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아래 KBS 다큐 영상을 바탕으로 정리된 내용입니다. 광활한 만주 벌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요하. 이 강은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며, 최근 이곳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대 유적들로 인해 전 세계 역사가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팟캐스트로 듣기] 클릭(7분)
5천년 전 문명의 신호탄, 홍산 문화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에 위치한 홍산(붉은 산) 지역. 이곳의 붉은 바위와 황토 속에는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5천 년 전의 여신상이 발견된 것입니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 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문명은 홍산 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하게 꽃피웠으며,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요하 문명'**이라 불립니다. 요하 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 탄생이 가장 늦었다고 알려졌던 중국 문명을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발돋움하게 했습니다.
요하 문명지 중 가장 핵심적인 장소는 여신상이 발굴된 우하량입니다. 신전을 비롯해 기원전 3,500년 시기의 홍산 문화 유적이 집중된 곳이죠. 이곳에서는 여신상 외에도 수십 개의 조각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예닐곱 개의 몸통에 해당하며 사람 크기이거나 두 배 큰 경우도 있었습니다. 5,500년 전 반지하식 건물이었던 여신묘에는 각 방마다 크기가 다른 여신상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하량에서는 여신상과 신전뿐만 아니라 거대한 돌무지 유적도 발견되었습니다. 한 변이 20m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3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입니다. 3단으로 쌓아 올린 기단식 적석총은 중원(황하 유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묘제입니다. 바로 옆에서는 27기의 석관(돌널무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중국 학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이러한 석관 묘제는 한반도나 요동반도, 시베리아 등 북방 벨트를 따라 많이 분포되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입니다. 특히 우하량의 석관묘는 시베리아의 것보다 2천 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져, 그동안 적석총의 기원이 시베리아라는 학설을 뒤집을 만한 발견이었습니다. 무덤은 사각형, 제단은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거의 허물어진 제단의 둘레에서는 대량의 토기편이 발굴되었는데, 3단의 원형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위아래가 트인 토기는 하늘과 소통하고 싶었던 홍산인들의 종교 의식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3,500년경 거대한 적석총과 신전, 제단을 만들어낸 홍산 문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하량 지역은 홍산 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소이며, 여신묘, 천재 제단, 거대 적석총을 갖춘 3위일체의 구조는 이미 우하량을 건설한 이 시기에 최소한 초기 국가 단계나 초기 문명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입니다. 황하 문명보다 천 년 이상 앞선 홍산 문화는 5,500년 전 이미 초기 국가 단계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하량에서는 무덤과 제단, 신전들만 발굴되고 주거지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이 어쩌면 홍산인들의 성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성지가 건설되려면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세련된 옥기가 대량으로 발굴된 것은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 집단이 기능적으로 분화되었고, 그중 최고급품을 소유하며 신께 제사 지내는 권력자가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홍산 문화 시기에는 권력과 신분이 이미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회가 문명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중국 문명의 기원을 흔든 요하 문명
황하 문명보다 천 년 이상 앞선 홍산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서 발견되자 중국은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만주 지역이 중원에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는 전통적인 중화 사상이 도전받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 한계선으로 인식하고, 이북을 '오랑캐 소굴'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만리장성 북쪽에서 훨씬 더 선진적인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은 충격에 빠졌고, 발 빠르게 **'다원 기원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중화 문명의 기원이 한 곳(황하)이 아니라 여러 곳(황하, 장강, 요하)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화 문명사는 천 년이나 앞당겨집니다.
중국 고고학계의 대부 수빙치(蘇秉琦)는 전설 속 인물인 황제 헌원을 끌어들여 요하 문명의 꽃인 홍산 문화를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고고학적 성과와 연결시켰습니다. 황제는 신화적 인물이지만 이제 역사적 인물로 탈바꿈했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중화삼조당에는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시는데, 황제와 염제에 슬그머니 치우를 끼워 넣었습니다. 중국 사서에서 포악하고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치우를 시조로 편입시킨 것은, 현재 중국 영토 안의 모든 이민족 역사를 중국 역사 틀에 포섭하려는 시도입니다. 예전에는 황제의 영역이 만리장성을 넘어간 적이 없었지만, 이제 만리장성 너머 요하 문명 지역 전체를 신화 시절부터 황제의 땅이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요하 지역에서 중국 문명이 최초로 꽃피고 이어서 황하와 장강에서 문명이 꼽혔다는 논리죠. 요하 문명을 중국 역사로 끌어들이는 것은 중국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양의 박물관에서는 요하 문명전을 통해 중국 문명의 시원을 요하 문명으로 정하고 이를 황제가 주도했다고 전시하며 이러한 논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설과 고고학적 성과를 끼워 맞춰 북방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넣어버리는 소위 동북공정의 핵심입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 재편 작업의 일부입니다.
중원과 다른 독자성, 한반도와의 깊은 연관성
요하 문명의 서광은 홍산 문화보다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6천년에 탄생한 사해 유적이 바로 요하 문명의 시작입니다. '중화 제일촌'이라 불리는 사해 유적은 중국 토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19.7m 길이의 용 형상물은 기존 용상보다 무려 2천 년 앞서는 것으로, 중국 용 신앙의 원형마저 이곳에서 나타나자 중국 학계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사해 유적에서 주목할 점은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이곳을 가장 이른 취락으로 보지만, 취락에서 나온 토기는 우리가 쓰는 빗살무늬 토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만드는 방법이나 태토를 보면 우리 빗살무늬 토기를 쓰는 사람들과 이곳 사람들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빗살무늬 토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방 루트를 통해 발견되는 유물로, 한반도와 요하 유역에선 대부분 발견되지만 황하 유역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 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며, 한반도와는 대단히 연관성이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해에서 100km 떨어진 흥룡화 유적에서도 중요한 단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옥기는 인류가 사용하고 가공한 최초의 옥 중 하나인데, 이 옥의 산지는 압록강 유역의 수암산으로 밝혀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남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옥 귀거리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최광식 관장은 요하 일대에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한국형 암각화를 다수 찾아냈습니다. 한반도를 제외하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암각화가 대륙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것은, 요하 문명과 한반도 문화 간의 깊은 정신 세계나 신앙 제의의 관련성을 시사합니다.
요하 문명과 고조선, 그리고 북방 문화 벨트
홍산 문화를 계승한 하가점 하층 문화 시기인 기원전 2천 년경이 되면 요하 문명 지역에는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기 시작합니다. 70개 이상의 성이 발견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제도(시스템), 즉 국가가 갖춰졌다는 얘기입니다. 중국이나 한국 사서를 검토해 봤을 때, 이 시기 요서 지역을 터전으로 국가란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세력은 고조선밖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 민족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33년입니다.
고조선 건국 사화의 웅녀 설화와 관련된 단서도 요하 문명지에서 발견됩니다. 우하량 여신묘에서는 새 형상과 함께 곰 발이 출토되었고(새 토템과 곰 토템은 환족과 웅족의 결합을 상징), 남쪽 방에선 곰 턱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 지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 묘에 안치된 인골 가슴에 놓인 옥은 곰을 형상화한 것이며, 홍산 문화의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이 웅룡(곰+용)입니다. 곰을 숭배하던 홍산인들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고조선과의 연결은 유물에서도 확인됩니다. 조양 일대에서는 고조선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대거 출토되었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10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 종족과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었으며, 고조선 지역에서 발전한 형태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전역에서 꾸준히 나타나는 특징적인 유물입니다. 만리장성 바로 앞에 있는 건창현 동대장자 마을에서는 적석총과 함께 황금으로 장식된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고조선 영역을 침입한 연나라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고조선 유물이 나온 것은 중국 사서 기록과 일치하며 고조선의 강역이 연산 산맥까지 이르렀다는 결정적인 단서로 해석됩니다. 연산 산맥은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삼좌점 석성 유적에서 발견된 '치'는 고구려 성곽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하가 하층 문화 단계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성 축조 방식과 요하 문명 지역의 관련성을 시사합니다. 길림대 주홍 교수의 하가점 하층 문화 인골 분석 결과, 고대 주민들의 60% 이상이 한국 사람들과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요하 지역의 고대 문화가 한국 계통의 선조들에 의해 건설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증거입니다.
요하 문명 일대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적석총(가로세로 60m)은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천 년 앞서 세워졌는데, 고구려 장군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집안시 일대에 수천 기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북방 계통 문화의 강한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결국 이러한 북방 문화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하 문명은 동북아시아 시원 문명인 동시에, 주요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중국은 요하 일대의 고대 문명을 '요하 문명'이라 부르며 그들의 시원지라고 주장하지만, 이곳은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지역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 요동반도와 한반도까지 이르는 이른바 **'발해만 벨트'**를 이룹니다. 따라서 저는 이곳을 '요하 문명'이라고 한정하기보다는 **'발해만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주는 이제 우리에게 잃어버린 땅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역사마저 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4천km에 달했던 만주 대탐사를 통해 우리는 그곳에서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고, 감춰졌던 역사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하 문명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여정입니다.
'역사정보 > 역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사-2 삼일 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3) | 2025.05.17 |
---|---|
독립운동사-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0) | 2025.05.16 |
금나라와 신라, 그리고 동북공정 (2) | 2025.05.09 |
세종대왕과 단군세기의 특별한 만남 (0) | 2025.02.15 |
[김동욱 칼럼] '한국은 중국 땅'이라는 중국夢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