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단군(檀君)이란 용어는 총 104회 발견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단군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 환기 4865, 신시개천 1565, 단기 원년, BCE 2333)과 동일한 시기로 기록하고 있어 단군세기의 기록 내용과 일치한다. 참고로 삼국유사는 단군의 건국연대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경인(庚寅)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 유학자들은 중화주의 사관에 영향을 받아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를 함께 언급하고 위만조선도 함께 인정하고 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 송미자세가에 기록된 '武王乃封箕子於朝鮮(무왕내봉기자어조선)'에 따라 기자조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에 대한 사대, 모화주의 의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기사도 드물게 보인다. 단군왕검의 수도 평양의 위치에 대한 인식은 제각각인 듯하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발췌된 7개 기사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검색링크]
1. 평양 부윤 윤목이 올린 편의 사목 8조목과 이에 대한 의정부의 검토 의견(원문보기 클릭)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9일 기축 1번째기사
평양(平壤)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 지방(西北地方)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서도(西都)’라 이름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사신과 칙명(勅命)을 맞이하는 것이 서울[京師]에 다음이고, 사람 사는 것이 조밀하여 나라의 큰 울타리가 된 지 1천여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안주(安州)로 영(營)을 옮기고, 평양부의 노비(奴婢)를 삭감한다는 의논이 있으니, 인민이 실망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평양은 서북도(西北道)의 중앙(中央)이 아니므로 공무(公務) 왕래에 병폐가 있다.
2.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변계량의 상서문(원문보기 클릭)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1일 신유 2번째기사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 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3.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강화 도호부(원문보기 클릭)
세종실록 148권
진산(鎭山)은 고려 마리산(摩利山)이다. 【부(府) 남쪽에 있다.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예로부터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비로소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재궁 벽 위에 ‘동(東)’자 운(韻)의 시(詩)가 있으니, 태종(太宗)이 잠룡(潛龍) 때에, 일찍이 대언(代言)이 되어서 이곳에서 재숙(齋宿)할 때 이 시를 지은 것인데, 지금 널에 새기고 금으로 메웠다. 】 전등산(傳燈山) 【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 〈강화〉부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곧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이요, 해풍군(海豐郡)의 남쪽이다. 동서가 32리, 남북이 64리이다.
4. 지리지 / 평안도 / 평양부(원문보기 클릭)
세종실록 154권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 【곧 평양부(平壤府)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정미 【유송(劉宋) 태종(太宗) 원가(元嘉) 4년.】 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으로 이도(移都)하였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 【총장(摠章) 원년.】 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장수 이적(李勣)을 보내어 왕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나라가 멸망되고 신라에 통합되었다.
5. 노비 종군 병사 유구국에 대한 지나친 예물 등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서(원문보기 클릭)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8월 6일 기해 5번째기사
중국(中國)은 당요(唐堯) 시대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무릇 23대(代)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겨우 7대(代)뿐입니다. 이는 다만 화이(華夷)의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하고 야박(野薄)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가(大家) 세족(世族)들이 중외(中外)에 포열(布列)하였으므로, 비록 간사한 영웅(英雄)이 그 사이에서 넘겨다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6.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다(원문보기 클릭)
성종실록 15권, 성종 3년 2월 6일 계유 7번째기사
1. 속언(俗諺)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우(祠宇)는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그 뒤에 절 아래 작은 봉우리[小峯]로 옮겼고,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대증산(大甑山)과 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1.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경태(景泰) 경오년 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重創)하고, 무인년 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丹靑)을 베풀었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하윤(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7. 이수병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원문보기 클릭)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30일 양력 3번째기사
우리나라는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와서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며 기자(箕子)의 도(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번 변화하여 중화(中華)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우리 조종(祖宗)의 성학(聖學)은 장횡거(張橫渠),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학문을 직접 이어받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높이 숭상하였습니다.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길 수 있게 된 지가 지금까지 4,000년에 이르렀는데 오직 그 황통(皇統)의 호칭만은 옛날에도 미처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거룩한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왔는데, 우리나라가 명을 받고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의 왜란(倭亂)을 당해서는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셨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은혜로는 실로 아버지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천리강토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황제의 덕에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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