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은 독립운동사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1919년을 독립운동의 전환점이자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게 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운동은 민족 자결주의의 확산,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 고종 황제의 서거, 2·8 독립선언 등 국내외 여러 요인이 맞물려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주체가 소수 양반 지식층에서 민중 전체로 확대되었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공화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중국의 5·4 운동의 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세계사적으로도 의의도 남겼습니다.
아래는 이성우 교수의 삼일 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강연의 핵심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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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삼일 운동의 배경은 크게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 그리고 민족적 각성을 촉발한 특정 사건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배경은 국제 정세의 변화, 특히 민족 자결주의의 대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전한 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강화 조건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했습니다. 이는 각 민족이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었으며,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들은 독립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문제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패전국(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승전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그리고 일본도 승전국 측에 있었음)의 식민지에는 예외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에게는 사실 크게 적용되지 않았지만, 세계 최고 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민족 자결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고무가 되었고, 독립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번째 배경은 일제의 식민 통치와 수탈 정책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불만입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를 실시했습니다.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통치 중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하고 억압적인 통치였습니다. 특히 1910년대 일제의 경제 정책인 토지 조사 사업은 삼일 운동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일제는 식민 통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세를 확실하게 걷어들이고자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신고주의 원칙'을 적용하여 스스로 기한 내에 신고한 토지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 소유로 귀속시켰습니다. 당시 일본에 대한 반감과 홍보 부족, 그리고 전통적인 토지 개념(국유지, 관청 소유, 공동 소유, 문중 토지 등 신고 주체가 불분명하거나 없는 경우) 때문에 신고하지 못한 토지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결과, 조사 사업이 끝난 후 조선인 소유 토지의 50% 이상이 일본인 소유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땅을 갑자기 빼앗긴 식민지 조선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독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대다수 민중이 삼일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배경은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1919년 1월 21일, 건강했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드시고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조선 민중들은 일제가 독살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시신에 나타난 검은 줄무늬, 이와 혀가 녹아내린 현상 등 독살의 정황이 의심되었고, 비록 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있지만 당시 민중들은 독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슬픔과 함께 일제에 대한 분노를 크게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배경은 2·8 독립선언입니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2월 8일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는 식민 본국의 수도에서 식민지 청년들이 벌인 당당한 독립 의지 표명이었고,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독립운동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선언서의 투쟁적인 내용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삼일 운동의 전개 과정
이러한 국내외적 배경 속에서 삼일 운동은 추진되었습니다. 운동의 주요 주체는 무단 통치 시기에도 비교적 활동이 가능했던 종교계와 학생층이었습니다. 종교계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세 종교가 참여했으며, 천도교(손병희 등)가 먼저 행동을 개시하고, 이후 기독교(이승훈 등)와 불교(한용운, 백용성 등)가 합류했습니다. 학생층(강기덕, 김원벽 등)도 자체적으로 삼일 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운동을 기획하며 천도교는 세 가지 원칙, 즉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세웠습니다. 대중화는 특정 지도자나 영웅이 아닌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일원화는 여러 주체가 하나의 조직체로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비폭력화는 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만큼 폭력성을 배제하자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무기를 제공할 수 없는 객관적인 한계와 계몽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삼일 운동이 끝까지 비폭력으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3월 말 이후에는 자기방어 차원에서 폭력성을 띠기도 했습니다.
추진 주체들이 나뉘어 있었기에 일원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결국 종교계와 학생층이 연합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들이 연합하여 민족 대표 33인을 구성하고, 독립선언서(최남선 작성)를 보성사에서 2만 1천 장 인쇄했습니다. 당초 운동일은 고종 황제의 인산일(3월 3일)에 맞춰 전국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했으나, 장례 행렬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날짜를 앞당겼고, 일요일(3월 2일)을 피하려다 최종적으로 3월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원래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많은 군중이 모일 경우 폭력화될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했습니다.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29인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했으나, 탑골 공원에 모여 있던 대다수 군중은 민족 대표가 오지 않자 동요했고,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 씨가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오후 2시 30분경 탑골 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삼일 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평양, 진남포 등 북한 지역과 서울에서 동시에 시작되었고, 이후 5월 말까지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시위는 주로 서울 등 도시에서 농촌으로, 철도 주변에서 내륙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전국 211개 군에서 1,542회 이상 일어났고, 202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학생, 지식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농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한 전 민족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의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로, 학생이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제의 탄압과 비폭력주의의 한계
일제는 삼일 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2개 사단급 병력을 동원하여 학살, 방화, 약탈 등을 자행했습니다. 일제 기록만으로도 피살자가 7천 5백 명, 부상자가 1만 6천 명, 체포자가 4만 5천 명에 달하며, 이는 최소한의 숫자일 것으로 보입니다.
삼일 운동의 비폭력 원칙은 초기에는 지켜졌으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직면하며 한계를 보였습니다. 총칼로 민중을 억압하는 일제에 맞서기 위해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 군청 등을 공격하며 저항했고, 이는 일제 탄압에 대한 자기방어 차원에서 나타난 폭력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 중심의 민족 대표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은 이상적이었으나, 현장에서 직접 탄압을 겪는 대다수 민중의 투쟁은 혁명적 성격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일 운동의 역사적 의의
삼일 운동은 우리 민족과 세계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가집니다.
첫째,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했습니다. 이전에는 독립운동이 일부 지도자나 영웅들의 몫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삼일 운동을 통해 대다수 민중이 직접 독립 의지를 표출하고 운동에 참여하면서, 다 함께 힘을 모으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째, 독립운동 참여 주체가 대중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삼일 운동에는 종교인,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고, 이를 통해 일반 대중 스스로가 독립운동의 주체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삼일 운동 이후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여성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도 대중이 독립운동의 주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삼일 운동 이전에는 왕정 복고를 추구하는 복벽주의와 국민이 주인 되는 공화주의 노선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일 운동이 대다수 민중의 참여로 전개되면서, 왕실 중심의 복벽주의 노선은 쇠퇴하고 국민이 주인 되는 공화주의 노선이 대세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일 운동은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선언이었습니다. 독립국임을 선언한 만큼, 이를 운영할 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삼일 운동을 통해 확립된 공화주의 노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일제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무장 투쟁 포함)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삼일 운동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다섯째,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제는 총칼로 억압하면 조선인이 순응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전국적인 만세 운동에 직면하며 무단 통치만으로는 식민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따라 억압적인 무단 통치에서 약간의 유화책을 포함한 문화 통치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삼일 운동 소식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고, 특히 중국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중국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중국 5·4 운동 발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인도 간디의 비폭력·비협조 운동이 우리 삼일 운동의 비폭력 노선을 참고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삼일 운동은 단순한 일회성 시위가 아닌,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와 수탈에 항거하고 민족 자결의 의지를 천명한 전 민족적인 독립 항쟁이었습니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희생을 낳았고, 비폭력 원칙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삼일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독립운동의 주체를 대중으로 확대시키며,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독립운동 노선을 확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삼일 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며,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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