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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

독립운동사-6 아나키즘 독립운동

by 광명인 2025. 5. 19.

우리가 흔히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대해, 이덕일 박사는 그것이 단순한 '운동'이 아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용어의 재정의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보다는 '독립전쟁사', '일제시대'보다는 '대일 항쟁기'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던 아나키즘 독립전쟁은 우리 독립전쟁사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며 재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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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Anarchism)은 종종 '무정부주의'로 알려져 많은 오해를 낳았지만, 이는 일본 유학생이 그리스어 '지배자가 없다'는 뜻을 잘못 번역한 결과입니다. 이덕일 박사는 아나키즘 정부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지방 자치, 회사 자치, 공장 자치 등 각자의 자율적인 자치체를 기반으로 이들이 연합하여 중앙 조직을 만들고 나아가 정부를 구성하려는 사상입니다. 즉, 아나키즘은 무질서를 넘어선 자율과 연대에 기반한 조직 형태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당분간은 아나키즘이라는 원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나키즘(Anarchism)이라는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아르케(αρχή)'는 '지배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Anarchism의 어원적인 의미는 '지배자가 없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오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일본 대학생 케모야마 센타로가 이 개념을 번역하면서 '지배자가 없다'는 의미를 '정부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여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narchism은 단순히 정부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Anarchism은 무질서가 아닌 자율과 연대에 기반한 사회 구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Anarchism advocates for a society without rulers, not without rules."

의열단 단원

아나키즘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당시 일본 유학생들이 접했던 사회 이론과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서구에서 들어온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사회 발전의 법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습니다. 약한 한국은 강한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에 맞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피터 크로폿킨(Peter Kropotkin, 1842–1921)상호부조론(Mutual Aid Theory)이 대안으로 부상했습니다. 상호부조론은 생물계와 인간 사회 모두 경쟁보다는 "서로 돕는 것이 발전"에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진화의 핵심은 생존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일본의 식민 지배 논리를 반박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아나키즘은 또한 당시 좌파 사상으로 분류되던 사회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덕일 박사는 아나키즘의 핵심 특징으로 "절대적인 인간의 자유 주장"과 "전체주의의 철저한 배격"을 꼽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형태의 독재나 권력 집중도 경계했습니다.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강하게 비판하며, 권력을 쥔 혁명가가 오히려 짜르(러시아 황제)보다 더 악독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이미 1870년대에 좌파 전체주의의 등장을 예견한 통찰력이었습니다. 바쿠닌은 이론 자체가 좌파 전체주의의 씨앗을 담고 있다고 보며 사회주의 이론까지도 비판했습니다.

아나키즘 독립전쟁은 일본, 중국, 국내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1920년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재일본조선고학생동우회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유학생 모임을 넘어 "계급 투쟁의 직접적 행동"을 선언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재일본조선고학생동우회는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흑우회와 볼셰비즘을 추종하는 북성회로 분화되었습니다. 특히 '흑'(검은)자가 들어간 독립운동 조직은 대부분 아나키즘 계열이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일본과의 연계 속에서 아나키즘 조직들이 활동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흑기연맹'은 실존 기록이 불명확하며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펼쳐졌습니다. 1924년 북경에서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결성되었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아나키즘에 동조하며 교류했습니다. 북만주에서는 1929년 김좌진 장군과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하여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활동했습니다 (일부 자료에서 재만 한족 총연합회가 혼동되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상해로 이동한 아나키스트들은 남화 한인 청년 연맹을 조직하고, 한, 중, 일 아나키스트가 연대한 항일 구국 연맹과 흑색 공포단을 통해 다양한 직접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한 **"직접 행동"**이 무차별적인 테러와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폭력의 대상을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조선 총독 및 일본 관리들, 일왕, 그리고 친일파 매국노 등이 그 대상이었으며, 무고한 인명 살상을 피하려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의열단이 바로 이러한 아나키즘적 직접 행동을 실행한 대표적인 조직입니다. 그들은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목표 아래, 최수봉, 박재혁 등 많은 단원들이 폭탄 투척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김익상은 의열단원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창립자이자 실질적 지도자로서 대외 연락 등을 담당했으며, 조직의 평등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의열단의 사상적 지침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일본의 강도적인 통치를 규탄하고, 개량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 나약한 독립 방식을 맹렬히 비판합니다. 그리고 선언의 핵심에는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라는 강력한 선언이 자리합니다. 이는 인민대중의 힘과 정의로운 폭력을 통해 일제 통치를 타도하고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개조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나키즘 독립전쟁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동지 (옥중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됨)는 일본 내에서 불령사를 조직하고 저항하다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 등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특히 일본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인 차별에 공감하며 박열과 함께 투쟁했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일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인 우당 이회영 선생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67세의 고령에도 만주 무장봉기를 계획하며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된 후 고문 끝에 순국했습니다. 만주 잠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으나, 순국 장소는 대련입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아나키즘 독립전쟁의 처절함과 숭고함을 보여줍니다.

이덕일 박사는 이처럼 중요한 아나키즘 독립운동이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았는지"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3.1 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자유와 연대의 이념을 바탕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던 아나키즘 독립전쟁의 역사 또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상세 연표

  • 1870년대: 미하일 바쿠닌,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비판, 좌파 전체주의 예견.
  •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에서 의열단 결성.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 목표, 평등 사상 기반.
  • 1920년: 일본 도쿄에서 재일본조선고학생학우회 결성. 아나키즘/사회주의 운동 시발점.
  • 1921년 9월 14일: 의열단원(김익성 확인 필요),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실패).
  • 1922년: 재일본조선고학생학우회, 흑우회 결성 및 선언 발표(계급 투쟁 강조).
  •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 1923년 9월 3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체포.
  •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북경, 유명찬 등).
  • 1926년 3월 27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대역죄로 사형 선고(후 무기징역 감형).
  •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옥중 사망(자살 또는 타살 논란).
  • 1928년: 재일본조선고학생학우회, 흑우회(아나키즘)와 북성회(볼셰비즘)로 분화.
  • 1929년: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 1931년 9월 18일: 일본 만주 침략(9.18 사변). 아나키스트들 상하이로 퇴각.
  • 1931년: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결성.
  • 1931년: 우당 이회영, 상하이에서 체포, 고문 후 순국.
  • 해방 이후: 재일 한국인 단체 활동 지속(민단은 아나키즘 비중 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