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다양한 투쟁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익히 배운 실력 양성을 강조한 애국 계몽 운동과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으려 했던 외교론,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던 자치론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인식이 있었고, 결국 직접적인 무력 투쟁인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과거 군 출신들이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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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투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의열 투쟁은 개인이 폭탄이나 권총을 들고 적 기관이나 요인을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의열 투쟁을 감행한 당사자는 현장에서 "거의 100% 잡히게 됩니다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희생이 되죠". 이러한 의열 투쟁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본격적인 무장 투쟁은 군대를 형성하여 결정적인 시기에 일제와 전면적으로 겨루는 방식입니다. 이는 병력, 군비, 보급 등 "막대한 비용이 드는 문제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중국이나 미국 등과 싸우게 될 때 우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함께 싸워 일제를 물리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러한 무장 투쟁을 "독립운동의 근본이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 우리 민족은 크게 두 갈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는 항일 애국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친일 매국의 길이었습니다. 항일 애국의 길을 택한 이들 중에는 매천 황현 선생처럼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식인의 책임을 다한 분들도 있었고, 많은 이들이 해외 망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강연자는 이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만주 지역으로 망명한 항일 애국자들의 삶은 처절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례는 그 혹독한 현실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우당 선생의 집안(우당 6형제 집안)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며, 그대로 있었다면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외적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이나 구차해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습니까" 라며 나라를 되찾는 길에 앞장서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집 팔고 논밭 팔고), 당시 돈으로 **40만원 (현재 가치로 400억~50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을 중심으로 가족 5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떠났습니다. 마련한 자금은 독립군 양성에 모두 사용되었고, 정작 선생 본인과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북경(베이징)에서 추운 겨울에 딸들이 학교 갈 외투조차 전당포에 잡히고, 양식이 떨어지면 앉아 있기도 힘들어 방바닥에 누워 지내는 상황까지 처했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었던 이은숙 여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돌아와 공장에서 일하고 기생들의 머리를 깎아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보내기도 했습니다. 우당 선생의 친형인 이석영 선생은 조선 최고 갑부의 양자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망명 후 독립운동 자금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빚으로 연명하다가 79세에 영양실조로 굶어 돌아가셨습니다. 조선에 그대로 있었다면 풍족했을 삶이 나라를 찾겠다고 나선 대가로 처절하게 끝난 것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동의 유명한 고성 이씨 종손이었던 선생은 망명길에 오르며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가 필요하겠냐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종가집인 임청각은 남겨두었으나, 독립운동 자금이 떨어지자 몰래 고향에 사람을 보내 임청각을 팔았습니다. 안동의 같은 일족들이 돈을 모아 되사곤 했지만, 석주 선생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임청각을 팔았다 샀다 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만주에서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집세를 제대로 내지 못해 한여름 비가 새는 허름한 집에서 지내야 했고, 70이 넘은 노인이었던 선생이 침상에서 잠들 때, 아들과 손자가 비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을 받쳐들었다는 일화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극심한 고난을 짐작게 합니다.
이처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극심한 빈곤과 질병 속에서 고통받았습니다. 해방 후 돌아왔을 때는 있을 집조차 없었고, 자녀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러한 현실 때문입니다. 반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부와 명예를 누렸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도 해외 유학으로 익힌 외국어와 학력을 바탕으로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며 역사적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비극적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당한 포상(논공행상)은 해방 후 한참이 지나서야 이루어졌고, 친일파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사 기록 또한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혹독한 대가와 희생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은 해외 곳곳에 항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만주 지역은 압록강, 두만강과 가까워 지리적으로 유리했고, 무엇보다 1860년대부터 이미 한국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벌목공이나 농업 이민으로 정착한 한인 사회가 있었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을 기반으로 자금과 병력을 확보하고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 서간도 지역: 이회영, 이상룡 선생 등이 망명하여 한인 자치 단체인 경학사를 세웠고, 1911년에는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습니다. 신흥강습소는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약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배출했습니다. 이들은 만주 무장 투쟁의 근간이 되었고, 이후 광복군으로 이어졌습니다.
• 북간도 지역: 이상설 선생은 용정천에 서전서숙을 세워 학생들에게 신학문과 군사 훈련을 병행하여 가르쳤으며, 재산을 처분하여 학생들의 숙식을 모두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국경 지역에 한흥동을 건설하여 항일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북간도에서도 일찍부터 형성된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간민회, 이후 대한국민회와 같은 자치 단체들이 활동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불립니다.
러시아 지역 역시 중요한 독립운동 근거지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신한촌이 형성되었고, 모피 교역, 금광 발굴, 러시아 군대 군납 등을 통해 한인 사회가 성장했습니다. 최재형과 같은 인물은 여기서 거금을 모아 한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이상설, 홍범도 장군 등도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때부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10년간은 본격적인 독립운동, 특히 무장 투쟁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일제의 무단 통치로 국내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에, 해외에서는 이처럼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묵묵히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기반을 다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과 함께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에 신규식 선생이 참여하고 지원했던 사례처럼, 국제 정세와의 연관성도 모색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은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폭력 만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일제와의 대항을 위해서는 무장 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력하게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3.1 운동은 국민주권에 기반한 공화제를 향한 염원을 분명히 드러냈고, 학생, 농민 등 대중 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망명지에서 치열하게 전개했던 이러한 활동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들의 헌신은 우리가 마땅히 기억하고 기려야 할 역사입니다. 비록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 대한 정당한 예우와 역사의 기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아픈 현실도 있지만, 그들이 걸었던 혹독한 독립의 길을 되새기는 것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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