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소장의 유튜브 강의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단순히 '나라를 되찾는 투쟁' 으로 보지 않고, 어떤 나라를 새롭게 세우고자 했는가 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왕정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국', 즉 민주공화국 이었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민주공화제의 이념이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민족 내부의 양명학, 단군 신앙 등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실천과 해방 이후 친일 세력 청산의 역사적 과제를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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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 그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맞서 싸운 민족주의 정신과, 4.19 민주이념 계승은 내부 독재를 무너뜨린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즉, 대한민국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대 기둥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독립전쟁에서 나타난 민주공화제 이념은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인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서간도 지역: 양명학과 대동사상
서간도에서는 주로 양명학을 공부한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일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양명학의 사해동포주의와 서구 민주정치 이론을 주체적으로 수용해 자치 조직 경학사(학무, 농무, 법무 등 민단 자치 조직)를 세우고, 이미 1911년에 삼권분립을 논의하며 민주공화제를 실천했습니다.
북간도 지역: 단군 민족주의의 평등 정신
북간도에서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 종교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단군을 모시는 한민족 공동체 의식에서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이 자연스럽게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민주공화제는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고유 사상과 전통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족주의는 서양이나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달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싸웠던 이념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강대국이 아닌 문화 정도가 높은 나라를 원했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도 아나키스트로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일부에서 우리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비롯된 잘못된 시각입니다.
나라가 망해갈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진 분들도 있었지만, 나라를 파는 데 가담하여 일제에 가담한 대가로 영화를 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지막 노론파 대신 이완용과 일진회 세력 등이 나라 파는 경쟁에 가세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며 막대한 돈을 준 76명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노론 세력이었습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계속 집권했던 노론이 주도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친일 세력들이 청산되지 않고 해방 이후에도 상당 부분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정의가 실종되고 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태석 친일 경찰이 해방 후 용산 경찰서장을 했던 사례).
일제 강점기 저항으로는 무장투쟁이 활발했는데, 의병 전쟁은 위정척사라는 사상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1909년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통해 의병을 탄압했습니다. 이 작전은 주로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했는데, 강의자는 해방 후에도 이어진 호남 차별론의 뿌리가 일제가 만든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입니다.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규정하고, 남녀노소, 빈부, 귀천 없이 일체 평등하며, 종교, 언론, 출판, 집회, 거주, 이전 등 기본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이는 현재 헌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소재하며 외교에 초점을 두었지만,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는 **무장 독립군 부대 (주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가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참의부는 임시정부 직할 군부였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많이 전개했습니다. 일제 정보 보고서에 국경 지역이 상시 전쟁 상태였다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참의부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시도 등 무장 투쟁을 벌여 임시정부가 외교만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미래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 동안 같은 문화와 영토를 가진 고유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임을 선언하여 식민사관을 부정했습니다.
- 경제적 평등을 위해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고 (일제 및 친일파 소유 토지 국유화 의미), 계획경제로 국민의 복지를 보장하려 했습니다.
- 순국 자녀를 높여야 함을 강조하며, 현재 한국의 순국선열 대우가 미흡함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건국 강령은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집권했다면 식민사관이나 민족 모욕 행위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은 단순한 주권 회복 이 아닌, 국민이 주인 되는 민주공화국 건설이라는 분명한 이념과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정신은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 임시헌장에 명문화되었고,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민주주의의 정신을 오늘의 시대에도 바르게 이해하고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역사적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타임라인:
1905년: 일본,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미국의 필리핀 점령 인정 및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인정).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발생. (이준, 이상설, 이위종 파견)
1909년 9월-10월: 일본, 남한 대토벌 작전 감행 (의병 진압).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 체결 (대한제국 국권 상실). 많은 지식인들이 국외 망명, 독립운동 기지 건설 시작 (서간도, 북간도). 서간도 지역에 경학사 설립.
1911년: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상룡, '만주기사' 집필 (3권 분립 사상 언급).
1919년 3월 1일: 3.1 운동 발생.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상해). 대한민국 임시 헌장 발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명시).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 활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활동). 참의부, 국내 진공 작전 전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시도 사건 발생.
1920년대 후반 - 1930년대: 3부 통합 운동 진행.
1931년: 이봉창 의사, 도쿄에서 일왕 암살 시도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의거.
1941년 11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발표 (토지 국유화, 주요 산업 국유화, 순국자녀 우대 등).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해방.
1945년 8월 28일: 임시정부, 한국 귀국 직전 '우리가 접권하여 이러이러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계획 발표.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제정. 헌법 전문에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명시.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생 (불의에 항거한 민주 이념 계승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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