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를 지은 이암李嵒 (1297~1364) (단군세기 서문 보기)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의 25세 충렬왕 때(1297) 경상도 고성에서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를 배출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 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輪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한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이가 바로 손자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가 학동초당鶴洞草堂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고조선 초대 단군 때 쌓은 참성단에 올라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이암은 외래풍이 뒤덮고 있던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려는 큰 뜻을 품어 "어두운 우리 동방의 거리에 누가 밝은 등불 비출 것인가. 우리 동방 세계의 평안을 위해 지금 내가 나서리"라는 시를 지었다.
이암은 17세(1313, 고려 26세 충선왕 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경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관리하는 비서성秘書省의 교감校勘에 임명되었다(1314). 그때 원나라가 원래 송나라에서 비장秘藏하던 4천 권의 책을 보내왔고, 이암은 비서성의 낭'郞’과 '주부主簿'로 승진하면서 그 모든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렇게 책에 묻혀 10년을 보내던 중, 조정을 이간하고 무시하던 간신배가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에 귀속하기를 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충숙왕 10년(1323)에 류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국호 '고려'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일개 성省이 되고자 하는 청원을 원의 조정에 제출하였고, 원으로부터 '원나라의 삼한성三韓省으로 한다'는 칙령이 내려온 것이다. 이에 이암은 "우리나라는 환단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天帝)이라 칭하였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라는 통분의 상소문을 올렸다. 비록 하급 관리의 신분이지만, 이암은 고려가 바로 천자의 나라이므로 결코 중국의 여느 제후국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고하며, 고려의 위호를 낮추자는 간악한 무리의 죄를 엄히 다스릴 것을 주청한 것이다.
이 무렵 고려의 왕권과 국권은 밖으로는 원의 내정 간섭으로, 안으로는 원과 결탁한 간신배의 횡포로 그 위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후 충혜왕이 등극하고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는 난세 속에 이암은 강화도에 귀양을 갔다. 어린 시절에 수학했던 강화도에 죄인의 신분으로 다시 왔을 때 이암의 나이는 36세였다. 이암은 그곳에서 주역을 연구하고,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에 관한 책을 섭렵하였다. (이암의 친척인 백이정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고 귀국할 때 유가 경전을 비롯한 수많은 도서를 구입하여 왔다. 이암은 강화 유배시 이 새로운 도서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유배 생활동안 경사經史와 역학은 물론 천문, 풍수, 지리에 정통했다. 이익주,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1집 156~157쪽)
3년 후(1335) 유배에서 방면되어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이암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명李茗과 범장을 만나 한민족사 회복을 위한 사서 집필을 결의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소전素佺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고서적들을 나누어 받았다. 그것은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기록한 것이었다.
소전거사의 실체 역시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신과 하나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의 전佺 자를 이름에 쓴 것으로 보아 신교문화의 전도佺道에 회통한 인물로 짐작된다. 이명, 범장, 이암에게 비기秘記를 전한 그는 한민족의 창세 역사를 되찾게 한 배후의 손길이다. 행촌 이암은 소전거사에게 들은 이야기와 전수 받은 책을 바탕으로 환단 시대의 도학道學을 논한 「태백진훈眞訓」과 「단군세기」를, 복애거사 범장은 「북부여기」를, 청평거사 이명은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지었다. (진역유기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지은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보건대, 진역유기도 단군세기 북부여기와 같이 한민족의 상고역사와 문화의 본래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일 것이다.)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된 다음 해(1340), 이암은 복직하여 44세의 나이에 도승지(밀직사密直司의 지신시知申事)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왕명의 출납을 맡은 추밀원의 중책을 맡으면서 단숨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암 은 왕의 총애를 바라지 않고 왕의 정치적 파행을 바로잡는 데 힘을 쏟았다. 그 후 또 한 차례의 유배와 복직을 겪은 후, 공민왕 때에는 철원군에 봉해지고(1352) 서연書筵에서 경서와 예법에 관한 시독待讀을 맡게 되었다.
이암은 다음 해에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여 강원도 청평산으로 들어갔다. 이암은 왜 돌연 관직에서 물러나 청평산으로 들어갔을까? 공민왕을 옹립한 공신들의 방자한 언행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청평산에는 소전거사로부터 비서를 같이 전수받은 이명이 살고 있었다.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보아 노년에 접어든 57세의 이암은 평생 준비해 온 '환단 시대의 역사서 집필'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처사의 삶을 살기로 하고, 그 은거지로 이명이 살던 곳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암은 이때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은거한 지 5년이 되던 해 (1358)에, 개혁정치를 이끌어 나갈 경륜 있는 원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공민왕이 이암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이암을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守門下待中에 임명하였다.
이암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공민왕을 보필하기 시작한 그 다음 해, 원에 반발하여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인 홍건적이 침략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이 최고 사령관으로 명하여 급파한 인물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4만 명의 적을 물리쳤다.
홍건적의 침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1361년에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와 지금의 황해도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라 복주福州(현 경북 안동)에 이르렀는데, 이때도 이암은 공민왕의 곁을 지켰다. 수도 개경이 적에게 함락된 지 54일 만에 탈환되고(1362), 공민왕이 '흥왕사의 변'으로 암살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환도한(1363) 후, 이암은 마침내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때 이암의 나이 67세였다. 17세에 급제하여 무려 50년 동안 여섯 임금(26세 충선왕~31세 공민왕)을 모시며 격동의 삶을 살았던 이암은 드디어 관복을 벗고 야인이 되었다. 그 해(1363) 2월에 강화도로 들어가 홍행촌紅否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짓 고 스스로 '홍행촌수紅杏村叟(홍행촌의 늙은이)'라 불렀다.
이암은 여생을 「단군세기」 완성에 모두 바쳤다. 언제부터 집필하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단군세기 서문에 의하면 홍행촌수로 살기 시작한 그해 10월에 「단군세기」를 완결하였다. 망해 가는 국운에 비분강개하며 동북아의 종주였던 옛 조선의 영화로운 역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저술한 역작을 비로소 완성한 것이다. 서문으로 글을 마감한 후 겨우 일곱 달이 지난 이듬해 5월 이암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편치 않은 몸으로 생애 마지막 정력을 다 쏟아 단군세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이암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식을 갖춘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그의 글씨는 여말선초의 국서체國書體가 될 정도로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라의 안위를 뒷전으로 미루고 사리사욕에 급급하던 권문세가들과 달리, 재물과 권세를 탐하지 않고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켰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지어 고조선 2,096년 역사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서문에서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피력하였고 국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구국의 길임을 토로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참된 삶은 무엇인가' 하는 인간론의 명제를 명쾌한 필치로 풀어 냈다. 또한 신교의 우주론을 천지인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신교 사상의 정수를 뽑아 신교의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첫 행부터 마지막까지 논리정연한 구조로 정리된 「단군세기」 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만고의 명문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원형문화, 신교 역사관의 정립자이다.
[출처: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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