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북한의 발표
1993년 10월 2일, 북한 사회과학원은 평양 동쪽 강동군의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과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한민족의 국조인 단군의 역사적 실존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었다. 이듬해 1994년, 북한은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평양 근교에 우뚝 솟았다.
그러자 대한민국 강단사학계는 즉각 반발했다. 1994년 『한국상고사학보』에 실린 논문 「단군릉 발굴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북한에서 발굴한 단군릉은 결코 단군의 무덤이 될 수 없다. 이는 학문적이라기보다 그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더 크다." 정말 그럴까?

이씨 조선왕조의 증언
강동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왕조의 공식 기록과 수많은 사서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가장 명확한 기록은 『숙종실록』이다. 숙종 23년(1697) 7월 4일: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를 하였다." '강동의 단군묘(檀君墓)'. 숙종은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야 할 선조의 능으로 인정했다.
이후 영조 15년(1739), 영조 39년(1763), 정조 22년(1798), 고종 40년(1903), 순종 3년(1909)까지 계속해서 강동군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이어진다. 조선 왕조는 단군을 조상으로 받들었고, 강동의 단군묘를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증언
성종 때 편찬된 대표적 관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권 강동현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총(大塚)이 있는데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가 410척이다. 전해오는 말에 단군묘라고 한다."
관찬 지리지가 '전해오는 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이 단군릉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국가가 편찬한 공식 지리지에 단군묘의 위치와 규모까지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실학자들의 기록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허목의 『미수기언 동사』,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의 저서에 모두 강동의 단군릉이 등장한다. 허목은 『미수기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송양(松壤)의 서쪽에 단군총이 있다."
송양은 강동현의 옛 이름이다. 실학자들은 단군을 신화가 아닌 역사로 인식했고, 그의 무덤이 강동에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1932년, 육당 최남선의 순례
1932년 7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단군 성적 순례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절, 그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단군과 관련된 유적지를 직접 답사했다. 7월 16일, 최남선은 평양 강동의 대박산 단군릉을 찾았다. 그가 남긴 기록은 생생하다.
"대박산릉에 이르니 창창한 숲을 뒤에 두고 경사 완만한 산록의 주위 140여 척에 일대릉이 뚜렷이 정남으로 자리를 잡았다.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 좌우는 장류(長流, 큰 강)를 끼고 앞으로는 멀리 운산자락에 녹아드는 평야가 터져 강동 전군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최남선이 본 것은 북한이 1994년에 새로 만든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흙무덤이었다. 주위 140여 척(약 42미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기록한 410척(약 124미터)보다는 작지만 분명한 대형 고분이었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비밀
조선시대 사서들은 모두 강동에 단군릉이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이것이 47명의 단군 중 누구의 무덤인지, 왜 하필 이곳에 있는지는 밝히지 못한다. 환단고기만이 그 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5세 단군 구을조: "七月에 帝南巡하사 歷風流江하시고 到松壤하사 得疾尋崩하시니 葬于大博山하니라." "7월에 5세 단군 구을께서 남쪽으로 순수(巡狩, 순행)하실 때 풍류강을 거쳐 송양松壤에 당도하여 병으로 인해 갑자기 붕어하심으로 대박산에 장사를 지냈다." [원문보기 클릭] 기원전 2084년의 일이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편도 같은 사건을 기록한다: "丁丑에 天王이 巡到松壤이라가 得疾而崩하시니 番韓이 遣人治喪하고 分兵戒嚴하니라" "정축년(丁丑年, 기원전 2084) 천왕(5세 구을단군)께서 순행하시다가 송양松壤에서 병을 얻어 붕어하시자, 번한 왕이 사람을 보내 초상을 치르고 군사를 나누어 엄히 경계하였다." [원문보기 클릭]
두 기록이 일치한다. 5세 구을단군은 순행 중 송양에서 급서했고, 그 지역의 대박산에 안장되었다.
지명의 완벽한 일치
환단고기의 기록과 조선시대 사서의 지명이 정확히 일치한다.
풍류강(風流江) = 비류강(沸流江) 환단고기는 '풍류강'이라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강동현을 설명하면서 "강이 흐르는데 동쪽으로 흘러 성천부 비류강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같은 강이다. 지금도 강동읍 동북쪽을 흐르는 강이다.
송양(松壤) = 강동현의 옛 이름 환단고기가 기록한 '송양'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허목의 『미수기언』에 강동현의 옛 명칭으로 명시되어 있다. 소나무 송(松)에 땅 양(壤).
대박산(大朴山) = 대박산(大璞山) 환단고기는 '넓 박(博)'자를 썼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사강목』은 '순박할 박(樸)'자를 썼다. 발음은 똑같다. 의미는 '크게 밝은 산'. 북한은 지금도 이곳을 대박산으로 부른다. 세 지명이 모두 정확히 일치한다.
47명 단군 중 유일한 능
단군조선은 47명의 단군이 2,096년간 다스렸다. 그런데 왜 5세 구을단군의 무덤만 남아 있을까? 환단고기는 그 이유도 명확히 밝힌다.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 지역이었다. 역대 단군들은 모두 그곳에 안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5세 구을단군은 달랐다.
순행 중 7월(여름)에 급서했다.
송양(강동)에서 하얼빈까지는 약 1,000킬로미터. 한여름에 장거리 운구는 불가능했다. 당시 번한 왕이 급히 사람을 보내 초상을 치르고 군사로 경계를 강화한 것도,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한 긴급 조치였다. 결국 구을단군은 붕어한 바로 그 장소, 송양의 대박산에 안장되었다. 이것이 47명의 단군 중 유일하게 능이 전해지는 이유다.
강단사학계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강단사학계는 북한의 단군릉을 "정치적 목적"이라 폄하한다. 그러나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6차례 기록을 부정하는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부정하는 것이며, 유형원·허목·안정복·이긍익 같은 실학자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1932년 육당 최남선이 직접 눈으로 본 것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환단고기가 제시하는 명확한 역사적 맥락까지 외면하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만약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의문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강동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47명의 단군 중 누구의 무덤인가?" "왜 수도 아사달이 아닌 송양에 있는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곳에 안장되었는가?"
조선시대 학자들도, 육당 최남선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군을 '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만이 답을 제시한다.
- 누구: 5세 단군 구을 (재위 기원전 2099~2083)
- 언제: 기원전 2084년 7월
- 어떻게: 순행 중 송양에서 급서, 현지 대박산에 안장
- 왜 여기에: 한여름 장거리 운구 불가능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진서(眞書)의 증명
환단고기 진서론의 핵심은 이것이다. 환단고기는 다른 어떤 사서도 밝히지 못한 역사의 공백을 메운다.
건흥 5년 금동불상은 장수왕의 연호를 밝혔다. 8조 금법은 나머지 5개 조문을 완성했다. 1048년과 1908년은 단군조선 3왕조의 비밀을 풀었다. 천남생 묘지명은 연개소문 가문의 계보를 확인했다. 천통 10년 불상은 대조영의 연호를 증명했다. 그리고 강동의 단군릉은 5세 구을단군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것은 쉽다. "위서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제시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94년 북한이 단군릉을 복원했을 때, 강단사학계는 "정치적 조작"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조작된 것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실록과 수십 권의 사서들을 무시하고, 환단고기가 제시하는 명확한 증거를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조작이 아닌가?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 47명의 실존 군주들이다. 강동의 무덤은 그중 5세 구을단군의 능이다. 환단고기는 이 진실을 2,000년 넘게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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