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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단군세기

단군세기: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by 광명인 2023. 7. 29.

[북한은 1993년 평양 강동현에 위치한 대박산 기슭에서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과 함께 왕릉을 발굴하고, 이곳을 거대하게 개건改建하여 현재 단군릉으로 성역화하고 있습니다. 다분히 북한의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며, 북한은 무덤의 연대를 배달국 후반기로 높여 잡고 이긴 하지만, 사실 대박산의 단군릉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 중종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고종실록 등에 단군묘 참배와 제사를 올린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강동현 ‘박달곶촌’이라는 마을에 단군릉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는 기록이 나오고,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동에는 두 자리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는 이를 매우 구체적으로 "재위 16년 정축(BC 2084)년 7월에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실 때 풍류강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를 지냈다(七月 帝南巡 歷風流江 到松壤 得疾尋崩 葬于大博山).”라고 기록하여, 이곳이 5세 구을단군의 묘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단군릉
북한이 개축하기 이전의 단군릉

구을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5099, 신시개천 1799, 단기 235, BCE 2099)년이다. 임금께서 태백산에 단을 쌓으라 명하시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태백, 불함, 백산 등으로 불렸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

재위 2년 계해(단기 236, BCE 2098)년, 5월에 황충이 크게 번져 밭과 들에 가득 찼다. 임금께서 친히 밭과 들을 돌아보며 황충을 잡아 입에 넣어 삼키시고 삼신께 이를 멸해 주시기를 비니 과연 며칠 만에 황충이 전멸하였다.

재위 4년 을축(단기 238, BCE 2096)년에 갑자를 으뜸으로[시용갑자 始用甲子] 사용하여 책력을 만드셨다.

육십갑자는 천간과 지지를 조합하여 만든 간지 60개인데, 60년을 주기로 다시 같은 해가 된다. 그런데 단군세기는 갑자년을 시작으로 한 것이 5세 구을단군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재위 8년 기사(단기 242, BCE 2092)년, 신독(身毒)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가에 도착했다.

구한말 고종이 천제를 지내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위해 지은 3단의 원구단과 3층의 황궁우의 복원된 모습이다. 하늘에 천제를 지내는 대부분의 제단들은 3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민족 고유의 경전 천부경에 입각한 삼신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재위 16년 정축(단기 250, BCE 2084)년, 임금께서 친히 장당경에 순행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하시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으셨다. 이 해(환기 5114, 신시개천 1814, 단기 250, BCE 2084) 7월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실 때 풍류강을 거쳐 송양에 당도하여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하시므로 대박산에 장사를 지냈다. 우가 출신 달문이 무리의 추대를 받아 대통을 이으셨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사자使者: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시대의 벼슬 이름

황충蝗蟲: 누리(메뚜기과 곤충)의 한자 명칭,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므로 이동할 때는 그 무리가 해를 가린다. 또 무리가 앉은 곳에는 한 순간에 풀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시용갑자始用甲子: 환웅천황이후로 계해를 60갑자의 첫머리로 삼았으나 5세 구을단군 때부터 비로소 지금과 같이 갑자를 60갑자의 첫머리로 하였다.

신독身毒: 인도의 옛 이름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 평양직할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허목의 동사,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유형원의 여지지 등에 대박산 단군릉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5세 구을단군의 능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연대를 배달국 후반기로 높여 잡고 있다.

환화桓花: 환화는 환국 시대의 국화였다. 천지화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무궁화이다. 국자랑이 이 꽃을 머리에 꽂고 다녔기 때문에 화랑花郞 또는 천지화랑이라고도 하였다. 산해경의 해외동경에는 “군자국은 그 북쪽에 있는데, 관을 쓰고 검을 찼으며, ,,, 훈화초(무궁화)가 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여기서 군자국은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꽃과 더불어 새의 깃털을 꽂기도 했는데 그 모자를 오우관烏羽冠이라 했다. 이러한 유풍은 깃털로 모자를 만드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풍습에도 남아 있다.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 환단고기 역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