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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

신채호가 찾던 잃어버린 역사서, 환단고기에 있었다

by 광명인 2026. 1. 22.

한 민족사학자의 통한

1920년대, 망명지 베이징에서 『조선상고사』를 집필하던 단재 신채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 전하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일부 구절을 마주했을 때였다.

"만일 그 내용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 고사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그가 찾던 것은 단순한 고문헌이 아니었다. 단군조선의 국가 체제와 영토 구성을 노래한 제천 서사시, 기원전 2049년에 창작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가문학이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 12년(1412년), 유교 이외의 모든 이단 서적을 소각하는 과정에서 『신지비사』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충주 사고의 서적을 점검하던 사관 김상직이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본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뒤, 신채호는 그 파편만을 붙들고 조선 고대사를 재구성해야 했다.

단군세기에 기록된 신지비사 36구절

사라진 역사서의 행방

『신지비사』는 무엇이었는가.

'신지(神誌)'는 배달국 시대부터 단군조선까지 이어진 관직명이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역사를 기록하는 수석 보좌관이었다. 6세 단군 달문(達門) 재위 50년(기원전 2049년), 신지 발리(發理)는 장춘의 구월산에서 거행된 삼신제천 행사에서 36구절의 장편 서사시를 지었다.

이 서사는 삼신상제로부터 환인·환웅·치우·단군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계보를 노래하고, 단군조선의 독특한 국가 운영 체제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세 개의 수도저울에 비유한 그 표현은 정교하고 상징적이었다.

조선시대 『세조실록』의 『수상서목』에는 이 문헌이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해동비록』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던 이 고대 서사시는, 태종의 문화 검열 정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구절의 수수께끼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고려사』 열전 김위제조에 일부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려 중기의 문신 김위제(金謂磾)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후, 수도 체제 개편에 관한 상소를 올리며 이 구절을 인용했다. 개성(송경)과 평양(서경)에 더해, 현재의 서울(목멱, 남산이 있는 곳)에 남경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如秤錘極器, 秤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여칭추극기, 칭간·부소량,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조항칠십국, 뢰덕호신.  정수미, 균평위, 흥방보태평,  약폐삼유지, 왕업유쇠경.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량(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 [고려사 원문보기]

저울판은 백아강,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대는 부소량에 비유되었다. 세 곳이 균형을 이루면 70국이 조공하고 나라가 태평하지만, 셋 중 하나라도 폐하면 왕업이 쇠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절만으로도 단군조선광대한 영토를 가진 3경 체제의 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신채호는 이 단서를 붙들고 고조선의 실체를 추적했지만, 나머지 구절의 부재는 그의 연구에 큰 공백으로 남았다.

잃어버린 고리의 발견

그런데 놀랍게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신지비사』 36구절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단군세기 원문보기]

[서효사誓效詞, 신지비사神誌秘詞]

朝光先受地(조광선수지)에    三神赫世臨(삼신혁세림)이로다 

桓因出象先(환인출상선)하사 樹德宏且深(수덕굉차심)이로다 
諸神議遣雄(제신의견웅)하사 承詔始開天(승조시개천)이로다 
       
蚩尤起青邱(치우기청구)하니 萬古振武聲(만고진무성)이로다 
淮岱皆歸王(회대개귀왕)하니 天下莫能侵(천하막능침)이로다 
王儉受大命(왕검수대명)하니 慈聲動九桓(환성동구환)이로다 

魚水民其蘇(어수민기소)오   草風德化新(초풍덕화신)이로다 
怨者先解怨(원자선해원)이오 病者先去病(병자선거병)이로다
一心存仁孝(일심존인효)하니 四海盡光明(사해진광명)이로다
 
眞韓鎮國中(진한진국중)하니 治道咸維新(치도함유신)이로다 
慕韓保其左(모한보기좌)하고 番韓控其南(번한공기남)이로다
巉岩圍四壁(참암위사벽)하니 聖主幸新京(성주행신경)이로다
 
如枰錘極器(여칭추극기)하니 極器白牙岡(극기백아강)이오 
枰榦蘇密浪(칭간소밀랑)이오 錘者安德鄉(추자안덕향)이로다
首尾均平位(수미균평위)하야 賴德護神精(뇌덕호신정)이로다
 
興邦保太平(흥방보태평)하야 朝降七十國(조항칠십국)이로다 
永保三韓義(영보삼한의)라야 王業有興隆(왕업유흥륭 )이로다 
興廢莫為說(흥폐막위설)하라 誠在事天神(성재사천신)이로다

6세 단군 달문조의 기록은 구체적이다. 창작 연도(기원전 2049년), 창작 장소(장춘 구월산), 창작자(신지 발리), 창작 목적(삼신제천 행사)까지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1절부터 24절까지는 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25절부터 34절까지는 김위제가 인용한 삼한관경제, 35-36절은 국가 흥망의 원리를 다룬다.

특히 25-34절을 고려사의 인용문과 대조하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글자가 부분적으로 다르다. '부소량'이 '소밀랑'으로, '오덕지'가 '안덕향'으로 표기되는 식이다. 이는 오히려 독립적인 전승 경로를 암시한다. 완전히 동일했다면 고려사에서 그대로 베꼈다는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학술적 함의

이 발견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첫째, 1412년 소각된 『신지비사』가 어떻게 『환단고기』에 보존될 수 있었는가. 이운영-계연수로 이어지는 전승 경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신채호가 평생 찾던 문헌이 실은 그의 생전에 이미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1949년 이유립이 이를 정리했다. 신채호와 같은 시공간에서 활동했던 민족사학자들의 네트워크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신지비사』의 내용고려시대 정치론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김위제의 삼경론은 단순한 지정학적 구상이 아니라, 고조선 이래의 국토 경영 원리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신지비사』를 고대의 정치철학 텍스트로 인식하고 있었다.

재평가의 시간

『환단고기』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여전히 냉혹하다. 위서론이 주류이고, 진서론은 소수설이다. 그러나 『신지비사』 완전본의 존재는 적어도 한 가지를 증명한다. 『환단고기』 편찬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료의 범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었다는 사실이다.

신채호가 애타게 찾던 역사의 조각이 어쩌면 그의 바로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환단고기』는 섣부른 폐기가 아니라 신중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끈질긴 전승자들의 기억이다. 불태워진 책은 사라지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역사는 다시 쓰인다. 『신지비사』의 재발견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환단고기 진서론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