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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단고기 해제 등

원동중元童仲-삼성기 하 저자

by 광명인 2024. 6. 5.

『삼성기』하를 지은 원동중元童仲 (삼성기 하 전문보기)

원동중은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 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씨는 3개 파가 있는데 어디에도 동중이라는 자字나 호로 나오는 인물은 없었다. 대신 원씨 가문에 “원동중이 원천석이다”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원천석(1330- ?)은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고려 말에 진사가 되었으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며 은둔생활을 하였고, ‘교 · 불교 · 도교는 원래 한 이치이지만, 각기 맡은 바 업業이 있다’는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을 주장했다고 한다. 『삼성기』상과 『삼성기』하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고 쓴 것처럼 되어 았다. 안함로의 『삼성기』가 먼저 발간되고 그 책을 읽은 원동중이 부족한 내용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제 2의 『삼성기』를 집필한 것처럼 두 권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삼성기> 下의 저자 '원동중'은 '원천석'이다.

여말선초의 대학자였던 운곡 원천석 선생이 「환단고기」 <삼성기> 下를 쓴 '원동중'이라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중국에 사대를 취할 수 밖에 없던 엄혹한 시절에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 역사를 말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하게 금기 되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원천석 선생에 대한 기록에 나옵니다.

[운곡 원천석]

1330(충숙왕 17)∼?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원천석이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이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주 원천석 묘역 안내문

원주에 있는 원천석 선생 묘소의 안내문에는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國史)와 저촉된다고 하여 후손들이 소각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야사(野史)란 무엇일까요?

두문동 72현이기도 했던 원천석 선생의 절개와 학문은 크게 칭송되었던듯합니다. 원천석 선생이 돌아가시고 200년이 지난 뒤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게된 박동량(朴東亮, 1569년 ~ 1635년)은 평소에 절개로 이름 높은 운곡 선생을 흠모해 왔고 그 분의 저서를 보고싶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원주에서 자손을 만나 시문을 전해받고보니 듣던 바와 많이 달랐습니다. 내용도 다르고, 양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손에게 전해받은 것만으로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 <운곡 행록 시사>의 서문에 실려있습니다. 이때부터 '원천석' 선생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운곡 행록 시사서]

원천석 선생이 자손에게 남긴 글중에서 일부를 펴낸 <운곡 원천석 시사>의 서문으로 박동량(1569년~1635년)이 씀.

자손되는 이들이 선생의 저서를 오래도록 비밀로 함으로써 얻어본 이가 없었고 선생의 이름마저 뒷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백 년이 지난 오늘날 내가 관찰사로 이 고을에 이르러 마침 선생의 남기신 운곡시집을 얻어보니 비록 많지 않은 저서로서 과거에 들은 바와 다르기는 하나 모두가 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 <운곡 행록 시사> 序

[​화해사전]

<북부여기>의 저자인 복애거사 범세동은 뜻을 함께하는 동지이자 절친한 벗인 운곡 원천석과 함께 문집을 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사전>입니다.

<화해사전> 운곡 원천석 총단, 복애 범세동 편집

[원천석의 필명 동중]

이러한 정황으로 봤을때 원천석 선생은 <삼성기>를 쓴 원동중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런데, 그는 왜 '원동중元童仲'이라는 필명을 썼던 것일까요?

<러시아 환단고기 북콘서트> 안경전 종도사님 말씀을 보면, 원천석은 동호(董狐 춘추시대 진(晉)의 사관(史官). 일명 남동(南董). 엄정하며 직필로 바르게 썼으므로 공자가 양사(良史)라 칭찬했음.)를 흠모하여 그의 이름을 필명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삼성기> 下의 저자 '원동중'은 '원천석'이다.|작성자 흑룡(원문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