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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단고기 해제 등

안함로安含老-삼성기 상 저자

by 광명인 2024. 6. 4.

『삼성기』상을 지은 안함로安含老 (579~640) (삼성기 상 전문보기)

안함로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찬伊飡을 지낸 시부時賦의 손자로 안홍安弘 법사, 안함安含 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신라십성十聖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각훈覺訓이 삼국 시대 이래 유명한 고승들의 전기를 정리한 「해동고승전」은 안함로의 생애를 이렇게 전한다.
 
안함로는 22세(600, 진평왕 22)때 승려 혜숙惠宿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수나라에서 온 사신과 함께 수나라로 건너 가서 문제文帝(재위 581~604)를 직접 만났다. 그곳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며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부처나 보살이 설교한 문구)을 공부하고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도 익혔다. 4년 만에(605) 공부를 마치고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참서 한 권을 지었다. 정확한 이름이 전하지 않는 이 참서는 뜻이 깊이 숨겨져 있어 연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楊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안함로가 태어나면서 도리를 깨달은 인물이라 하였다. 안함로는 일찍부터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세속의 속박을 벗어나서,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안함로가 입적한 그 달에 신라 사신이 중국에서 돌아오다가 우연히 법사를 만나서, 푸른 물결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잠시 후 법사는 기쁜 모습으로 서쪽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안함로가 사물에 통하고 지혜가 밝았다는 것은 『삼국유사』 「탑상塔像」 황룡사 9층탑 조에 전하는 다음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束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한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안홍, 즉 안함로는 신라의 국운을 미리 내다보고 그 대비책으로 황룡사에 9층탑
을 세우라 하였다. 그의 예지에 따라 세워진 황룡사 9층탑은 신라의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안함로가 나라의 앞일을 내다 본 것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천리 밖에 나가 싸우
던 신라 군사가 전쟁에 패할 일, 삼국통일이 이루어질 해, 왕자 김인문金仁問(문무왕의 아우, 629~694)이 고국에 돌아올 해 등을 예견하였는데,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사물의 이치를 통하고 불법을 깨쳤을 뿐만 아니라 신통력으로 나라를 구한 그는 시대의 도승道增으로서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이 틀림없다. 

안함로는 역사에도 해박하여 그때까지 전해 오던 고유 사서에서 한민족사 국통 맥의 진액을 뽑아 『삼성기』를 저술하였다. 안함로가 언제 책을 썼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중국에서 귀국하여 백성과 조정을 위해 불법을 펼친 30여 년의 세월 중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성기』 의 몇 구절만 보더라도, 안함로는 뛰어난 학식을 갖춘 지성이요, 불교를 초월하여 유불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 최고의 도승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승려 안함(安含)은 속성이 김씨요, 시부이찬의 손자이다. 나면서부터 도리를 깨달았고, 성품이 맑고 허심탄회하였다. 의지가 굳고 깊고 아름다운 도량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마음대로 세상을 두루 돌아 다니는 것에 뜻을 두어, 풍속을 살펴보고 널리 교화하였다. 진평왕 22년(600)에 고승 혜숙(惠宿)과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고, 뗏목을 타고 이포진(泥浦津)으로 가는 도중 섭도(涉島)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뗏목을 되돌려서 물가에 대었다. 이듬해 (601)에 임금이 교지를 내려 법기(法器)를 이룰 만한 자를 뽑아 중국에 파견하여 학문을 닦게 하고자 하였을 때, 마침내 법사가 명을 받들어 가게 되었다. 이에 신라 사신과 동행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의 조정으로 갔다. 천왕이 불러 친히 보고 크게 기뻐하며 칙명으로 대흥성사에 머물게 하였다. 스님은 단시일 내에 깊은 뜻을 환히 깨달았다.

이에 화산(華山)에서 선장(仙掌)까지 10개의 역이나 되는 길을 하루 낮에 갔다 돌아오니 누가 저녁 북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진령(秦嶺)에서 제궁(帝宮)까지 천리나 되는 땅을 하룻밤 사이에 오르니 어찌 새벽 종소리를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십승(十乘)의 비법과 ≪법화 현의≫의 진실한 문장을 5년 동안에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뒤 27년(605)에 우전(于阗)의 사문 비마진제(Vimalacinti)와 사문 농가타(Nangata) 등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서역의 호승이 직접 계림(雞林)으로 온 것은 대개 이때부터 였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말하기를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5)에 태어났다. 이 해에 동방의 성인 안홍법사가 서역의 세 사람의 삼장(三藏)과 중국 승려 두 사람과 함께 당나라에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주석하여 말하기를 "북천축오장국의 비마라진제의 나이는 44세, 농가타의 나이는 46세, 마두라국의 불타승가의 나이는 46세였다. 쉰 두 나라를 경유하여 비로소 중국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해동으로 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 뵤녀경≫을 번역해 내니, 신라의 승려 담화가 받아섰다. 얼마 안 되어 중국 승려들은 글을 올려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므로 왕은 허락해 보냈다"하였으니 그 안홍이란 아마 이 안함화상일 것이다. 또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37년(576)에 안홍이 진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고, 호승 비마라 등 두 사람과 함께 돌아와서 ≪능가경≫, ≪승만경≫ 및 부처님 사리를 바쳤다"고 한다. 진흥왕 말년에서 진평왕의 건복년까지는 거의 50년의 간격이 있는데 어찌 삼장이 온 전후가 이와 같은가? 어쩌면 안함과 안홍은 실제로 두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동행한 삼장이 다르지 않고 그 이름도 다르지 않으므로 여기 합해서 전기를 만드는 것이다.


또 서역의 삼장이 가고 머무르고 마친 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화상을 본국으로 돌아온 뒤 참서 한 권을 지었는데, 그 활자가 흩어져 있어 만든 사람을 알기가 어렵고, 그 종지가 깊이 숨겨져 있어 이치를 찾는 사람이 연구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부엉이가 경문의 글이 희미하여 잘 알 수 없다." 또 화상은 "제일 여주를 도리천에 장사지낼 일, 천리에 나아가 싸우던 군사가 패할 일, 사천왕사가 이루어질 일, 왕자가 고국에 돌아올 해, 대군의 삼국통일을 할 해 등을 말하였다. 이것은 모두 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예언한 것이었는데, 법사는 똑똑히 눈으로 본 것처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선덕왕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니 향년 62세였다. 그 달에 나라의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우연히 법사를 만나니 그는 푸른 물결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기쁘게 서쪽으로 향해 가더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마치 계단을 오르듯 하고, 물 위에 앉는 것을 마치 땅 위를 다니듯 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림인 설모(薛某)가 왕명을 받들어 비명을 지었다. 그 비명에 말하기를 "황후 [선덕여왕]를 도리천에 장사지내고, 사천왕사를 세웠다. 괴상한 새가 밤에 울고, 군사들이 모두 아침에 죽었다. 왕자는 관문을 건너 중국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5년간 외지에서 보낸 후 30세에 돌아오니, 뜨고 잠기는 윤전(輪轉)을 저나 나나 어찌 면하겠는가? 나이 62세에 만선도량에서 입적하니, 사신이 바닷길로 돌아오다가 스님을 만나니 물 위에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해 가더라"하였다. 비문에 이끼가 침식하여 열 자(字)가 분명하지 못하며, 4, 5차는 없어졌다. 대략 볼 수 있는 것만을 취하여 짐작으로 문장을 만들었다. 대개 다른 문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또한 그가 남긴 자취를 짐작할 수 있다.


찬하여 말한다. 스님의 신통과 해탈은 가거나 오거나 자재로워서 큰 보살의 한가한 일이니, 어찌 그것에 관한 것을 글이나 말로써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처음으로 조정에 들어가, 서역의 삼장과 함께 몸소 진원을 나누어 법의 고동을 불고 법의 비를 내려 마치 강물이 바다 구석을 적시듯이 참으로 법편 성인이었다. 글자를 세 번 옮겨 적으니 까마귀 오(烏)자가 말 마(馬)자로 되었다. 나는 안함 안홍 두 글자에 하나의 혼종이 있었음을 의심한다.

출처: 해동고승전(자료 출처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