦漢 시대에 주민들이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진홍색 비단처럼 펼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아마도 그분의 영웅적인 기백은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헌원軒轅은 이 뒤로 쇠미해졌고, 유망楡罔도 따라서 영구히 몰락하였다. 치우천황蚩尤天王의 웅렬하심은 대대로 온 천하를 진동시켰다. 특히 유주幽州, 청주靑州지방에서 그 명성과 위엄이 지속되니, 헌원 이래 대대로 스스로 불안하여 그 치세가 끝날 때까지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 길을 내어도 편안히 안주하지 못하고, 탁록의 강가에 도읍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정한 곳에 살지 못하며, 항상 군사로 보호하여야 했다”하였으니, 헌원이 얼마나 전전긍긍하였는지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 또한 이르기를, "옛 가르침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라고 했으니, 저들이 치우천황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기운을 잃고, 대대로 이 교훈을 전하여 후인을 크게 경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고, 다만 전욱顓頊과 한 번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척하여 새 시대를 여시고 18세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다. 바야흐로 단군왕검께서 웅씨 비왕裨王으로 신시 배달을 대신하여 구족이 사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시고 강역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니[三韓管境] 이를 일러 단군조선이라 한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희께서 서쪽 변방에 봉함을 받아 직책에 정성을 다하시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그 지역 백성이 감화되어 따랐다.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하여 영토 밖까지 호령하셨다. 후에 갈고환웅葛古桓雄(10세)께서 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시니 공상空桑의 동쪽이 우리 땅으로 귀속되었다.
세속에 전해 오는 '치우' 의 뜻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慈烏支환웅(14세)에 이르렀다. 이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하셨다. 능히 짙은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飛石迫擊之機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雄圖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와 태산 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12. 배달과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
[신교의 3도 정신과 성·명·정과 진·선·미의 실현 문제]
대변경大辯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시씨神市氏(배달 초대 환웅)는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닦아修戒 사람들에 제천祭天을 가르치셨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의 본래 온전한 바탕을 따라 능히 본성에 통해[通性] 참됨眞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靑邱氏(14세 치우천황)는 선仙의 도로써 법을 세워設法 사람들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법[管境]를 가르치셨다. 선仙이란 사람이 본래 저마다 타고난 바를 따라서 자신의 영원한 생명력을 깨달아[知命] 널리 선善을 베푸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단군왕검)는 종倧의 도로써 왕을 세워建王 사람들에게 책화[責禍]를 가르치셨다. 종倧이란 사람이 스스로 으뜸 되는 바에 따라 정기를 잘 보존[保精]하여 아름다움美을 실현하는 것이다.
[삼신과 삼재 [天·地·人]와 우주 본체인 삼극의 관계]
그러므로 (이러한 전佺과 선仙과 종倧의 도道 가운데)
전佺은 텅 빈 자리로 천도天道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광명 자리로 지도地道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천지 도덕의 삶을 실현하는 강건한 자리로 인도人道에 근본을 둔다.
13.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대변경의 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큼[大], 하나[一]라는 뜻이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환, 단, 한의 의미]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桓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 우사· 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14. 개천·개인·개지의 뜻
성인을 보내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일러 개천開天이라 하니, 하늘을 열었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이 세상이 하늘의 이법(천리)과 부합되어 하나로 조화되는 것[虛粗同體]이다.
인간의 본래 성性(인간 속에 있는 삼신의 마음)을 여는 것을 개인開人이라 하니,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열어 주기 때문에 세상일이 잘 순환하게 된다. 이로써 형체와 함께 영혼이 성숙해 가는 것[形魂俱衍]이다.
산을 다스려 길을 내는 것을 일러 개지開地라 하니, 땅을 개척하기 때문에 능히 때에 알맞은 일을 지어서 세상일이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개척의 삶을 통해 지혜를 함께 닦게[智生雙修] 된다.
15. 한민족 역사 속의 백두산의 의미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거대한 산악이 광활한 대지 가운데 장중하게 자리잡아 가로로 천 리를 뻗고, 높이는 2백 리를 우뚝 솟았다. 웅장한 고산준령이 꿈틀거리며 널리 덮어 배달 천국의 진산鎮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곳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妙香山이 단지 낭림산맥이 서쪽으로 뻗은 맥에 매여 있다는 사실 하나로 환웅천황께서 강림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속에서 묘향산妙香山을 태백산太白山이라 한다면, 그 소견은 동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 땅에 국한시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산의 조종은 곤륜산崑崙山이라 하여,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를 기꺼이 감수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수백 년이 지났으되 오히려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는 글을 폐하고 크게 통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지금 동방의 여러 산 가운데 태백산太白山으로 불리는 곳이 자못 많다. 세속에서는 대개 영변의 묘향산妙香山으로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실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의 눈알이 마치 콩알 같고 팥알 같으니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요,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 곳을 천지天池라 부르는데, 바로 환웅 신시씨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妙香山은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 없고,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도 아니니 거론할 것도 없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에서는 태황산太皇山이라 부른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 오줌을 누지 아니하고, 산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가져간 물건을 담아 갔다.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오신 곳이 이 산이다. 또 이곳은 신주神州(배달)의 왕업이 흥한 신령한 땅이니, 소도蘇塗에서 제천祭天하는 옛 풍속은 필시 이 산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리고 예로부터 (동방으로 이주한) 환족桓族이 삼신상제님을 숭배하고 공경함이 또한 이 산에서 비롯하였으니 평범한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금수조차 모두 신령한 감화에 젖어 이 산에서 편안히 살며 일찍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였다. 사람도 이 산에 올라 감히 오줌을 누어 신神을 모독하지 않았으니, 만세에 걸쳐 항상 공경하고 수호하는 표상이 되었다.
16. 삼신산과 동북방의 광명 정신
우리 환족은 모두 신시 배달 환웅께서 거느린 무리 3천 명의 후손이다. 후세에 비록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으나 실로 환단일원桓檀一源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시 환웅께서 처음 강세하신 공덕을 반드시 후세에 전하고 입으로 외고, 잊지 말아야 하니 선왕선민先王先民이 옛날 삼신께 제사 지내던 이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三神山이라 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신시 환웅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의 은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 갔다. 나라를 세워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근본이 다른 나라와 판이하게 달라 우리의 신이한 기풍과 거룩한 풍속이 멀리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 이에 천하만방의 백성 중에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를 흠모하는 자는 반드시 삼신三神을 숭배하였고, 동북방東北方을 신명神明이 머무는 곳이라 일컬었다.
삼신산이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불린 이유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사실이 잊혀지고) 폐단이 생겨나 점점 근거 없고 허황된 길로 빠져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괴이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연燕, 제齊 두 나라의 바닷가에 사는 괴짜 방사들에게서 번갈아 나왔다. 그 땅이 구환九桓, 신시神市와 서로 인접하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특히 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풍문으로만 듣고도 기이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다시 미루어 부연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삼신산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하여 당시의 임금을 미혹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동쪽 바닷가에 이르러 바라보니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여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툭하면 "삼신산 역시 발해 가운데에 있다" 운운하나, 사실 삼신산은 각각 세 섬[三島]에 있는 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봉래蓬萊는 쑥대가 우뚝우뚝 자라고 묵은 풀이 길에 황량하게 우거진 곳이라는 뜻으로 곧 천황이 내려오신 장소요, 방장方丈은 사방이 일 장씩 되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곧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요, 영주瀛洲는 바다가 섬에 둘러싸인 모습이니 곧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다. 이를 총괄하여 삼신산三神山이라 한다. 삼신은 곧 한 분 상제님[三神卽一上帝]이시다. 그렇건만 더욱 황당하고 괴이한 것은 삼신의 본래 의미조차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금강산金剛山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漢拏山을 영주산瀛洲山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 있는데 일찍이 그곳에 가 본 자가 있고, 뭇 신선과 불사약이 그곳에 있으며, 그곳의 사물과 금수禽獣는 모두 희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한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신산에 환혼초還魂草와 불로초不老草등이 자라므로 일명 진단眞丹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부터 흰 사슴, 흰 꿩, 흰매 등이 있었다. 괄지지括地志에 “새와 짐승과 초목이 다 희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이 많이 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불로초라 여겼다. 산사람이 산삼을 캐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뒤에 산행을 떠나니, 환혼 · 불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생각컨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단군세기에 이르되, “오사구단군(4세) 원년에 임금께서 북쪽을 순수하시다가 영초靈草를 얻었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또한 그 증거이다.
삼신산은 태백산, 곧 백두산이다
10월에 천제를 지내는 풍속은 마침내 천하만세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풍속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주神州에만 있는 독특하고도 성대한 의식으로 다른 나라와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이 홀로 곤륜산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도다. 옛날의 삼신산三神山은 곧 태백산太白山이고,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이다. 그 옛날 배달 때의 인문 교화가 근세에 와서 비록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나,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세까지 전해져 온 나라의 남녀가 모두 은연 중에 믿고 받들며,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三神께서 주관하신다" 하고, 열 살 안 된 어린아이의 신명의 안위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뛰어남과 용렬함을 모두 삼신三神께 맡겼다. 대저 삼신三神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일신一神 하느님이시다.
17. 중국 한족에게 전파된 삼신상제님 신앙
옛적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漢나라 왕 유철劉徹[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겸양하시어 (봉선을 하기 위해) 출발하지 않으시니 이는 삼신三神의 환심을 끊으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위소韋昭의 주에 "삼신三神은 상제上帝님이시다"라고 하였으니, 삼신설三神說이 일찍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
동방 문명의 신교와 제나라의 팔신제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으니, 팔신은 천주天主·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므로 반드시 높은 산 아래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 지내는데,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던 유법이다.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반드시 못[澤] 가운데 모난 언덕에서 제사 지내는데, 또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하던 풍속이 전해진 것이다. 천주天主는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내고, 병주兵主는 치우蚩尤천황께 제사를 지내니, 삼신三神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시고, 치우蚩尤는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비조이시다.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부리시고 또 만세 도술의 종장[道術之宗]이 되어 풍우風雨를 부르고, 만신萬神을 부르셨다. 이 때문에 상고 시대에 항상 천하 군무의 주장[天下戎事之主]이 되셨다. 해대海岱지방에 엄奄· 남藍· 개介· 우嵎· 내萊· 서徐· 회淮 팔족이 살았는데, 팔신설八神說이 이 팔족八族에서 생겨 당시에 성행하였다.
한고조 유방이 숭경한 치우천황
유방劉邦은 동이 계통은 아니지만 풍패豐沛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풍패에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유방은 이 풍속에 따라 치우천황께 제사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다. 드디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진泰의 수도)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어 10월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의 역법을 답습한 것이지만 동황태일東皇太一을 숭상하고 경배하며 치우천황께 지극한 공정심으로 제사 지낸 것과 연관이 있다. 4년 후에 진나라 땅을 평정하고 축관祝官(제사를 담당한 관원)에게 치우 사당을 장안長安에 짓게 하였으니,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혜성의 주재자는 치우천황
진서晋書의 천문지天文志에 "치우기蚩尤旗는 혜성慧星(살별)과 비숫하나 뒤가 굽어 그 모습이 깃발과 같고, 이 별이 나타나는 지방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치우천황이 천상에서 별의 주재자가 된 것이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창힐蒼頡과 고신高辛이 다 치우의 후손으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산동, 회수 북쪽에 옮겨 살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풍채와 굳세고 맹렬한 기상이 아주 멀리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방사들이 신비하고 이상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현혹된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제齊 위왕威王과 연燕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三神山을 찾았는데, 진한秦漢 때에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선문자고羨門子高와 최후最後 같은 무리는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 오리悟利, 공손경公孫卿, 신공申公 같은 무리는 다 제나라 사람이다.
18. 동방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전파한 강태공
중국 주나라에 영향을 끼친 신교 문화
옛날 여상呂尙(강태공) 역시 치우의 후손이다. 그래서 성이 강姜인데,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낳은 아들이 모두 강씨姜氏가 되었다. 강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도술道術을 수련하고 천제지天齊池에서 천제를 올렸다. 또한 제齊에 봉토를 받으니 팔신八神의 풍속이 제나라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후에 그 땅에 도술을 좋아하는 자가 많이 나와 신선 황로黃老(황제와 노자)와 뒤섞이고 부연하여 더욱 풍속을 윤색시켜 놓았으니, 이것은 강태공이 그 풍속을 장려했 기 때문이다.
중국 한족 문화에 전수된 신교의 도통
일찍이 강태공이 음부경주陰符經注를 지어 자부紫府 선생의 삼황내문의 뜻을 조술祖述하였으니 연나라, 제나라 선비가 어찌 괴이하고 허황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또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黄帝中經이 부루태자(2세 단군)에게서 나와 우虞 사공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洪範九疇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대저 그 학문은 본래 배달 신시 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19. 삼신을 수호하는 벼슬 삼랑
강화도 혈구 삼랑성의 뜻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장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고인돌)으로 표시를 하였다. 이것이 후에 변하여 단壇이 되었는데,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夕壇이라 불렀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城壇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土壇을 쌓은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의 승려들은 이를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壇이라 칭하는데, 옛날 우리의 고유한 법이 아니다.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郎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郎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말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郎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 신도[發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郎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郎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郎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절을 지어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것은 승려들이 옛 풍속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이요,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또 "승도儈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때의 능묘 법제는 천하의 으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백성이 계곡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곳에 장사 지내지 않았다. 위로 국왕부터 모두 동굴에 옮겨 천신과 짝하여 제사를 지내다가 후에는 더러 평지에 장사 지내고, 박달나무 · 버드나무 · 소나무 · 잣나무를 빙 둘러 심어 표시를 해 두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신시 시대에는 능묘陵墓 제도가 없었다.
그 후 중고中古 시대에 이르러 국가와 부족이 강성하여 사는 것이 풍족해지자 장사 지내는 것도 사치스럽게 되었다. 예로써 제사를 지내고, 묘지도 성대하게 단장하여 둥글거나 혹은 모나게 하고 사치스럽게 장식을 덧붙였다. 높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방정하여 일정한 법이 있었고, 내벽과 외분이 모두 잘 정비되고 꾸며졌다. 이후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능묘의 법제가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단군세기-전문
[[[국조단군왕검 재위 93년]]]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시요, 어머니는 웅씨왕熊氏王의 따님이다. 신묘(환기 4828, 신시개천 1528, BCE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태어나시니,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원근 사람들이 모두 경외敬畏하여 따랐다. 14세 되던 갑진(신시개천 1541, BCE 2357)년에 웅씨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천거하여 ‘대읍국大邑國*’의 국사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무진년 당요唐堯때에 단국檀國에서 돌아와 아사달의 박달나무가 우거진 터에 이르시니 온 나라 백성이 천제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구환족九桓族을 합쳐서 하나로 통일하시고 신성한 덕화가 멀리까지 미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성조께서 비왕으로 24년, 제왕으로 93년 동안 재위하셨고 그 수壽는 130세였다.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은 무진(환기 4865, 신시개천 1565, 단기 원년, BCE 2333)년이다. 신시 시대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는 사방에서 백성이 모여 들어 산골짜기 곳곳에 퍼져 살았는데, 풀로 옷을 지어입고 맨발로 다녔다.
배달 신시 개천開天 1565(단기 원년, BCE 2333)년 10월[上月]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 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셨다 [봉제우삼신奉祭于三神].
왕검께서 지극히 신성한 덕성과 성스러움을 겸한 인자함으로 능히 선대 환인, 환웅 성조의 가르침을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繼天]하시니 그 공덕이 높고 커서 찬란하게 빛났다.
이에 구환의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천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이시다. 왕검께서는 신시 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시고 그 이름을 조선朝離이라 하셨다.
[단군왕검의 8대 강령]
단군왕검께서 조칙을 내려 말씀하시니 이러하다.
제1조: 하늘의 법도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이 오직 순수한 정성으로 다져진 일심을 가져야 하느님(상제님)을 뵐 수 있느니라[朝天]
제2조: 하늘의 법도는 항상 하나이며, 사람 마음은 똑 같으니라.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라. 사람들의 마음과 잘 융화하면, 이는 하늘의 법도에 일치하는 것이니 이로써 만방을 다스릴 수 있게 되리라.
제3조: 너를 낳으신 분은 부모요,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오직 너희 부모를 잘 공경하여야 능히 하느님(상제님)을 경배할 수 있느니라. 이러한 정신이 온 나라에 번져 나가면 충효가 되나니, 너희가 이러한 도를 몸으로 잘 익히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벗어나 살 수 있으리라.
제4조: 짐승도 짝이 있고 헌신도 짝이 있는 법이니라. 너희 남녀는 잘 조화하여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음행하지 말지어다.
제5조: 너희는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라. 그 아픔에 차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여 헐뜯지 말며, 서로 돕고 해치지 말아야 집안과 나라가 번영하리라.
제6조: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오히려 먹이를 나누어 먹나니, 너희는 서로 양보하여 빼앗지 말며, 함께 일하고 도적질하지 않아야 나라와 집안이 번영하리라.
제7조: 너희는 저 호랑이를 보아라. 강포하고 신령하지 못하여 재앙을 일으키느니라. 너희는 사납고 성급히 행하여 성품을 해하지 말고 남을 해치지 말며, 하늘의 법을 항상 잘 준수하여 능히 만물을 사랑하여라. 너희는 위태로운 사람을 붙잡아 주고 약한 사람을 능멸하지 말 것이며,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비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지어다. 너희가 이러한 원칙을 어기면 영원히 신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몸과 집안이 함께 망하리라.
제8조: 너희가 만일 서로 충돌하여 논밭에 불을 내면 곡식이 다 타서 없어져 신과 사람이 노하게 되리라. 너희가 아무리 두텁게 싸고 덮는다 해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느 니라. 너희는 타고난 본성을 잘 간직하여 사특한 생각을 품지 말고, 악을 숨기지 말며,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니지 말지어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야 너희들의 복록이 무궁하리라.
너희 오가와 백성들아! 나의 말을 잘 받들지어다.
이때에 단군왕검께서 어명을 내려 팽우彭虞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며,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다. 기성奇省에게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며, 희羲에게 괘서卦筮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兵馬를 담당하게 하셨다.
비서갑裵西岬에 사는 하백의 따님[河伯女]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맡게 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재위 50년 정사(단기 50, BCE 2284)년에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게 되었다. 왕검께서 풍백風伯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높은 산과 큰 하천을 잘 정리하여 백성이 편안히 거처하게 하셨다. 우수주牛首州에 이 내용을 기록한 비碑가 남아 있다.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摩瑞山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塹城檀이 곧 그것이다.
재위 67년 갑술(단기 67, BCE 2267)년에 왕검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순虞舜(순임금)이 보낸 사공司空(우禹를 말함)과 도산途山에서 만나게 하셨다. 태자께서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五行治水之法]’을 전하시고, 나라의 경계를 살펴 정하시니 유주, 영주 두 주가 우리 영토에 귀속되고,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실 때 우순을 시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셨다.
재위 93년 경자(단기 93, BCE 2241)년에 왕검께서 버드나무로 지은 궁궐에 머무실 때 흙 계단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풀이 우거졌으나 베지 않으셨고, 박달나무[壇木]가 무성한 그늘 밑에서 곰과 호랑이와 더불어 노니시고 소와 양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정경을 바라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며,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시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익히게 하셨다. 백성에게 남아도는 물자가 있으면 나라 살림에 보태어 쓰게 하셨다.
상달 10월에 나라에 큰 제전을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上月察天], 온 백성이 진실로 밝은 모습으로 즐거워하였다. 이로부터 단군왕검의 덕화德化가 온 누리를 덮어 멀리 탐랑까지 미쳤고, 성덕聖德의 가르침은 점차로 위세를 얻어 널리 퍼져 나갔다. 이에 앞서 왕검께서 천하의 땅을 일정한 지역으로 경계를 정해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셨다. 삼한에는 모두 5가五家 64족六十四族이 있었다.
이 해(환기 4957, 신시개천 1657, 단기 93, BCE 2241)3월 15일에 단군왕검께서 봉정逢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 십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모든 백성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고 단기檀旂를 받들어 아침저녁으로 모여 앉아 경배하며 항상 단군왕검의 덕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았다. 태자 부루께서 즉위하셨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부루 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축(환기 4958, 신시개천 1658, 단기 94, BCE 2240)년이다. 임금께서 어질고 복이 많아서 재물을 많이 쌓아 큰 부를 누리셨다.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매년 봄가을에 나라 안을 순행하여 살피고,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모든 제후의 선악을 살피고 상벌을 신중히 하셨다. 도랑을 파고,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며, 학교를 지어 학문을 일으키시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고 그 명성이 나날이 퍼져 나갔다.
초기에 우순虞舜이 유주와 영주를 남국藍國* 근처에 설치하므로,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 이들을 정벌하여 그곳 왕을 모두 쫓아내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셨다.
신시개천神市開天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 삼신상제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화합하였다. 「어아於阿」를 음악으로 삼고 감사함을 근본으로 하여 하늘의 신명과 인간을 조화시키니 사방에서 모두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參佺械가 되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 대조신의 크나큰 은덕이사여!
배달의 아들딸 모두
백백천천 영세토록 잊지 못하오리다.
어아 어아
착한마음 큰 활되고 악한 마음 과녁되어!
백백천천 우리 모두 큰 활 줄같이 하나되고
착한마음 곧은 화살처럼 한마음 되리라
어아어아
백백천천 우리 모두 큰 활처럼 하나되어
수많은 과녁을 꿰뚫어 버리리라
끓어오르는 물같은 착한 마음 속에서
한덩이 눈같은 게 악한 마음 이라네
어아어아
백백천천 우리모두 큰 활처럼 하나되어
굳세게 한마음되니 배달나라 영광이로세
백백천천 오랜세월 크나 큰 은덕이시여!
우리 대조선이로세.
우리 대조선이로세.
재위 2년 임인(단기 95, BCE 2239)년에 임금께서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물으셨다. 이에 앞서 소련과 대련은 거상居喪을 잘 하였으니 처음 3일 동안 태만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 게으르지 않았고,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슬퍼하였으며, 3년간 근심으로 지냈다.
이로부터 세상의 풍속이 부모상을 당하면 소련과 대련을 본받아 다섯 달 동안 정상停喪을 하였는데 오래도록 상을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천하의 대성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덕화德化가 널리 퍼짐이 이토록 역말驛馬로 전하는 것처럼 빠를 수 있었겠는가? 소련과 대련은 효자로 알려지고, 공자 또한 이들을 칭송하였다. 무릇 효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이를 널리 펴서 표준으로 삼았다.
재위 3년 계묘(단기 96 , BCE 2238)년 9월에 조칙을 내려 백성들에게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를 덮게 하고[편발개수 編髮蓋首] 푸른 옷[靑衣]을 입게 하셨다. 도량형度量衛을 모두 관官의 표준에 맞게 통일하고, 삼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을 어디서나 똑같게 하셨다. 백성이 서로 속이지 않게 되므로, 원근 사람들이 모두 이를 편하게 여겼다.
재위 10년 경술(단기 103, BCE 2231)년 4월에 토지의 경계를 우물 정井자로 그어 구분하여 전결田結을 정해 주어 백성이 스스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하셨다. 재위 12년 임자(단기 105, BCE 2229)년에 신지神지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재위 58년 무술(환기 5015, 신시개천 1715, 단기 151 , BCE 2183)년에 부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이 날 하늘에 일식日蝕이 있었고, 산짐승이 떼를 지어 산 위에서 울부짖고, 만백성이 목 놓아 통곡하였다.
후에 백성들이 제시를 지낼 때, 집안에 자리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항아리에 독식을 담아 제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부루단지夫婁壇地라 부르고, 업신業神으로 삼았다. 또한 전계佺戒라고도 칭하였는데, 전계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계율을 받아 업주가리業主嘉利가 된다’는 것으로, ‘사람과 그가 이루고자 하는 업業이 함께 온전해진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께서 즉위하셨다.
[[[3세 단군가륵 재위 45년]]]
가륵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해(환기 5016, 신시개천 1716, 단기 152 , BCE 2182)년이다. 5월에 임금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神과 왕王과 종倧과 전佺의 도’를 하문하셨다.
보륵이 엄지손가락을 깍지 끼고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개어 삼육대례를 행하고 진언하니 이러하였다. “신神은 만물을 낳고 각기 타고난 성품을 온전하게 하시니, 신의 오묘한 조화를 백성이 모두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왕王은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자 타고난 목숨을 안전하게 해주시니, 왕이 베푸는 것을 백성이 복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종倧은 나라에서 선발한 스승이요 전佺은 백성이 천거한 스승이니, 모두 이레(7일)를 한 회로 하여 삼신께 나아가 맹세합니다. 세 고을에서 뽑은 사람은 전佺이 되고 구환에서 뽑은 사람은 종倧이 됩니다.
그 도를 말하자면 아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비다워야 하고, 임금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 신하, 제자가 된 사람 역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 합니다.
환웅천황께서 펼치신 신시 개천의 도는 이신시교(以神施敎) 즉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 지아구독 (知我求獨)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공아존물 (空我存物)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을 복되게 할 따름입니다.
천상의 상제님(天神)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는 도를 널리 펴서 백성을 이롭게 하여 한 사람도 자신의 타고난 성품을 잃지 않게 하며,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다스릴 때는 ‘거병해원 (去病解怨) 병을 없애고 원한을 풀어 주어’ 비록 미물이라도 함부로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옵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그릇된 마음을 고쳐 참되게 하고 삼칠일(21일)을 기약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는 계율’을 굳게 지키게 해야 하옵니다. 이로부터 조정에는 종훈倧訓이 서고 민간에는 전계佺戒가 바로 서게 되며 우주 정기가 삼한의 온 천하에 순수하게 모이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의 기운이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응결하게 되어 “현묘한 도를 깨쳐 광명 사상으로 세상을 함께 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거발환의 정신’입니다.” 임금께서 구환족에게 이 가르침을 베푸시니 구환의 백성이 모두 순종하고 삼신의 한마음으로 돌아가 교화되었다.
재위 2년 경자(단기 153 , BCE 2181)년, 이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랐다. 비록 상형 표의 문자인 진서眞書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땅이 백 리가 되는 나라에서는 서로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가륵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글자는 아래와 같다. 재위 3년 신축(단기 154, BCE 2180)년에 신지 고설에게 명하시어 '배달유기'를 편찬하게 하셨다.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BCE 2177)년, 임금께서 열량 욕살 삭정을 약수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재위 8년 병오(단기 159, BCE 2175)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지백특에서 토벌하셨다. 여름 4월에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적은 것을 보시고 조세를 줄이고 차등을 두게 하라고 명하셨다.
재위 10년 무신(단기 161, BCE 2173)년에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라[牛首國]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다를 건너가 삼도를 점거하고 스스로 천황이라 참칭하였다.
재위 45년 계미(환기 5060, 신시개천 1760, 단기 196, BCE 2138)년 9월에 가륵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오사구께서 즉위하셨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오사구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5061, 신시개천 1761, 단기 197, BCE 2137)년이다. 임금께서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셨다. 혹자는 지금의 몽고족의 그 후손이라 말한다.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수巡狩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께 천제를 지내고 영험한 약초를 얻으셨다. 이것이 곧 인삼이며, 선약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신선 불사의 설’이 인삼을 먹어 보정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되었다. 간혹 삼을 캐어 먹은 사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이한 영험이 있어 자못 특이한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재위 5년 무자(단기 201, BCE 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돈[원공패전 圓孔貝錢]을 주조하였다. 이해 가을 8월에 하나라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갔다. 10월에 조야기(朝野記)를 돌에 기록하여 백성에게 공포하였다.
재위 7년 경인(단기 203, BCE 2131)년에 살수 강가에 조선소를 설치하였다.
재위 19년 임인(단기 215, BCE 2119)년에 하나라 5세 왕 상相이 실덕하므로 임금께서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 3부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게 하시니, 천하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복종했다.
재위 38년 신유(환기 5098, 신시개천 1798, 단기 234, BCE 2100)년 6월에 오사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계가 출신 구을丘乙이 즉위하셨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구을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5099, 신시개천 1799, 단기 235, BCE 2099)년이다. 임금께서 태백산에 단을 쌓으라 명하시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재위 2년 계해(단기 236, BCE 2098)년, 5월에 황충이 크게 번져 밭과 들에 가득 찼다. 임금께서 친히 밭과 들을 돌아보며 황충을 잡아 입에 넣어 삼키시고 삼신께 이를 멸해 주시기를 비니 과연 며칠 만에 황충이 전멸하였다.
재위 4년 을축(단기 238, BCE 2096)년에 갑자를 으뜸으로[시용갑자 始用甲子] 사용하여 책력을 만드셨다.
재위 8년 기사(단기 242, BCE 2092)년, 신독(身毒)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가에 도착했다.
재위 16년 정축(단기 250, BCE 2084)년, 임금께서 친히 장당경에 순행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하시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으셨다. 이 해(환기 5114, 신시개천 1814, 단기 250, BCE 2084) 7월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실 때 풍류강을 거쳐 송양에 당도하여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하시므로 대박산에 장사를 지냈다. 우가 출신 달문이 무리의 추대를 받아 대통을 이으셨다.
[[[6세 단군달문 재위 36년]]]
달문단군의 재위 원년은 무인(환기 5115, 신시개천 1815, 단기 251, BCE 2083)년이다.
재위 35년 임자(단기 285, BCE 2049)년에 여러 왕을 상춘에 모아 구월산에서 삼신(여기서는 국조삼신을 가르킴)께 제사지내실 때, 신지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시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서효사誓效詞, 신지비사神誌秘詞]
아침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모든신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받들어 처음으로 나라여셨사옵니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 퍼졌사옵니다
물고기 물만난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사옵니다
원한맺힌 자 원한 먼저 풀어주고
병든 자 먼저 낫게 하셨사옵니다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
사해에 광명이 넘치옵니다
진한이 나라 안을 진정시키니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사옵니다
모한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
깎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쌌는데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서울에 행차하셨사옵니다
삼한형세 저울대 저울 저울판같으니
저울판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이루니
그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하옵니다
나라를 흥성케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
일흔나라 조공하며 복종하였사옵니다
길이 삼한관경제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옵니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
이에 모든 왕과 약속하시니 이러했다. "무릇 나와 함께 약속한 사람은 환국 오훈(桓國五訓)과 신시 오사(神市五事)를 영구히 준수할 법도로 삼아야 하리라. 제천 의례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인본주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먹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라.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요, 제사는 오교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함께 일하고 생산하되, 먼저 겨레를 중히 여기도록 가르쳐라. 포로와 죄수를 용서하며, 아울러 사형을 없애도록 하라. 책화責禍제도를 두어 지경을 보존하고, 화백을 공의로 삼아라[화백위공和白爲公]. 오로지 한결같이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베풀어 겸양의 덕을 길러야 어진 정치를 행하는 기틀이 열리리라."
이때 맹세하고 폐백을 바친 자는 대국이 둘, 소국이 스물, 읍락이 3,624곳이었다.
재위 36년 계축(환기 5150, 신시개천 1850, 단기 286, BCE 2048)년에 달문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계가 출신 한율이 즉위하셨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한율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인(환기 5151, 신시개천 1851, 단기 287, BCE 2047)년이다.
재위 54년 정미(환기 5204, 신시개천 1904, 단기 340, BCE 1994)년에 임금께서 붕어하셨다. 우서한이 즉위하셨다.
[[[8세 단군 우서한(일명 오사함) 재위 8년]]]
우서한 단군의 재위 원년은 무신(환기 5205, 신시개천 1905, 단기 341, BCE 1993)년이다. 임금께서 ‘20분의 1 세법[정이십세일지법 定二十稅一之法]’을 정하시고, 물자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서로 통하게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셨다.
재위 2년 기유(단기 342, BCE 1992)년에 풍년이 들어 줄기 하나에 이삭이 여덟 개씩 패었다.
재위 4년 신해(단기 344, BCE 1990)년에 임금께서 미복을 입고 몰래 국경을 벗어나 하나라의 실정을 살피시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개혁하셨다.
재위 7년 갑인(단기 347, BCE 1987)년에 삼족오가 동산에 날아들었는데 그 날개 길이가 석 자나 되었다.
재위 8년 을묘(환기 5212, 신시개천 1912, 단기 348, BCE 1986)년에 우서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아술께서 즉위하셨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아술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진(환기 5213, 신시개천 1913, 단기 349, BCE 1995)년이다. 임금께서 어진 덕이 있어 백성 중에 금법禁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분지(오물 구덩이)가 비록 더러우나 비와 이슬이 가리지 않고 내리느니라.”하시고, 죄를 논하지 않으셨다. 금법을 범한 자가 그 덕에 감화되어 순박하고 후덕한 교화가 널리 행해졌다. 이 날 해가 둘이 나타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담처럼 늘어서서 큰 행렬을 이루었다.
재위 2년 정사(단기 350, BCE 1984)년에 청해 욕살 우착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였다. 임금께서 상춘으로 피난하여 구월산 남쪽 기슭에 새 궁궐을 세우시고, 우지와 우속 등을 보내 우착을 토벌하여 죽이셨다. 이후 3년 만에 다시 환도하셨다.
재위 35년 경인(환기 5247, 신시개천 1947, 단기 383, BCE 1951)년에 아술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우가 출신 노을이 즉위하셨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노을단군의 재위 원년인 신묘(환기 5248, 신시개천 1948, 단기 384, BCE 1950)년에 큰 동산을 만들어 처음으로 야생 동물을 기르셨다.
재위 2년 임진(단기 385, BCE 1949)년에 임금께서 친히 읍락에 행차하여 민정을 살피며 백성을 위로하시고 어가를 멈추고 야외에 머무르실 때 현자가 많이 따랐다.
재위 5년 을미(단기 388, BCE 1946)년, 궁문 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세워 백성의 하소연을 들으시니 모든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재위 16년 병오(단기 399, BCE 1935)년, 동문 밖 십리 떨어진 땅 위에 연꽃이 피었고, 불함산에 누웠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으며, 천하天河에서 신령스런 거북이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윷판과 같았다. 또 발해 연안에서 금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석石이었다.
재위 35년 을축(단기 418, BCE 1916)년에 처음으로 별을 관측하는 감성監星을 설치하셨다.
재위 59년 기축(환기 5306, 신시개천 2006, 단기 442, BCE 1892)년에 노을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도해께서 즉위하셨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재위 원년인 경인(환기 5307, 신시개천 2007, 단기 443, BCE 1891)년에 도해단군께서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게 하셨다. 그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셨다. 그 이름을 웅상雄常이라 하셨다.
국자랑을 가르치는 사부 유위자有爲子가 헌책하여 아뢰었다. “오직 우리 배달이 실로 환웅천황의 신시 개천 이래 백성을 모아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세워 교화하였습니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역대 성조들이 조명詔命으로 기록하였고,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다니는 풍속은 아래로 백성이 즐거이 본받았습니다. 이에 백성은 법을 범하지 않고 한결같이 잘 다스려졌으며, 들에는 도적이 없어 저절로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병이 없어 저절로 장수를 누리고 흉년이 없어 저절로 넉넉하여, 산에 올라 노래 부르고 달맞이 하면서 춤을 추며,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 덕화가 미치지 않은 데가 없고 어떤 곳이든 흥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덕과 가르침이 만백성에게 미치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쳤다 하옵니다.” 그러고는 그렇게 다스려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해 겨울 10월, 임금께서 대시전을 건축하도록 명하셨다. 대시전大始殿이 완성되니 그 모습이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을 받들어 모시니 머리 위에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신단수 아래 무궁화 꽃[환화桓花] 위에 앉아 계시니 마치 진신 한 분이 원융무애한 마음으로 손에 천부인을 쥐고 계시는 것 같았다. 누전에 대원일大圓一을 그린 기旗를 걸어 놓고 명호를 거발환이라 하셨다. 사흘 동안 재계하고 이레 동안 강론하시니, 그 덕화의 바람이 사해를 움직였다.
그 염표문念標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아득하고 고요함으로 광대하니,
하늘의 도는 두루 미치어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참됨으로 만물을 하나 되게 함이니라.
땅은 하늘의 기운을 모아서 성대하니,
땅의 도는 하늘의 도를 본받아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쉼 없이 길러 만물을 하나 되게 함이니라.
사람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사람의 도는 천지의 도를 선택하여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서로 협력하여 태일의 세계[대동세계, 지상천국, 불국토, 지상선경 등 인간이 염원해온 이상세계]를 만드는 데 있느니라.
그러므로 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일신강충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성통광명性通光明],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재세이화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이 글을 그대로 돌에 새기셨다.
재위 28년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각지의 특산물을 모아 진기한 물건을 진열하게 하니, 천하의 백성이 다투어 바쳐 쌓은 것이 산과 같았다.
재위 38년 정묘(단기 480, BCE 1854)년에 장정을 징집하여 병사로 만드셨다. 선비 20명을 뽑아 하나라 수도로 보내 처음으로 국훈을 전하여 위엄 있는 명성을 보여주셨다.
재위 46년 을해(단기 488, BCE 1846)년에 송화강변에 청사廳舍를 세워 배와 노, 기물을 생산하여 세상에 크게 쓰이게 하셨다.
3월에 산 남쪽에서 삼신께 제사 지낼 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제문을 지어 초제를 지내시고, 이날 밤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시어 백성과 함께 돌려가며 드셨다.
모든 유희가 끝난 뒤에 누대의 전각에 오르시어 ‘천부경’을 논하고 ‘삼일신고’를 강론하시고, 오가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고 잡은 것은 놓아주며,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주고, 사형을 없애라.” 나라 안팎에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재위 57년 병술(환기 5363, 신시개천 2063, 단기 499, BCE 1835)년에 도해단군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통곡하기를 아비 어미의 상喪과 같이 하였다. 3년 동안 슬퍼하고 사해에 음악 소리가 그쳤다. 우가 출신 아한이 즉위하셨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아한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해(환기 5364, 신시개천 2064, 단기 500, BCE 1834)년이다.
재위 2년 무자(단기 501, BCE 1833)년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임금께서 나라를 순행하시다가 요하遼河의 왼쪽에 이르러 순수관경비를 세우고,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 전하셨다. 이것이 금석문金石文으로 가장 오랜 것이다. 후에 창해 역사 여홍성이 이곳을 지나다가 시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이곳 들판 예로부터 변한이라 불렀는데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 있구나.
토대는 무너져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만 푸르네.
저 아득한 태고 시절에 만들어져 흥망의 역사 간직한 채 홀로 서 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지만 이것이 단군왕검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재위 29년 을묘(단기 528, BCE 1806)년에 조칙을 내려 청아 욕살 비신과 서옥저 욕살 고사침과 맥성 욕살 돌개를 열한으로 봉하셨다.
재위 52년 무인(환기 5364, 신시개천 2064, 단기 500, BCE 1834)년에 아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우가 출신 흘달이 즉위하셨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
흘달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묘(환기 5416, 신시개천 2116, 단기 552, BCE 1782)년이다.
재위 16년 갑오(BCE 1767)년에 임금께서 주현州縣을 정하고 관직을 분립하는 제도를 두셨다. 관官은 권한을 겸하지 못하게 하고 정치는 법도를 넘지 않게 하시므로, 백성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 하는 일을 편안하게 여기어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나라에 넘쳐흘렀다.
이 해 겨울,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치자 하나라 걸傑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읍차 말량에게 구환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이에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셨다. 이때 걸傑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 우량을 보내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 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빈, 기 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를 설치하였다.
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년에 소도蘇途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재위 50년 무진(단기 601, 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樓星에 모이고[戊辰五十年五星聚婁], 황학黃鶴이 날아와 금원禁苑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재위 61년 기묘(환기 5476, 신시개천 2176, 단기 612, BCE 1722)년에 흘달단군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음식을 끊었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명을 내려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다. 해를 넘겨서 장례를 치렀다. 우가 출신 고불이 즉위하셨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고불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진(환기 5477, 신시개천 2177, 단기 613, BCE 1721)년이다.
재위 6년 을유(단기 618, BCE 1716)년,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임금께서 친히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셨다. 하늘에 바친 ‘서고문誓告文’은 이러하다.
하늘이 비록 크다 하여도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 것이며
비가 비록 대지를 기름지게 하지만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겠사옵니까!
백성이 하늘처럼 섬기는 것은 곡식이요 하늘이 마음으로 삼는 바는 사람이옵니다.
하늘과 사람이 한 몸일진대 하늘이 어찌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어서 비를 내려 곡식이 잘 자라도록 하여 저희 백성을 제 때에 구제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곧 큰 비가 수천 리에 내렸다.
재위 42년 신유(단기 654, BCE 1680)년 9월에 고목에서 싹이 돋았고, 오색찬란한 큰 닭이 성동자 마을의 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보는 사람들이 봉鳳으로 잘못 알았다.
재위 56년 을해(단기 668, BCE 1666)년에 사방으로 관리를 보내 호구를 조사하니 모두 1억 8천만 명이었다. (원문: 乙亥五十六年 遣官四方 査計戶口 總一億八千萬口)
재위 60년 기묘(환기 5536, 신시개천 2236, 단기 672, BCE 1662)년에 고불단군께서 붕어하셨다. 대음이 즉위하셨다.
[[[15세 단군 대음 재위 51년]]]
대음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진(환기 5537, 신시개천 2237, 단기 673, BCE 1661)년이다. 은나라 왕 소갑小甲(7세)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이 해에 세제를 개혁하여 80분의 1 세법으로 고쳤다.
재위 2년 신사(단기 674, BCE 1660)년, 홍수가 크게 나서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임금께서 심히 불쌍히 여기시어 곡식을 창해, 사수 땅으로 옮겨 백성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겨울 10월에 양운, 수밀이 두 나라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재위 10년 기축(단기 682, BCE 1652)년에 임금께서 서쪽의 약수에 순행하여,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과 철과 기름을 채취하게 하셨다. 가을 7월에 우루 사람 20가구가 투항해 오므로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게 하셨다.
재위 28년 정미(단기 700, BCE 1634)년에 임금께서 태백산에 올라 옛 성조들과 여러 제후국 왕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우셨다.
재위 40년 기미(단기 712, BCE 1622)년에 아우 대심을 남선비국의 대인으로 봉하셨다.
재위 51년 경오(환기 5587, 신시개천 2287, 단기 723, BCE 1611)년에 대음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우가 출신 위나가 즉위하셨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위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미(환기 5588, 신시개천 2288, 단기 724, BCE 1610)년이다.
재위 28년 무술(단기 724, BCE 1610)년에 임금께서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낼 때, 환인천제, 환웅천황, 치우천황(14세 환웅천황)과 단군왕검을 배향하셨다.
5일간 큰 연회를 베풀어 백성과 함께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천부경을 노래하며 마당밟기를 하셨다. 한쪽에 횃불을 줄지어 밝히고, 다른 쪽에서 둥글게 춤을 추며[환무環舞] 애환가를 함께 불렀다. 애환가愛桓歌(환화를 사랑하는 노래)는 고신가古神歌의 한 종류이다. 옛 사람들은 환화를 가르켜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꽃이라 하였다. 애환가에 전하는 가사가 있으니 이러하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도 만 그루 심었어라.
봄에 찾아와 불함산 꽃이 온통 붉으니
상제님 섬기고 태평세월 즐겨 보세.
재위 58년 무진(환기 5645, 신시개천 2345, 단기 781, BCE 1553)년에 위나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여을께서 즉위하셨다.
[[[17, 18, 19, 20세 단군 여을, 동엄, 구모소, 고홀 재위]]]
17세 여을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사(환기 5646, 신시개천 2346, 단기 782, BCE 1552)년이다.
재위 52년 경신(단기 833, BCE 1501)년에 임금께서 오가와 함께 두루 나라를 순수巡狩하셨다. 개사성 부근에 이르시자,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찬미의 노래를 지어 바쳤다.
오랫동안 선인의 나라에 살면서 기쁜 마음으로 선인 나라 백성이 되었네.
임금님 밝은 덕 어긋남 없고 임금님 훌륭하신 도 치우침 없으니
백성이여! 이웃이여! 근심과 괴로움을 볼 수 없어라.
책화로 믿음을 삼으시고 관경으로 은혜를 베푸셨네.
성이여! 나라여! 전쟁과 정벌 따위 볼 수 없어라.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암, 그래야지. 반드시 그렇게 해야지! 짐의 덕 닦음이 일천하여 백성이 바라는 바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도다.”하셨다.
재위 68년 병자(환기 5713, 신시개천 2413, 단기 849, BCE 1485)년에 여을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동엄께서 즉위하셨다.
18세 동엄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축(환기 5714, 신시개천 2414, 단기 850, BCE 1484)년이다.
재위 20년 병신(단기 869, BCE 1465)년에 *지백특支伯特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재위 49년 을축(환기 5762, 신시개천 2462, 단기 898, BCE 1436)년에 동엄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셨다.
19세 구모소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인(환기 5763, 신시개천 2463, 단기 899, BCE 1435)년이다.
재위 24년 기축(단기 922, BCE 1412)년에 *남상인南裳人이 입조하였다.
재위 54년 기미(단기 952, BCE 1382)년에 지리숙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재위 55년 경신(환기 5817, 신시개천 2517, 단기 953, BCE 1381)년에 구모소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우가 출신 고홀이 즉위하셨다.
20세 고홀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환기 5818, 신시개천 2518, 단기 954, BCE 1380)년이다.
재위 11년 신미(단기 964, BCE 1370)년 가을에 태양이 무지개를 꿰뚫었다.
재위 36년 병신(단기 989, BCE 1370)년에 영고탑을 개축하시고 별궁을 지으셨다.
재위 40년 경자(단기 989, BCE 1370)년에 공공인 공흘이 구환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재위 43년 계묘(환기 5860, 신시개천 2560, 단기 996, BCE 1338)년, 사해가 평안하지 못할 때 고흘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소태께서 즉위하셨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소태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진(환기 5818, 신시개천 2518, 단기 954, BCE 1380)년이다. 은나라 왕 소을(小乙 21세)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재위 47년 경인(단기 1043, 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 22세)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재위 49년 임진(단기 1045, BCE 1289)년에 개사원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일군, 양군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 고등이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니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고등이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이 되기를 주청하였다. 임금께서 꺼리시며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거듭 청하므로 윤허하시고, *두막루라 불렀다.
재위 52년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홍서하고,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계승하였다. 임금께서 나라를 순수하시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크게 모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셨다. 이때 오가를 모아 놓고 옥좌를 양위할 일을 함께 논의할 때 “내가 이제 늙어 일하기가 고달프다”라고 말씀하시고, “서우여에게 정사를 맡기겠노라”하셨다. 이에 살수 주위의 땅 백 리를 분봉하여 섭주로 삼고 기수라 하셨다.
우현황이 소식을 듣고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멈추시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고 우현왕이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에서 단군으로 즉위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부득이 옥책과 국보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임금께서 아사달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최후를 마치셨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를 사양하고 달아나 동해 쪽 물가에 살면서 스스로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색불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신(환기 5913, 신시개천 2613, 단기 1049, BCE 1285)년이다. 임금께서 녹산鹿山(백악산 아사달)*의 성을 개축하게 하고 관제를 개혁*하셨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행차하여 종묘를 세우고 (조부) 고등왕高登王에게 제사를 재내셨다[立廟祀高登王*]. 11월에 친히 구환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은나라 수도를 함락하고 잠시 강화하였으나, 또 다시 싸워 크게 격파하셨다.
이듬해 2월에 황하 상류까지 추격하여 대첩의 하례를 받으시고, 회수와 태산 지역에 변한(번한)백성을 이주시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시어 국위를 크게 떨쳤다.
재위 6년 신축(단기 1054, BCE 1280)년에 신지 육우가 주청하기를, “아사달은 천 년 제업의 땅이나 대운이 이미 다 했고 영고탑은 왕기가 농후하여 백악산보다 나으니, 청하옵건대 그곳에 성을 쌓고 천도하시옵소서”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수도에 이미 자리를 잡았거늘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기리오”하셨다.
재위 20년 을묘(단기 1068, BCE 1266)년에 이르러 남국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쪽아 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 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
임금께서 여파달로 하여금 병력을 나누어 빈, 기 땅으로 진격하게 하시고, 그곳 유민과 서로 단합하여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을 *여黎라 하셨다. 이들은 서쪽 융족과 더불어 은나라의 제후국들 안에 뒤섞여 살게 하셨다.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지고, 임금의 덕화가 멀리 항산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
재위 36년 신미(단기 1084, BCE 1250)년에 변방 장수 신독이 난을 일으켜 임금께서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시니 많은 백성이 뒤를 따랐다.
재위 48년 계미(환기 5960, 신시개천 2660, 단기 1096, BCE 1238)년에 색불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아홀께서 즉위하셨다.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
아홀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5961, 신시개천 2661, 단기 1097, BCE 1237)년이다. 아우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시고, 웅갈손을 보내어 남국藍國 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는 군대를 살피게 하셨다.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할 때, 은나라 사람과 서로 다투어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병력을 진군시켜 이를 격파하셨다.
가을 7월에 임금께서 신독을 베고 환도하여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라고 명하셨다.
재위 2년 을유(단기 1098, BCE 1236)년 남국 왕 금달이 청구국 왕, 구려국 왕과 더불어 주개에서 만나 몽고리의 군대와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오지로 깊숙이 들어갔다.아홀단군께서 회대淮垈(회수와 태산)땅을 평정하고 포고씨를 엄淹에, 영고씨를 서徐에, 방고씨를 회淮에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이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재위 5년 무자(단기 1101, BCE 1233)년에 임금께서 이한二韓(번한, 마한)과 오가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의논을 중지시키셨다.
재위 76년 기해(환기 6036, 신시개천 2736, 단기 1172, BCE 1162)년 아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연나延那께서 즉위하셨다.
[[[24, 25세 단군 연나, 솔나 재위 11년, 88년]]]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연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자(환기 6037, 신시개천 2737, 단기 1173, BCE 1161)년이다. 임금께서 숙부 고불가에게 명하여 섭정을 맡기셨다.
재위 2년 신축(단기 1174, BCE 1160)년에 여러 왕[칸汗]이 조칙을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국가에 대사가 있거나 재앙이 있으면 곧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재위 11년 경술(환기 6047, 신시개천 2747, 단기 1183, BCE 1151)년에 연나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솔나께서 즉위하셨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짐)
솔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해(환기 6048, 신시개천 2748, 단기 1184, BCE 1150)년이다.
재위 37년 정해(단기 1220, BCE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재위 47년 정유(단기 1230, BCE 1104)에 임금께서 상소도上蘇塗에서 고례古禮를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영신佞臣]와 올곧은 신하[직신直臣]의 차이를 물으셨다. 삼랑三郞 홍운성이 나아가 아뢰었다.
"올바른 이치를 굳게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이요, 권위를 두려워하여 자기 뜻을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佞臣입니다.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지류이니 근원이 이미 탁하거늘 지류가 맑기를 바란다면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군왕이 성군이라야 신하가 올곧은 신하가 되는 것이옵니다." 임금께서 “그대 말이 옳도다.” 하셨다.
재위 59년 기유(단기 1242, BCE 1092)년에 밭곡식이 잘 여물어 한 줄기에 다섯 이삭이 패었다.
재위 88년 무인(환기 6135, 신시개천 2835, 단기 1271, BCE 1063)년에 솔나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추로께서 즉위하셨다.
[[[26, 27, 28, 29세 추로, 두밀, 해모, 마휴 단군]]]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추로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묘(환기 6136, 신시개천 2836, 단기 1272, BCE 062)년이다. 가을 7월에 백악산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떼를 지어 와서 놀았다.
재위 65년 계미(환기 6200, 신시 천 2900, 단기 1336, BCE 998)년에 추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두밀께서 즉위하셨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두밀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6201, 신시개천 2901, 단기 1337, BCE 997)년이다. *천해天海의 물이 넘치고 *사아란산斯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해에 수밀이국 · 양운국 · 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재위 8년 신묘(단기 1344, BCE 990)년에 심한 가뭄이 든 뒤에 큰비가 내려 백성들이 곡식을 거둬들이지 못하였다. 임금께서 곡물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게 하셨다.
재위 26년 기유(환기 6226, 신시개천 2926, 단기 1362, BCE 972)년에 두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해모가 즉위하셨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해모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술(환기 6227, 신시개천 2927, 단기 1363, BCE 971)년이다. 임금께서 병이 나자 흰옷 입은 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게 하니 곧 나으셨다.
재위 11년 경신(단기 1373, BCE 961)년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져 땅 위에 물고기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재위 18년 정묘(단기 1380, BCE 954)년에 빙해氷海지역 여러 왕[칸汗]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재위 28년 정축(환기 6254, 신시개천 2954, 단기 1390, BCE 944)년에 해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마휴摩休가 즉위하셨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마휴단군의 재위 원년은 무인(환기 6255, 신시개천 2955, 단기 1391, BCE 943)년이다. 주周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재위 8년 을유(단기 1398, BCE 936)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재위 9년 병술(단기 1399, BCE 935)년에 남해 조수潮水가 석자 후퇴했다. [南海潮水退三尺]
재위 34년 신해(환기 6288, 신시개천 2988, 단기 1424, BCE 910)년에 마휴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하셨다.
[[[30, 31, 32세 내휴, 등올, 추밀 단군]]]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내휴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자(환기 6289, 시개천 2989, 기 1425, BCE 909) 년이다.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여 청구靑邱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고 돌에 치우천황의 공덕을 새기셨다. 서쪽으로 엄독훌에 이르러 분조分朝의 여러 왕을 모아 열병하신 후 하늘에 제사 지내고[열병제천閱兵祭天], 주周나라와 수교修交하셨다.
재위 5년 병진(단기 1429, BCE 905)년, 흉노匈奴가 공물을 바쳤다.
재위 35년 병술(환기 6323, 신시개천 3023, 단기 1459, BCE 875)년에 내휴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등올께서 즉위하셨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
등올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해(환기 6324, 신시개천 3024, 단기 1460, BCE874)년이다.
재위 16년 임인(단기 1475, BCE 859)년에 봉황鳳凰이 백악산에서 울고 기린麒麟이 상원上苑에 와서 놀았다.
재위 25년 신해(환기 6348, 신시개천 3048, 단기 1484, BCE 850)년에 등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아들 추밀께서 즉위하셨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추밀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자(환기 6349, 신시개천 3049, 단기 1485, BCE 849)년이다.
재위 3년 갑인(단기 1487, BCE 847)년에 선비산鮮卑山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재위 12년 계해(단기 1496, BCE 838)년에 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입조入朝하였다.
재위 13년 갑자(단기 1497, BCE 837)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재위 15년 병인(단기 1499, BCE 835)년에 농작물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재위 30년 신사(환기 6378, 신시개천 3078, 단기 1514, BCE 820) 년에 추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감물께서 즉위하셨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감물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오(환기 6379, 신시개천 3079, 단기 1515, BCE 819)년이다.
재위 2년 계미(단기 1516, BCE 818)년에 주周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재위 7년 무자(단기 1521, BCE 813)년에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드렸는데, 그 서고문誓告文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 분 성조(환인·환웅·당군)의 높고도 존귀하심은
삼신과 더풀어 공덕이 같으시고
삼신(상제님)의 덕은 세 분 성조로 말미암아 더욱 성대해지도다.
텅 빔(무)과 현상(유)은 한 몸이요[허조동체虛組同體]
날날[個]과 전체[全]는 하나이니[개전일여個全一如].
지혜와 삶 함께 닦아[지생쌍수智生雙修]
내 몸과 영혼 함께 뻗어나가네[형혼구연形魂俱衍].
참된 가르침이 이에 세워져
믿음이 오래면 스스로 밝아지리라.
삼신의 힘을 타면 존귀해지나니[승세이존乘勢以尊]
빛을 돌려 내 몸을 살펴보세[회광반궁回光反躬].
저 높고 가파른 백악산은 만고에 변함없이 푸르구나.
역대 성조께서 대를 이어
예악을 찬란히 부흥시키셨으니
그 규모 이토록 위대하여
신교의 도술 깊고도 광대하여라.
하나(一氣)속에 셋(삼신)이 깃들어 있고[집일함삼執一含三],
세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은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나니[회삼귀일會三歸一].
하늘의 계율 널리 펴서 영세로록 법으로 삼으리.
위 24년 을사(환기 6402, 신시개천 3102, 단기 1538, BCE 796) 년에 감물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오루문께서 즉위하셨다.
[[[34, 35, 36세 오루문, 사벌, 매륵 단군]]]
34세 단군오루문 재위 23년
오루문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오(환기 6403, 신시개천 3103, 단기 1539, BCE 795)년이다.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잘 익어 만백성이 기뻐하며 '도리가兜理歌'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하늘에 아침 해 솟아 밝은 빛 비추고
나라에 성인이 계셔 후덕한 가르침 널리 미치도다.
큰 나라 우리 배달 성조聖朝여!
많고 많은 사람들 가혹한 정치 당하지 않아
즐겁고 화평하게 노래하니 늘 태평성대로세!
재위 10년 을묘(단기 1548, BCE 786)년, 두 개의 해가 함께 뜨고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재위 23년 무진(환기 6425, 신시개천 3125, 단기 1561, BCE 773) 년에 오루문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사벌께서 즉위하셨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사벌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사(환기 6426, 신시개천 3126, 단기 1562, BCE 772)년이다.
재위 6년 갑술(단기 1567, BCE 767)년, 이 해에 누리가 날뛰고 홍수가 있었다.
재위 14년 임오(단기 1575, BCE 759)년에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재위 24년 임진(단기 1585, BCE 749)년에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메워졌다.
재위 50년 무오(단기 1611, BCE 723)년에 임금께서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바다 위의 웅습熊襲(구마소)을 평정하셨다.
재위 66년 갑술(단기 1627, BCE 707)년에 임금께서 조을祖乙을 보내어 곧장 연燕나라 수도로 진격하게 하시니, 제齊나라 군대와 더불어 임치臨淄(제나라 수도) 남쪽 들판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고하였다.
재위 68년 병자(환기 6493, 신시개천 3193, 단기 1629, BCE 705)년에 사벌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매륵께서 즉위하셨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매륵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축(환기 6494, 신시개천 3194, 단기 1630, BCE 704)년이다.
재위 28년 갑진(단기 1657, BCE 677)년에 지진과 해일이 일어났다.
재위 32년 무선(단기 1661, BCE 673)년에 서쪽 마을 민가에서 다리가 여닮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재위 35년 신해(단기 1664, BCE 670)년에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 별 무늬가 있었다.
재위 38년 갑인(단기 1667, BCE 667)년 협야후陜野候 배반명裵搫命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벌하게 하셨다. 12월에 삼도三島(일본을 구성하는 세 섬, 곧 큐슈, 혼슈, 시코쿠)를 모두 평정하였다.
재위 52년 무진(단기 1681, BCE 653)년에 임금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국須臾國 군대와 더불어 연燕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위급을 고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대거 고죽孤竹으로 쳐들어오다가 아군의 복병을 만나 전세가 불리하자, 화친을 구걸하고 물러갔다.
재위 58년 갑술(환기 6551, 신시개천 3251, 단기 1687, BCE 647)년에 매륵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마물께서 즉위하셨다.
[[[37, 38, 39, 40, 41, 42세 마물, 다물, 두홀, 달음, 음차, 을우지단군]]]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마물단군의 재위 원년은 을해(환기 6552, 신시개천 3252, 단기 1688, BCE 646)년이다.
재위 56년 경오(환기 6607, 신시개천 3307, 단기 1743, BCE 591)년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하셨다. 태자 다물多勿께서 즉위하셨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다물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미(환기 6608, 신시개천 3308, 단기 1744, BCE 590)년이다.
재위 45년 을묘(환기 6652, 신시개천 3352, 단기 1788, BCE 546)년에 다물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두홀豆忽께서 즉위하셨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두홀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진(환기 6653, 신시개천 3353, 단기 1789, BCE 545)년이다.
재위 36년 신묘(환기 6688, 신시개천 3388, 단기 1824, BCE 51 년에 두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달음達音께서 즉위하셨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달음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진(환기 6689, 신시개천 3389, 단기 1825, BCE 509)년이다.
재위 18년 기유(환기 3706, 신시개천 3406, 단기 1842, BCE 49)년에 달음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음차音次께서 즉위하셨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음차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술(환기 3707, 신시개천 3407, 단기 1843, BCE 49 1)년이다.
재위 20년 기사(환기 6726, 신시개천 3426, 단기 1862, BCE 472)년에 음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을우지乙于支께서 즉위하셨다.
42세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을우지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오(환기 6727, 신시개천 3427, 단기 1863, BCE 471)년이다.
재위 10년 기묘(환기 6736, 신시개천 3436, 단기 1872, BCE 462)년에 을우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물리勿理께서 즉위하셨다.
[[[43, 44세 물리, 구물 단군]]]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물리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진 환기 6737, 신시개천 3437, 단기 1873, BCE 461)년이다.
재위 36년 을묘(환기 6772, 시개천 3472, 단기 1908, BCE 426)년에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다.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셨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이 역적이 도성을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므로 임금께서 좌우 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해두海頭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지 않아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勿이 천명을 받들어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자 아홉 지역의 군사가 추종하고 동서압록의 열여덟 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구물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진(환기 6773, 신시개천 3473, 단기 1909, BCE 425)년이다. 3월에 홍수로 도성이 잠기자 역적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구물이 병사 만 명을 이꿀고 가서 토벌하자, 역적들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였다. 마침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다.
[국호를 대부여로 개칭, 삼조선 분립]
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구물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셨다. 이로부터 삼조선이 비록 대단군을 받들어 한 분이 다스리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화전和戰의 권한(병권兵權)은 단군 한 분에게 있지 않았다.
7월에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壞이라 하고 별궁[離宮]을 지으셨다.
재위 2년 정사(단기 1910, BCE 424)년에 예관禮官이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올리기를 청하니 3월 16일(대영절大迎節)이었다. 임금께서 친히 납시어 경배하실 때, 초배에 세 번 조아리고, 재배에 여섯 번 조아리고, 삼배에 아홉 번 조아리는 것이 예禮이지만, 무리를 따라 특별히 열 번 조아리셨다. 이것이 삼육대례三六大禮이다.
재위 17년 임신(단기 1925, BCE 409)년에 임금께서 각 주군州郡에 감찰관을 보내어 관리와 백성을 규찰糾察하고, 효자와 청렴한 선비를 천거하게 하셨다.
재위 23년 무인(단기 1931, BCE 403)년에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를 올렸다.
재위 29년 갑신(환기 6801, 신시개천 3501, 단기 1937, BCE 397)년에 구물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여루余婁께서 즉위하셨다.
[[[45, 46세 여루, 보을 단군]]]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여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을유(환기 6802, 시개천 3502, 단기 1938, BCE 396)년이다. 장령長嶺 ·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재위 17년 신축(단기 1954, BCE 380)년에 연나라 사람이 변방을 침범하자 그곳을 지키던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서 물리쳤다.
[요서 지방의 모든 성을 회복함]
재위 32년 병진(단기 1969, BCE 365)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이틀길을 하루에 달려 쳐들어와 요서를 함락하고 운장雲障 지방을 핍박하였다. 번조선香朝鮮 왕이 상장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막게 하고, 진眞 · 막莫 두 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다. 복병을 두어 협공하여 연燕 · 제齊 두 나라의 군대를 오도하五道河에서 깨뜨리고 요서지방의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연나라의 끊임없는 침략]
재위 33년 정사(단기 1970, BCE 364)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패한 뒤에도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어 장차 쳐들어오려 하였다. 우문언이 추격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재위 47년 신미(단기 1984, BCE 350)년에 북막北漠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내조來朝하여 말 2백 필을 바치고 함께 연燕을 치자고 청하였다. 이에 번조선 소장少將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게 하시니 연나라 상곡上谷을 함께 공격하여 함락하고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재위 54년 무인(단기 1991, BCE 343)년 상곡 싸움 이후로 연나라가 해마다 쳐들어오다가 이때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자, 이를 윤허하시고 다시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으셨다.
재위 55년 기묘(환기 6856, 신시개천 3556, 단기 1992, BCE 342)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임금께서 원통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사면을 내리고, 친히 납시어 기우제를 지내셨다. 9월에 여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보을普乙께서 즉위하셨다.
46세 단군보을 재위 46년
[번조선 왕 시해사건과 고조선 중앙정부의 내분 심화]
보을단군의 재위 원년은 경진(환기 6857, 신시개천 3557, 단기 1993, BCE 341)년이다.
12월에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에서 보낸 자객에게 시해弑害를 당하였다. 오가五加가 서로 권력을 다투었다.
[기후가 번조선 왕이되다]
재위 19년 무술(단기 2011, BCE 323)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게 하셨다.
재위 38년 정사(단기 2030, BCE 304)년에 도성(장당경)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 버리자 임금께서 해성悔城의 별궁으로 피하셨다.
재위 44년 계해(단기 2036, BCE 298)년에 북막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지어 바치니 임금께서 이를 받으시고 후히 상을 내리셨다.
[한개의 반란을 진압한 고열가, 쇠락하는 고조선]
재위 46년 을축(환기 6902, 신시개천 3602, 단기 2038, BCE 296)년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에 상장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한개를 격파하였다. 임금께서 환도하고 대사면을 내리셨다. 이로부터 나라의 힘이 심히 미약해지고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보을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후사는 없었다.
고열가가 43세 물리勿理단군의 현손으로 백성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또한 공로가 많으므로 드디어 추대를 받아 즉위하셨다.
[[[47세 고열가 단군 재위 58년]]]
고열가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인(환기 6903, 신시개천 3603, 단기 2039, BCE 295)년이다.
재위 14년 기묘(단기 2052, BCE 282)년에 임금께서 백악산에 단군왕검의 사당을 세워 유사有司로 하여금 계절마다 제사 지내게 하시고, 임금께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친히 제사를 드리셨다.
재위 44년 기유(단기 2082, BCE 252)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신년 하례를 올렸다.
재위 48년 계축(단기 2086, BCE 248)년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 해 겨울에 북막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연나라를 정벌하는데 출병해 주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응하지 않으시자, 원망하여 이후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남]
재위 57년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다.
재위 58년 계해(환기 6960, 신시개천 3660, 단기 2096, BCE 238)년, 임금께서 어질고 인자하시나 우유부단하여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화란을 자주 일으켰다. 나라 살림은 쪼들리고 백성의 기운도 더욱 쇠약해졌다.
[단군조선의 몰락과 북부여 시대의 개창]
3월 제천祭天을 행한 날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國統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심으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노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汗]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오가의 과도기 공화정 시대]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仙人이 되셨다. 이에 오가五加가 6년(단기 2096, BCE 238~단기2102, BCE 232)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였다.
이보다 먼저, 종실宗室인 대해모수께서 은밀히 수유국須臾國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셨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북부여가 발흥한 배경과 고구려 호칭의 기원]
이때에 해모수께서 모든 장수를 봉하면서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올려 번조선 왕으로 삼아(단기 2102, BCE 232), 가서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셨다. 대개 북부여가 발흥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기원檀君紀元 원년 무진(환기 4865, 신시개천 1565, BCE 2333)년부터 지금의 주상(고려 공민왕)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 12년째 되는 계묘(환기 8560, 신시개천 5260, 단기 3696, 서기 363)년까지가 무릇 3,696년이라. 이 해 10월 3일에 흥행촌수紅杏村수가 강화도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이 글을 노라.
삼한관경본기-전문
배달을 계승한 단군왕검, 송화강 아사달에서 건국
1. 환웅천황의 제천 행사
태백산(백두산)이 북쪽으로 달려가 우뚝 솟은 장엄한 모습이 비서갑裵西岬 경계에 까지 이어졌고, 그곳에 물을 등지고, 산을 안고서 다시 꺾어져 감돈 곳이 있는데, 바로 대일왕大日王(환웅 천황)께서 천제를 올리시던 곳이다.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해 온다.
환웅천황이 이곳에 순행하여 머무시면서 사냥하여 제사 지내실 때, 풍백은 '천부경天符經'을 거울에 새겨 진상하고, 우사는 북에 맞추어 둥글게 춤을 추고, 운사는 백 명을 칼로 무장시켜 제단 밑에 늘어서서 지켰다.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러 산에 가실 때 의장이 이처럼 성대하고 엄숙하였다. 이 산의 이름이 불함不成이다. 지금은 완달完達이라 하는데, 그 음이 비슷하다.
2. 비서갑의 초대 왕검이 된 웅족 여왕
후에 웅족 여왕[熊女君]이 천황께 신임을 받아 비서갑의 왕검을 세습하였다. 왕검王儉을 세속 말로 대감大藍이라 한다. 왕검은 영토를 관장하고 지키며,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살폈다.
일찍이 천황께서 백성에게 유시論示한 뜻을 받들어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부모를 공경하고, 처자를 잘 보호하여라.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며, 노인과 어른을 잘 받들어라. 어린아이와 약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뭇 백성은 서로 믿어야 하느니라."
또 의약과 물건 만드는 법, 짐승을 기르고 농사짓는 법, 기후 관측과 예절과 문자의 법을 만드니, 맡아 다스리는 땅이 교화되어 원근 백성이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3. 한족 시조 헌원은 웅씨족 소전의 후손
웅씨족에서 갈려 나간 후손 중에 소전少典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8세)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군병을 감독했다.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은 온갖 풀을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후에 열산列山으로 이주하여 한낮에 시장을 열어 물건을 교역하게 하였는데, 백성이 이를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소전少典에서 갈라진 파로 공손公孫이란 인물이 있었다.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에 귀양가서 살았는데, 헌원幹轅의 족속이 모두 그 후손이다.
4. 구환을 통일하선 신인 왕검: 국조 단군
사와라환웅(13세) 초기에 웅족 여황의 후예를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 왕검이 덕을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므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여러 지역 왕검이 와서 방물을 바쳤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그 뒤 460년이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 출현하여 백성에게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裡王(부왕)에 올라 24년간 섭정하였다. 웅씨 왕이 전쟁에서 죽자 왕검이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였다.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이때에 나라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공약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백성의 뜻을 들어 공법을 삼노니, 이를 천부天符(하늘의 법)라 이르노라. 무릇 천부는 만세불변의 기본 경전이요, 지극한 존엄성이 담겨 있으니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마침내 삼한三韓으로 영토를 나누어 다스릴 때 진한辰韓은 천왕께서 친히 맡아서 통치하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바로 1세 단군이시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 지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왕검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한세가 상]]]
웅족과 호족이 서로 다투던 때는 환웅천황께서 아직 나라를 다스리기 이전이다. 묘환苗桓은 환국 시절 구황九皇족의 하나로 그 땅은 옛적에 이미 우리 환족이 유목과 농경을 하던 곳이다. 배달 신시가 개천되자 처음으로 토土의 중정中正의 덕으로 다스렸다[以土爲治]. 1(태극[水])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先天 生長)운동이 쌓여 그 궁극에 결실하는 음 기운(10 무극)이 성립하고, 이 10(무극)이 크게 열려서 만물이 다시 양(1태극)으로 통일된다(후천 결실 수렴 운동). 이러한 1과 10의 순환 운동 속(중도의 덕을 지닌 5토土)에서 천지의 참 마음[衷]이 생겨난다.
1. 황제헌원이 신시 배달에 와서 도를 닦다
[환역을 풀어 내는 윷놀이와 염표문]
봉황새가 백아강白牙岡에 모여 깃들고, 선인이 법수교法首橋를 왕래하였다. 법수는 신선 이름이다. 일찍이 인문이 발달하였고 오곡이 잘 익었다. 마침 이때 자부 선생이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황께 바쳤다. 천황께서 기뻐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기거하게 하셨다. 공공 · 헌원 · 창힐 · 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 선생에게 배웠다. 그때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桓易을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대체로 (초대 환웅 때)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기록한 천부경이 전하는 취지이다.
옛적에 환웅천황께서 천하가 광대하여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이에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 · 왕명 · 형벌· 질병 · 선악을 주관하게 하시고,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바로 삼신과 일체로 계시는 천상의 상제님[三神一體上尊]께서 남겨 주신 법도이다.
그러므로 천황께서 삼신(상제님)의 도로써 가르침을 세우고[三神立敎], 그 품고 계신 뜻을 전하는 글을 지으시니 그 염표문念標文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신[一神]께서 참마음을 내려 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본성은 본래 신의 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성취하는 홍익인간의 길을 갈지어다[弘益人間]
이때부터 소도가 건립되어 도처에서 볼 수 있었고,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이 산꼭대기마다 세워졌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이 둥글게 마을을 이루고 네 집이 정전井田의 단위를 이루어 농사를 짓고, 조세는 20분의 1을 바쳤다. 사시가 고르고 풍년이 들어 집 밖에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니 온 백성이 기뻐하여 태백환무太白桓舞라는 노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2. 치우천황의 헌원 토벌 - 탁록 대전쟁
이어서 치우천황이 계셨는데 구치九治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셨다.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시니 천하에서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헌구軒丘(황제헌원, 중화 한족의 시조)가 불복하므로 치우천황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탁록에서 대전쟁을 벌이셨다. 탁록은 지금의 산서성 대동부大同府이다.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탁록격문涿鹿檄文」을 짓고, 종당대인宗黨大人 81명을 소집하여 먼저 치우천황의 형상을 그려 반포하고, 아울러 신하들에게 경계의 글을 내려 알리셨다.
치우천황께서 말씀하셨다.
"너, 헌구는 짐의 말을 똑똑히 들으렷다! 태양(하늘)의 아들은 오직 짐 한 사람이니라. 짐이 천자로서 이 세상을 만세토록 공의公義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닦는 경계의 글(훈계문)을 짓노라. 너, 헌구는 우리의 삼신일체 원리를 우습게 알고 태만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 실행하지 않았느니라. 이에 삼신상제님께서 오랫동안 너의 더러운 행위를 싫어하여 짐 한 사람에게 명하시어 '삼신의 토벌을 행하게 하셨노라. 네가 하루속히 불의한 마음을 씻고 행동거지를 뜯어고쳐 타고난 삼신의 본성에서 진리의 열매(씨)를 구하여라. 그러면 상제님의 성령이 너의 머리에 내려 오시리라. 만일 네가 천명天命을 따르지 아니하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여 네 목숨이 온전치 못하리니 너는 두렵지도 않으냐?"
이때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함으로 천하가 우리 배달을 종주로 받들게 되었다.
선인 유위자가 전한 천지 대도의 말씀
[도道의 근원은 삼신상제님]
이때 유위자가 묘향산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나는 길에 웅씨 임금을 알현하니, 임금이 “나를 위해 도道를 설명해 주겠소?"라고 청하였다.
이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도의 큰 근원은 삼신에서 나옵니다[道之大原 出乎三神]. 도에는 이미 대립도 없고 이름도 없으니, 대립이 있으면 도가 아니요, 이름이 있어도 도가 아닙니다. 도에는 고정불변의 도가 없으니[道無常道] 천지의 때를 따르는 것이 도가 귀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도에는 일정한 이름이 없으니[稱無常稱] 백성을 평안하게 함이 도의 이름이 담고 있는 바입니다. 밖이 없는 극대 세계와 안이 없는 극미 세계에 이르기까지 도가 품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기틀이 내 마음의 기틀에 나타나고, 땅에 있는 상象(변화의 움직임)이 내 몸의 상에 나타나며, 만물의 주재는 내 몸의 기氣의 주재에서 나타나니, 이것이 바로 하나[一氣]에는 셋(삼신)이 깃들어 있고[執一含三], 세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이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원리[會三歸一]입니다.
일신이 내려 주신 바가 만물의 이치[物理]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또는 하늘이 1로서) 물[水]을 생生하는 도입니다. 인간의 본래 성품이 광명에 통해 있는 것이 생명의 이치[生理]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또는 땅이 2로서) 불[火]을 생生하는 도입니다. 세상을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으로 다스려 깨우치는 것이 마음의 이치[心理]이니, 바로 인삼人三(또는 사람이 3으로서)이 나무[木]를 생生하는 도입니다.
대개 대시에 삼신상제님께서 천지인 삼계를 만드실 때, 물[水]로써 하늘[天]을 상징하고, 불[火]로써 땅[地]을 상징하고, 나무[木]로써 사람[人]을 상징하였습니다. 무릇 나무란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솟아나온 것인데, 사람이 땅에 우뚝 서서 하늘을 대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웅씨 임금이 말하였다. “참으로 좋은 말씀이오."
4. 고조선 마한 수도의 위치와 역대 왕의 치적
마한의 초대 왕(부단군) : 웅백다
단군왕검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웅백다熊伯多를 마한 왕(부 단군)으로 임명하셨다. 도읍을 달지국達支國에 정하였는데,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실 때 천왕(단군왕검)께서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울을 보면 잘나고 못난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고, 백성이 임금을 보면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이 정사에 나타나 나니, 거울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임금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정사를 보아야 하느니라."
마한 왕(웅백다)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거룩하신 말씀입니다. 성군은 뭇 사람의 의견을 잘 좋으므로 도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임금은 독선을 좋아하므로 도가 작아지 나니, 참으로 자신을 돌이켜 살펴서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다
단군왕검 51년(단기 51, BCE 2283)에 천왕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郎城을 축조하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설치할 때 강남의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조역助役하게 하셨다. (91세 되시던) 신유(단기 54, BCE 2280)년 3월에 천왕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천제를 올리셨다.
웅백다熊伯多가 세상을 떠나니 단군왕검 재위 55년(단기 55년, BCE 2279) 이었다. 아들 노덕리盧德利(2세 왕)가 계승하였다. 노덕리가 세상을 뜨자 아들 불여래弗如來(3세 왕)가 즉위하니 부루단군(2세) 12년 임자(단기 105, BCE 2229)년이었다. 가을 10월에 (단군의) 명을 받들어 칠회력七回曆을 백성에게 널리 반포하였다. 다음해 봄 3월에, 처음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백아강에 버드나무를 심게 하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단기 109, BCE 2225)년에 삼일신고비三一神誥碑를 새겨서 남산에 세우고, 경신(단기 113, BCE 2221)년에 논을 개간하였다. 기해(단기 152, BCE 2182)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베푸니 나라를 다스리는 덕화가 널리 미쳤다.
(2) 3세 가륵단군의 중도 일심 정신에 대한 성훈
가륵단군(3세) 3년(단기 154, BCE 2180)에 불여래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두라문杜羅門(4세 왕)이 즉위하였다. 을사(단기 158, BCE 2176) 9월에 천왕께서 조칙을 내려 말씀하셨다. "천하의 대본은 내 마음의 '중도 일심[中一] 자리'에 있느니라. 사람이 일심의 중 자리를 잃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고, 만물 이 중도 일심을 잃으면 그 몸이 넘어지고 엎어지느니라. 임금의 마음은 위태롭고 백성의 마음은 은미하니, 모든 사람이 균일하게 갖고 나온 천부의 성품을 잘 닦고 간직하여 그 조화의 중심 자리를 확립해서 잃지 않은 연후에야 일심 자리에 확고히 안주할 수 있느니라. 중정과 일심[中一]의 도는 아비된 자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된 자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된 자 마땅히 의롭고, 신하된 자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된 자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된 자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마땅히 차례를 잘 지키고, 친구끼리 마땅히 서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니라. 몸을 삼가 공손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잘 닦고 맡은 소임을 연마하여 지혜와 능력을 계발하고, 널리 이롭도록 서로 권면하고, 자신을 완성하여 자유자재하며[成己自由], 만물의 뜻을 열어 고르고 한결같이 하라[開物平等]. 그리하여 천하의 일을 자임하고, 국통國統을 존중하고, 국법憲法을 확실히 지켜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면하여 생산을 보존하라. 국가에 일이 있을 때 몸을 던져 의義를 실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맹히 전진하여 만세토록 무궁한 복을 마련할지니라. 이는 짐이 너희 백성과 함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희가 한 몸이 되어 완전하게 실천하기를 지극한 뜻으로 바라노니, 이를 잘 공경하여 받들지어다."
(3) 살수에서 배를 건조함
두라문(4세 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을불리乙弗利(5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세상을 떠나 아들 근우지近于支(6세 왕)가 즉위하니, 오사구단군(4세) 을유(단기 198, BCE 2136)이었다. 경인(단기 203, BCE 2131)년에 장정 30명을 보내어 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하게 하였는데, 그곳은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단기 225, BCE 2109)년에 마한 왕이 (4세 단군의) 명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도왔다. 10월에 모란봉 산기슭에 별궁[離宮]을 지어 천왕(오사구단군)께서 순수하실 때 머무실 장소로 삼았다.
[조의 하사와 가관 의식]
(단군께서) 매년 3월에 마한에 명하시어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하셨다. 16일에 기린굴麒麟窟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皂衣를 하사하고 관을 씌우는 예식(관례)을 행하셨다.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행하고 파하셨다. 갑인(단기 227, BCE 2107)년에 근우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을우지乙于支(7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우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 궁호弓戶(8세 왕)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세상을 떠나니 자손이 없어 두라문(4세 왕)의 아우 두라시의 증손 막연莫延(9세 왕)이 명을 받들어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단기 341, BCE 1993)년에 우서한단군(8세)께서 백아강에 순행하여 머무시며, 밭의 경계를 정해 땅을 나누어 주고 네 집을 한 구역으로 정하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각 구역에서 일승一乘씩 갹출 하여 마을을 나누어 지키게 하셨다.
(4) 11세 단군 때 환도桓道 문명이 번성함
[신교의 제도화로 환도 문명이 번성]
노을단군(10세) 임인(단기 395, BCE 1939)년에 막연이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화阿火(10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때 도해단군(11세)께서 강력한 의지로 개화에 힘써 평등하게 다스리실 때, (단군의) 명을 받들어 대성산大聖山 기슭에 대시전大始殿을 짓고 대동강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세 고을마다 전佺을 두어 경당扃堂을 설립하고 칠회 제신 의례[七回祭神之儀]를 정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강론하니, 환도문명桓道文明이 번성하여 국경 밖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다. 하夏나라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아화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사리沙里(11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한단군(12세) 을묘(단기 528, BCE 1806)년에 사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리阿里(12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불 단군(14세) 을유(단기 618, BCE 1716)년에 아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갈지曷智(1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세상을 뜨니 대음단군(15세) 무신(단기 701, BCE 1633)년에 아들 을아乙阿(14세 왕)가 즉위하였다.
[참성단의 제천 행사에 참여한 은나라 사신]
기유(단기 702, BCE 1632)년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쳤다. 을아가 세상을 뜨니, 여을단군(17세) 신미(단기 784, BCE 1550)년에 아들 두막해豆莫奚(15세 왕)가 즉위하였다. 임신(단기 785, BCE 1549)년 3월 16일에 여을단군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참성단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내실 때, 은나라 왕 외임外壬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세상을 뜨자 무인(단기 851, BCE 1483)년에 아들 자오수慈烏漱(16세 왕)가 즉위하였다. 자오수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922, BCE 1412)년에 아들 독로瀆盧(17세 왕)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세상을 뜨니 고홀단군(20세) 경오(단기 963, BCE 1371)년에 아들 아루阿婁(18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세상을 뜨니 무오(단기 1011, BCE 1323)년에 아우 아라사阿羅斯(19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조선 전삼한 시대의 대 전기점
[고등의 반역 사건]
이해(단기 1011, BCE 1323)에 고등高登이 개성開城에서 반역하여 천왕(21세 소태단군)에게 항명하였다. 마한 왕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고등을 치려 하는데, 홍석령紅石嶺에 이르러 천왕께서 고등을 우현왕右賢王으로 삼기로 윤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천왕(21세 소태단군)께서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려 하시자 마한 왕이 불가하다고 간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색불루가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자 마한 왕이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이끌고 가서 해성에서 일전을 겨뤘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 하]]]
삼한에서 삼조선 시대로 전환
우현왕 색불루의 대권 장악
색불루단군께서 조부(우현왕 고등)의 공덕을 계승하여 병권을 장악하니, 진한이 스스로 무너지고 마한·번한 역시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멸하였다. 이에 전제前帝(21세 소태단군)께서 사람을 보내어 옥책玉册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선양하셨다. 새로 등극한 임금(색불루)께서 도읍터를 백악산으로 정하시자 모든 욕살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여원흥黎元興과 갑천령蓋天齡 등이 조칙을 받들어 설득하니 마침내 모든 욕살이 복종했다.
1. 22세 색불루 단군,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
재위 원년 병신년(단기 1049, BCE 1285) 정월에, 색불루단군께서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시니 이곳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3월에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근자에 아사달(수도)에서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짐에게 전하여 제위를 선양하였느니라. 전제前帝(21세 소태단군)께서 아직 존호를 사용하고 계시지만 해내海内의 산천과 백성의 명부[名帳]가 이미 짐에게 돌아왔으니,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법은 나라의 전례典禮에 합당하게 하여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지어다. 반드시 옛 전통을 잘 헤아려서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라. 이제 천제일(대영절大迎節, 3월 16일)을 맞이하여 먼저 가서 몸과 마음을 재계하며, 천제 지낼 장소[神域]를 살펴 잘 청소하고, 희생과 폐백을 깨끗하게 준비하여 삼신께 보답토록 하라."
이때에 임금(색불루 단군)께서 7일을 택해 재계하시고,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시며 16일 이른 아침에 여원흥이 삼한의 대 백두산 천단天壇에서 제사를 봉행하게 하고, 임금께서는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사를 지내셨다. 그 백두산 서고문誓告文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소자 단군 색불루는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려 절하나이다. 천자天子의 수신修身이 백성에게 미침은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늘에 제사 지내에서 비롯하나, 황상皇上(시조 단군)께서 삼신의 밝으신 천명을 받아 보은대덕으로 이미 삼한의 5만 리 강토와 더불어 다 함께 '홍익인간'의 큰 뜻을 누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한 여흥을 보내 삼신일체 상제님의 제단에 제사를 올립니다. 상제님의 성신은 밝고 밝으시어 만유에 그 은혜를 베푸심이 빠뜨림이 없으십니다. 이에 심신을 깨끗이 재계하고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오니 강림하여 흠향하시고 말없이 도우시어 반드시 새로 보위에 오른 임금의 건극建極을 보살펴 주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왕업을 천만 년 무궁토록 보존케 하옵시고, 매년 풍년이 들어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번영하게 하여 우리 성제聖帝(시조 단군)께서 품으셨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살리는[空我存物] 지극한 생각을 밝혀 주옵소서."
2. 나라의 제도를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개편
5월에 제도를 고쳐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셨는데, 조선은 관경管境(영토 관할)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22세 단군)께서 친히 다스리고, 통치 영역은 옛날 진한의 땅 그대로이다. 정치는 천왕을 경유하여 삼한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명령을 받았다. 여원흥을 마한 왕(20세)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 왕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 관경檀君管境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辰國이다. 역사에서 일컫는 단군조선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동강의 왕검성을 막조선의 여원흥이 주재함]
원홍이 임금의 명을 받고 대동강을 굳게 지키니, 이곳을 왕검성이라고도 불렀다. 천왕께서 매년 중춘仲春에 반드시 마한을 순행하여 머물며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셨다. 이에 지나치게 많이 올리고, 많이 거둬들이는 폐단이 마침내 없어지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짐 한 사람을 봉양하기 위해 거두는 일로 백성을 번거롭게 한다면, 이는 바른 정사가 아니니라. 바른 정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임금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러고는 엄명을 내려 이를 그만두게 하셨다. 무자(단기 1101, BCE 1233)년에, 마한 왕이 명을 받들어 천자의 수도[京師]에 들어가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니 이를 따르셨다. 원흥이 세상을 떠나고 기축(단기 1102, BCE 1232)년에 아들 아실阿實(21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실이 세상을 뜨자 아우 아도阿闍(22세 왕)가 즉위하였다.
[기자의 은둔 생활]
기묘(단기 1212 BCE 1122)년에 은나라가 멸망하였다. 3년이 지난 신사(단기 1214, BCE 1120)년에, 자서여子胥餘(기자)가 태항산太行山 서북 땅에 피하여 사는데, 막조선莫朝鮮 왕이 전해 듣고 모든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살피고 군대를 사열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세상을 뜨자 경술(단기 1243. BCE 1091)년에 아들 아화지阿火只(23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화지가 세상을 뜨고 병술(단기 1279, BCE 1055)년에 아우 아사지阿斯智(24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사지가 세상을 뜨니 마휴단군(29세) 정해(단기 1400, BCE 934)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25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세상을 뜨자 아들 소이所伊(26세 왕)가 즉위하였다. 소이가 세상을 뜨고 정해(단기 1580 BCE 754)년에 아들 사우斯虞(27세 왕)가 왕위에 올랐다.
3. 협야후가 왜인의 반란을 평정함
무자(단기 1581, BCE 753)년에, 주周나라 임금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축하 인사를 올렸다. 사우가 세상을 뜨자 갑진(단기 1657. BCE 677)년에 아들 궁홀弓忽(28세 왕)이 즉위하였다. 갑인(단기 1667, BCE 667)년에 협야후陝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 척을 거느리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게 하셨다.
궁홀이 세상을 뜨고, 아들 동기東䄫(29세 왕)가 즉위하였다. 동기가 세상을 뜨자 다물단군(38세) 계유(단기 1746, BCE 588)년에 아들 다도多都(30세 왕)가 즉위하였다. 다도가 세상을 뜨니 임진(단기 1825, BCE 509)년에 아들 사라斯羅(31세 왕)가 즉위하였다. 사라가 세상을 뜨고 아들 가섭라迦葉羅(32세 왕)가 즉위하였다. 가섭라가 세상을 뜨자 갑인(단기 1907, BCE 427)년에 아들 가리加利(33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묘(단기 1908, BCE 426)년에 융안隆安 사냥꾼 수만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관병이 이들과 싸울 때마다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반란군이 도성을 공격하여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가리가 출전하였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4. 고조선의 몰락- 우화충의 대역모와 기후의 반란
병진(단기 1909, BCE 425)년에 상장上將 구물丘勿(후에 44세 단군으로 즉위)이 마침내 사냥꾼 두목 우화충宇和冲을 죽이고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먼저 가리의 손자 전내典奈로 하여금 막조선을 계승(막조선 34세 왕)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국정이 더욱 쇠잔해졌다. 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진을례進乙禮(35세 왕)가 즉위하였다. 진을례가 세상을 뜨자, 을묘(BCE 366년에 아들 맹남孟男(36세 왕)이 즉위하였다.
무술(단기 2011, BCE 323)년에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스스로 번조선 왕이라 하였다.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아군과 함께 이를 정벌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이 응하지 않았다.
계해(단기 2096, BCE 238)년에 고열가단군(47세)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은둔하셨다. 진조선은 오가五加가 공동으로 집행하는 공화정 체제(단기 2096, BEC 238~단기 2102, BEC 232)를 (6년 동안) 유지하다가 끝내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번한세가 상]]]
1. 요순은 단군조선의 제후
[요임금이 양위한 배경]
치우천황께서 서쪽으로 탁예涿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평정하여 산을 헤치고 길을 내시니, 그 영토가 만 리 였다. 단군왕검 때는 당요唐堯(당나라 요임금)와 같은 때인데, 요堯의 덕이 갈수록 쇠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천왕(단군왕검)께서 우순虞舜(우나라 순임금)에게 명령하여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주둔시키셨다. 우순과 함께 당요를 정벌할 것을 언약하시니, 요堯임금이 힘에 굴복하고 순舜에게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나라를 넘겨 주었다[國讓]. 이때 순舜 부자와 형제가 다시 돌아가 한집안을 이루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함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2. 9년 홍수를 다스리기 위한 도산 회의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나라 순임금[虞舜]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塗山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천자 단군왕검을 알현한 제후 순]
이때 감우소監虞所를 낭야성琅耶城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정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서경에 이른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 지내고, 동방 천자를 알현하였다[東巡望秩 肆覲東后]"라는 구절은 바로 이 내용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상제님)의 아들[天帝子=天子]이 다스리므로 5년에 한 번 낭야를 순행하였으나,순舜은 (조선의) 제후이므로 진한에 조근朝覲한 것이 네 번이었다.
3. 초대 번한 왕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
이때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의 후손 중에서 지모와 용력이 뛰어난 자를 택하여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험독險瀆에 수도를 세우시니, 지금은왕검성이라 칭한다.
[요수 일대에 쌓은 12성]
치두남蚩頭男은치우천황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 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하셨다. 경자(단기 33, BCE 2301)년에,요수遼水주위에12성을 쌓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이다.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2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 해 경인(단기 83, BCE 2251)년 3월에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낭야성琅城인데, 번한 왕 낭야가 쌓았으므로 낭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산과 회수. 사수 지역 삼신 신앙의 유래]
갑술(단기 67, BCE 2267)년에,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도산塗山에 갈 때 도중에낭야琅邪에 들러 반 달 동안 머무르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다. 이때우순이사악四岳을 거느리고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번한 왕이 태자의 명으로 경내境内에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고, 아울러태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이로부터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이회수淮水와 사수泗水지역 일대에 서 크게 행하여졌다.
4. 오행치수의 묘법 전수
태자가 도산에 도착하여 주장[主理]의 자격으로 회의를 주관하실 때 번한 왕을 통해 우虞 사공司空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북극수의 정기를 타고난 아들이니라. 너희 임금(순임금)이 나에게 수토水土를 다스려 백성을 구해 주기를 청원하니, 삼신상제님 께서 내가 가서 도와 주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왔노라.”
천자국의 문자[王土篆文(고조선 신지 전자)]로 된 천부天符와 왕인王印을 보여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차면 험한 곳을 다녀도 위험하지 않고, 흉한 것을 만나도 피해가 없으리라. 또 신침神針 하나가 있으니 능히 물이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 쓰임이 무궁하니라. 또 황구종皇矩倧이란 보물은 모든 험한 물을 진압하여 오래도록 잔잔하게 할 것이니라. 이 세 가지 보물[三寶]을 너에게 주노니, 천제자天帝子(단군왕검)의 거룩하신 말씀[大訓]을 어기지 말아야 가히 큰 공덕을 이룰 수 있으리라."
우사공이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삼가 천제자(단군왕검)의 어명을 잘 받들어 행할 것이요, 또 저희 우순(순임금)께서 태평스런 정사를 펴시도록 잘 보필하여 삼신상제 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도록 지극한 뜻에 보답하겠사옵니다.”
부루태자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곧 오행치수의 요결이었다. 태자께서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아 놓고, 우순에게 명하여 조공 바친[虞貢] 사례를 보고하게 하시니, 오늘날 이른바 우공禹貢이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다.
낭야琅耶가 세상을 떠나니, 계묘(단기 96, BCE 2238)년에 아들 물길勿吉(3세 왕)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세상을 떠나자 갑오(단기 147, BCE 2187)년에 아들 애친愛親(4세 왕)이 계승하였다. 애친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도무道茂(5세 왕)가 즉위하였다. 도무가 세상을 떠나자 계해(단기 236, BCE 2098)년에 아들 호갑虎甲(6세 왕)이 즉위하였다. 정축(단기 250, BCE 2084)년에 천왕(5세 구을단군)께서 순행하시다가 송양松壤에서 병을 얻어 붕어하시자, 번한 왕이 사람을 보내 초상을 치르고 군사를 나누어 엄히 경계하였다. 호갑이 세상을 뜨자 달문단군(6세) 기축(단기 262, BCE 2072)년에 아들 오라島羅(7세 왕)가 즉위하였다. 갑오(단기 267, BCE 2067)년에 하나라 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어 신년 하례를 올렸다. 오라가 세상을 뜨자, 병술(단기 319, BCE 2015)년에 아들 이조伊朝(8세 왕)가 계승하였다. 이조가 세상을 떠나고 아술단군(9세) 병인(단기 359, BCE 1975)년에 아우 거세居世(9세 왕)가 즉위하였다. 거세가 세상을 뜨자 신사(단기 374, BCE 1960)년에 아들 자오사慈鳥斯(10세 왕)가 즉위하였다. 자오사가 세상을 떠나고 을미(단기 388, BCE 1946)년에 아들 산신散新(11세 왕)이 즉위하였다. 산신이 세상을 떠나니 무자(단기 441, BCE 1893)년에 아들 계전季佺(12세 왕)이 계승하였다. 경인(단기 443, BCE 1891)년에 명을 받아 탕지산湯池山에 삼신단三神壇을 세우고 관가를 옮겼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徳鄕이다.
5. 번한 15세 왕 소전, 성탕을 도와 하나라 폭군 걸을 정벌함
계전이 세상을 떠나고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아들 백전伯佺(13세 왕)이 왕위에 올랐다. 백전이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508, BCE 1826)년에 둘째 아우 중전仲佺(14세 왕)이 계승하였다. 중전이 세상을 떠나니 신묘(단기 564, BCE 1770)년에 아들 소전少佺(15세 왕)이 계승하였다. 갑오(단기 567, BCE 1767)년에 장수 치운출蚩雲出을 보내 탕湯을 도와 걸桀을 정벌하였다. 을미(단기 568, BCE 1766)년에 묵태墨胎를 보내 (은나라 시조)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소전이 세상을 떠나고 갑술(단기 607, BCE 1727)년에 아들 사엄沙奄(16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엄이 세상을 떠나자 아우 서한棲韓(17세 왕)이 즉위하였다. 서한이 세상을 떠나고 정축(단기 670, BCE 1664)년에 아들 물가勿駕(18세 왕)가 즉위하였다. 물가가 세상을 떠나니 신사(단기 734, BCE 1600)년에 아들 막진莫眞(19세 왕)이 왕위에 올랐다. 막진이 세상을 뜨자 정묘(단기 780, BCE 1554)년에 아들 진단震丹(20세 왕)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관계]
이 해에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진단이 세상을 뜨자 계유(단기 786, BCE 1548)년에 아들 감정甘丁(21세 왕)이 즉위하였다. 감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소밀蘇密(22세 왕)이 즉위하였다. 계사 3년(단기 866, BCE 1468)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은의 수도 북박北亳을 치니, 은나라 왕 하단갑河亶甲(12세 왕)이 사죄하였다.
소밀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사두막沙豆莫(23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세상을 떠나고 계부 갑비甲飛(24세 왕)가 즉위하였다. 갑비가 세상을 뜨자 경신(단기 893, BCE 1441)년에 아들 오립루烏立婁(25 왕)가 즉위하였다. 오립루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서시徐市(26세) 가 즉위하였다. 서시가 세상을 뜨니 무신(단기 941, BCE 1393)년에 아들 안시(27세 왕)가 즉위하였다. 안시가 세상을 떠나자 기축(단기 982, BCE 1352)년에 아들 해모라奚牟羅(28세 왕)가 왕위에 오르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은나라 (22대 임금) 무정을 침]
소태단군(21세) 5년(단기 1001, BCE 1333)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출보出補시켜 (29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셨다. 고등高登이 늘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꺼려서 임금께 권하여 출보시킨 것이다. 이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였다. 고등이 이를 전해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격파하고, 삭도索度까지 추격하여 군사를 풀어 불지르고 약탈한 뒤에 돌아왔다. 서여가 북박을 습격해 격파하고, 군사를 탕지산(번한 수도 안덕향)에 주둔시켰다. 자객을 보내 소정小丁을 죽이고, 아울러 무기와 갑옷을 싣고 돌아 갔다.
[[[번한세가 하]]]
1. 색불루단군이 국가 제도를 개편하고 혁명가 서우여를 번한 왕에 임명함
색불루단군(22세)께서 일찍이 삼한을 아우르고 나라의 제도[國制]를 크게 고치실 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서우여가 몰래 좌원坐原으로 돌아가 사냥꾼 수천 명과 함께 군대를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다. 갑천령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즉각 가서 쳤으나, 패하여 진중에서 죽었다. 색불루단군께서 친히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치려 하실 때,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하고, 비왕裨王으로 봉할 것을 약속하셨다. 다시 설득하시자 말씀을 따랐다. 이때 서우여를 (30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셨다.
(1) 고조선의 8조 금법
색불루단군 4년 기해(단기 1052, BCE 1282)년에, 진조선眞朝鮮이 천왕(색불루단군)의 칙문을 전하였다. 그 칙문에서 말하를, "너희 삼한은 위로 천신을 받들고, 아래로 뭇 백성을 맞아 잘 교화하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성에게 예절과 의리, 농사, 누에치기, 길 쌈, 활쏘기, 글자를 가르쳤다. 또 백성을 위하여 금팔조禁八條를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제2조: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제3조: 도둑질 한 자 중에서 남자는 거두어들여 그 집의 노奴(남자 종)로 삼고 여자는 비婢(여자 종)로 삼는다.
◇제4조: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 형에 처한다.
◇제5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역시킨다.
◇제6조: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
◇제7조: 음란한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린다.
◇제8조: 남을 속인 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풍속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田野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신축(단기 1054, BCE 1280)년에 은나라 왕 무정이 번한 왕을 통해 천왕에게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단기 1109, BCE 1225)년에 서우여가 세상을 떠났다. 정유(단기 1110, BCE 1224)년에 아락阿洛(31세 왕)이 즉위하였다. 아락이 세상을 뜨니 정축(단기 1150, BCE 1184)년에 솔귀率歸(32세 왕)가 계승하였다. 솔귀가 세상을 뜨자 갑자(단기 1197, BCE 1137)년에 임나任那(33세 왕) 가 즉위하였다.
신미(단기 1204, BCE 1130)년에 천왕(25세 솔나단군)의 조칙으로 동쪽 교외에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께 제사 지낼 때, 많은 사람이 둥글게 모여 춤을 추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님께 장수를 축원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민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세상을 떠나고 병신(단기 1229, BCE 1105)년에 아우 노단魯丹(34세 왕)이 즉위하였다. 북막北漠이 침범하므로 노일소路日邵를 보내어 쳐서 평정하였다. 노단이 세상을 뜨니 기유(단기 1242, BCE 1092)년에 아들 마밀馬密(35세 왕)이 즉위하였다. 마밀이 세상을 뜨자 정묘(단기 1260, BCE 1074)년에 아들 모불牟弗(36세 왕)이 즉위하였다. 을해(단기 1268, BCE 1066)년에 천문을 관측하는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모불이 세상을 떠나고 정해(단기 1280, BCE 1054)년에 아들 을나乙那(37세 왕)가 즉위하였다. 갑오(단기 1287, BCE 1047)년에 주나라 임금,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 소련과 대련 형제를 군자로 섬긴 번한
[3년상 풍속의 기원]
을나가 세상을 떠나고 정묘(단기 1320 BCE 1014)년에 아들 마유휴麻維庥(38세 왕)가 즉위하였다. 마유휴가 세상을 떠나자 기사(단기 1322, BCE 1012)년에 아우 등나登那(39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사당을 세우고, 3년상을 정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이를 따랐다.
[만주 구월산 삼성묘에 제사 지냄]
등나가 세상을 떠나고 무술(단기 1351, BCE 983)년에 아들 해수奚壽(40세 왕)가 즉위하였다. 임인(단기 1355, BCE 979)년에 아들 물한勿韓을 구월산에 보내어 삼성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삼성묘三聖廟는 상춘의 주가성朱家城에 있다. 해수가 세상을 뜨자 기미(단기 1372, BCE 962)년에 아들 물한勿韓(41세 왕)이 즉위하였다. 물한이 세상을 떠나자 기묘(단기 1392, BCE 942)년에 아들 오문루奧門婁(42세 왕)가 즉위하였다. 오문루가 세상을 떠나자 정묘(단기 1440, BCE 894)년에 아들 누사婁沙(43세 왕)가 즉위하였다. 무인(단기 1451, BCE 883)년에, 누사婁沙가 천조天朝(진조선 조정) 에 들어가 천왕(30세 내휴단군)을 뵙고, 태자 등올登屼과 소자少子 등리登里와 함께 별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태자 형제에게 이렇게 노래를 지어 올렸다.
형은 반드시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작은 일로써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마소.
말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지어 가니
방 안에서는 비록 즐거우나
이간하는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
2. 삼한 전역에서 시행된 왕문의 이두법
[이두법의 창시자 왕문]
누사婁沙가 세상을 떠나자 을미(단기 1468, BCE 866)년에 아들 이벌伊伐 (44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신(단기 1469, BCE 865)년에 한수漢水(지금의 대릉하)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어 올리니 천왕(31세 등올단군)께서 기뻐하시고 삼한에 명하여 시행하게 하셨다.
[주나라 격퇴와 흉노의 조공]
기미(단기 1492, BCE 842)년에 상장上將 고력합高力合을 보내어 회군淮軍과 합세하여 주周나라를 격퇴하였다. 이벌이 세상을 뜨니 신유(단기 1494, BCE 840)년에 아들 아륵阿勒(45세 왕)이 즉위하였다. 병인(단기 1499, BCE 835)년에 주나라의 이공二公(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아륵이 세상을 떠나고 기축(단기 1522, BCE 812)년에 아들 마휴麻休, 일명 마목麻沐 (46세 왕)가 즉위하였다. 마휴가 세상을 떠나자 병진(단기 1549. BCE 785)년에 아들 다두多斗 (47세 왕)가 즉위하였다. 다두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1582, BCE 752)년에 아들 내이奈伊(48세 왕)가 즉위하였다. 내이가 세상을 떠나자 기미(단기 1612, BCE 722)년에 아들 차음次音(49세 왕)이 즉위하였다. 차음이 세상을 떠나자 기사(단기 1622, BCE 712)년에 아들 불리不理(50세 왕)가 즉위하였다. 불리가 세상을 떠나니 을사(단기 1658, BCE 676)년에 아들 여을餘乙 (51세 왕)이 즉위하였다. 여을이 세상을 떠나고 갑술(단기 1687, BCE 647)년에 엄루奄婁(52세 왕)가 즉위하였다. 무인(단기 1691, BCE 643)년에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감위甘尉(5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감위가 세상을 뜨자 무신(단기 1721, BCE 613)년에 아들 술리述理(54세 왕)가 즉위하였다. 술리가 세상을 떠나자 무오(단기 1731, BCE 603)년에 아들 아갑阿甲(55세 왕)이 즉위하였다.
경오(단기 1743, BCE 591)년에 천왕(37세 마물단군)께서 사신 고유선高維先을 보내어 환웅천황 · 치우천황 · 단군왕검 세 분 성조의 상像을 반포하여 관가에서 받들게 하셨다.
3. 노자는 풍이족 혈통
아갑이 세상을 뜨고 계유(단기 1746, BCE 588)년에 고태(56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태가 세상을 떠나자 정해(단기 1760, BCE 574)년에 아들 소태이蘇台爾(57세 왕)가 즉위하였다. 소태이가 세상을 떠나고 을사(단기 1778, BCE 556)년에 아들 마건馬乾(58세 왕)이 즉위하였다. 마건이 세상을 떠나자 병진(단기 1789, BCE 545)년에 천한天韓(59세왕)이 계승하였다. 천한이 세상을 떠나고 병인(단기 1799, BCE535)년에 아들 노물老勿(60세 왕)이 즉위하였다. 노물이 세상을 떠나자 신사 (단기 1814, BCE520)년에 아들 도을道乙(61세 왕)이 즉위하였다.
[노자는 순수한 동이족 혈통-남방 문화권에 전수된 한 사상]
계미(단기 1816, 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孔丘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禮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이다. 노자는 후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를 경유하여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곳 백성을 교화하였다.
[천지인과 오행과 한으로 지은 번한 왕들의 이름]
도을이 세상을 떠나고 병신(단기 1829, BCE 505)년에 아들 술휴述休(62세 왕)가 즉위하였다. 술휴가 세상을 떠나자 경오(단기 1863, BCE 471)년에 아들 사량沙良(63세 왕)이 즉위하였다. 사량이 세상을 떠나자 무자(단기 1881, BCE 453)년에 아들 지한地韓(64세 왕)이 즉위하였다. 지한이 세상을 떠나자 계묘(단기 1896, BCE 438)년에 아들 인한人韓(65세 왕)이 즉위하였다. 인한이 세상을 떠나자 신사(단기 1934, BCE 400)년에 아들 서울西蔚(66세 왕)이 즉위하였다. 서울이 세상을 떠나고 병오(단기 1959, BCE 375)년에 아들 가색哥索(67세 왕)이 즉위하였다. 가색이 세상을 떠나자 경진(단기 1993, BCE 341)년에 아들 해인解仁(68세 왕)이 즉위하였는데, 일명 산한山韓이라 한다. 이 해에 해인이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4. 70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 사람 기후
신사(단기 1994, BCE 340)년에 아들 수한水韓(69세 왕)이 즉위하였다. 임오(단기 1995, BCE 339)년에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번한성인 안덕향, 지금의 탕지보)을 공격하고 험독險瀆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수유 사람 [須臾人] 기후箕詡가 젊은 청년[子弟]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우니 군세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에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또 한 무리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계성薊城(연나라 수도, 지금의 하북성 북경) 남쪽에서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공자公子를 인질로 보냈다.
[번조선의 왕통 단절과 연나라의 강성]
무술(단기 2011, BCE 323)년에 수한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후가 명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 이 해에 연이 왕이라 칭하고 장차 침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기후箕詡도 명을 받들어 왕호를 써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비로소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5. 기비의 도움으로 해모수(북부여 시조)가 대권을 잡아 고조선을 계승함
기후가 세상을 뜨자 병오(단기 2019, BCE 315)년에 아들 기욱箕煜(71 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욱이 세상을 떠나고 신미(단기 2044, BCE 290) 년에 아들 기석箕釋(72세 왕)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각 주와 군에 명하여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일시에 선발된 자 가 270명이었다.
기묘(단기 2052, BCE 282)년에 번한 왕이 친히 교외에서 밭을 갈았다.
을유(단기 2058, BCE 276)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기석이 세상을 떠나고 경술(단기 2083, BCE 251)년에 아들 기윤箕潤(73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윤이 세상을 뜨자 기사(단기 2102, BCE 232)년에 아들 기비箕丕(74세 왕)가 즉위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왕, 기준]
일찍이 기비가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 치려는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箕丕 그 사람이었다. 기비가 세상을 떠나고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아들 기준箕準(75세 왕)이 즉위하였다. 정미(단기 2140, BCE 194)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衛滿에게 속아 패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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