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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

독립운동사-8 사회주의 독립운동

by 광명인 2025. 5. 20.

일제강점기에 펼쳐진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는 남북 분단 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과 그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감정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들민족주의자아나키스트들 못지않게 일본과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인물들이었기에, 그 역사를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주의 운동사는 갈래가 매우 복잡하고 계보도 뒤얽혀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큰 틀에서 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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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국내파'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제3 국제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국제파'입니다.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국내파의 활동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국내파는 주로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지식인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국내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조직을 결성하려 했지만,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와 탄압으로 인해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국제파는 러시아 혁명으로 코민테른지령을 받아 국내에 잠입한 세력일본 유학생들 중심으로 시작된 세력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레닌이 코민테른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중앙일보]

사회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칼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고 선언하며 전 세계 역사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사로 정리했습니다. 또한 그는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만 해왔을 뿐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행동과 변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처음으로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정의를 선포했으며 각 민족의 자유와 자치를 인정했습니다. 극단적인 침략주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일변하여 극단적인 공화주의 국가가 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첫 번째 동기가 되었다고 박은식 선생은 평가했습니다.

초기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주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형성되었습니다. 1918년 만주 북단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 혁명가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와 한인 볼셰비키가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되 볼셰비즘(Bolshevism)까지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갈라섰습니다. 연해주 이주 한인들의 자식들 중 스스로 볼셰비키가 된 이들이 볼셰비즘 수용을 찬성했고, 이 세력이 연합하여 1918년 4월 28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인사회당을 러시아에서 만들었습니다. 이후 러시아 내전에서 이들은 백군에게 체포되기도 했으며, 한인 볼셰비키인 김알렉산드라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협력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때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여 총살당했습니다. 이러한 백군의 탄압은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계열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한인사회당 계열(후에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지역의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은 당시 경쟁하며 한국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파벌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진이 가담했으며, 공산 혁명보다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사회주의를 표방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레닌은 한국 독립운동에 약 60만 루블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 상해파이르쿠츠크파는 물론 임시정부 내에서도 치열한 논쟁과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코민테른(Comintern)은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제3인터내셔널로, 전 세계 공산당의 국제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각국의 공산당을 하나로 통합하여 세계 혁명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받는 것은 활동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코민테른은 양파를 통합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를 해체하고 극동부 산하에 '루비로(고려국)'를 만들어 국내에 당을 만들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한편 해외에서는 일본 유학생들 중심의 사회주의 조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고학생동호회로 시작했다가 아나키스트의 흑우회와 볼셰비즘(Bolshevism)을 지지하는 북성회로 갈라졌고, 1928년에는 북풍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공산당과 청년 조직 건설을 추진한 화요회라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화요회 인사들 중에는 모스크바 국제공산대학에서 베트남의 호치민과 함께 수학한 박헌영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국내 자생적인 사회주의 세력은 상해파와 연결된 서울청년회가 핵심이었습니다. 김약수라는 인물이 이 세력을 주도했는데, 그는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의 국민대표회 사건에도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김약수는 전국 각지의 청년회를 규합하여 큰 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공산당을 조직하여 코민테른에 가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조선청년회연합회 내에서 일본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청년회의 목표를 수양 사업이 아닌 정치 활동으로 규정했으며, 일제에 협력하여 자작 작위를 받은 김윤식의 사회장을 반대하여 취소시키는 등 급진적인 활동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한 대표적인 항일 운동으로는 6.10 만세운동(1926년)이 있습니다. 순종 황제의 인산일에 맞춰 조선공산당 산하의 청년 조직과 학생들이 계획한 대규모 전국 시위였습니다. 비록 오사카 위조지폐 사건 수사 과정에서 시위 격문이 발각되어 계획만큼 크게 벌어지지는 못했지만, 각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며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권오설은 일본 감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4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옥사했습니다. 초기 조선공산당은 조직되자마자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사회주의 세력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는 민족 단일당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한 좌우합작 조직으로,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공고, 기회주의(개량주의자) 부인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습니다. 창립 1년여 만에 143개의 지회와 3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할 정도로 강력한 조직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나타난 좌우 합작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재조직 운동은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재유이며 그가 이끈 조직이 경성콤그룹입니다. 이재유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가며 지하 활동과 조직 확장에 힘썼으며,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박헌영이 이 경성콤그룹에 합류하여 활동했습니다. 경성콤그룹은 여러 사회주의 파벌들이 통합되는 중심이 되었고, 일제의 극심한 탄압(특히 사상범 예방구금령) 속에서도 지하 활동을 지속하며 1945년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박헌영 계열의 조선공산당이 전체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남북 분단 이후 박헌영 계열은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 계열에게 숙청당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독립운동사를 가르칠 때 민족주의 운동사 중에서도 협소한 부분만 다루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가려졌던 사회주의 운동사, 아나키즘 운동사 등을 모두 우리 독립운동의 큰 줄기 안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민족주의 계열, 아나키즘 계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사를 모두 함께 독립운동의 범위에 넣고 다루어야 합니다. 물론 사회주의 계열은 6.25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었기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현재 고민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통합적인 역사관은 무조건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잘못을 가릴 것은 가리고, 통합할 수 있는 부분은 통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독립 전쟁사를 이해하고, 다양한 노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포괄하는 역사 인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세 연대표]
1848년: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발표.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조선 혁명가 대회가 열림. 민족주의자와 한인 볼셰비키 간의 볼셰비즘 수용 여부를 두고 의견 대립 발생.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결성.
1919년 3월 1일: 3.1 혁명 발생.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설립.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표회 사건 발생. 김약수가 참여.
1920년대 초: 러시아의 한인 사회주의자 그룹(이동휘 계열)이 상하이로 이동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 결성.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도 다른 한인 사회주의자 그룹(이르쿠츠크파)이 활동하며 상해파와 경쟁 및 갈등. 레닌이 한국 독립운동에 자금 지원. 이 자금의 분배를 둘러싸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논쟁 발생.
1920년대: 일본 유학생들 중심으로 사회주의 조직 결성 (복서회, 북풍회 등). 화요회 계열 인물들이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공산당 조직 시도. 박헌영이 모스크바 동방공산대학에서 수학.
1920년: 전국 각지의 청년회가 급격히 증가 (251개 → 446개). 김약수가 전국 청년회를 규합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및 서우청년회 결성. 청년회를 기반으로 공산당 건설 시도.
1920년대 중반: 서우청년회 내에서 민족주의 계열과의 주도권 다툼 발생. 김약수 등이 개량주의 민족주의자 축출 운동 주도.
1922년 1월: 김연수 사망. 동아일보 계열에서 사회장 추진. 서우청년회에서 김연수 사회장 반대 운동 전개.
1926년: 순종 인산일에 6.10 만세 운동 발생.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 조직(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주도. 오사카 위조지폐 사건의 여파로 사전 검거 발생하여 운동 규모 축소. 권오설 체포 및 옥사.
1926년: 조선공산당 결성. 그러나 곧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와해.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민족 유일당 운동 전개.
1927년: 신간회 결성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연합 조직. 빠른 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지회 확산 및 회원 증가.
1930년대: 신간회 해소.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발생. 이재유와 경성콤 그룹 활동. 이재유 체포 및 옥사.
1940년대: 경성콤 그룹 중심으로 사회주의 세력 통합. 박헌영이 출옥 후 경성콤 그룹에 참여하여 활동.
1940년 11월: 박헌영이 광주로 내려가 벽돌 공장 인부로 위장하여 지하 활동 지속.
1940년대 후반: 일제의 사상범 예방 구금령 등으로 독립운동가 탄압 심화.
1945년 8월 15일: 해방.
해방 직후: 장안파 조선공산당 결성. 이후 박헌영 계열의 조선공산당이 주도권 장악. 박헌영이 당수 역임.
해방 이후 남북 분단: 박헌영 계열이 남한에서 활동 어려움을 겪고 월북. 김일성 계열에게 숙청당하며 조선공산당의 역사 마무리.
6.25 전쟁 발발: 사회주의 세력의 역사적 책임 문제 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