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학자들도 몰랐던 단군조선 3왕조의 비밀
환단고기 진위 논쟁은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다.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과 조선총독부 역사관의 충돌이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3주년 기념식에서는 우리 민족이 환국-배달-조선-부여로 이어지는 유구한 국통을 계승해왔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홍범도, 오동진 장군 등 독립운동가들이 출판 자금을 댄 환단고기는 바로 이러한 독립운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친일 사학자들이 중심이 된 식민사학은 광복 후에도 강단을 장악했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유사역사학'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오늘은 환단고기만이 풀 수 있는 세 번째 수수께끼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수많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단군의 역년(歷年)' 문제다.

조선시대 사서에 숨겨진 두 가지 숫자
조선시대 학자들은 단군에 관해 기록하면서 늘 곤혹스러워했다. 사서마다 전혀 다른 숫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048년이라는 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 권75, 세종 18년(1436년) 12월 정해일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단군의 역년은 1048세였다(檀君歷年一千四十八歲)", 고려 말 대학자 권근의 아들 권제가 지은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단군이 누린 역년이 1048년이었다(享國一千四十八)", 권제의 아들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 "단군의 나이가 1048년이었다"고 했고, 1614년 오운이 저술한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동일한 기록이 등장한다.
1908년이라는 기록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 첫머리에는 전혀 다른 숫자가 나온다. "단군의 수명이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 조선 후기 조정(趙挺)이 지은 『동사보유(東史補遺)』도 이 1908세설을 따르고 있다.
같은 단군을 두고 어떤 책은 1048년, 어떤 책은 1908년. 860년이나 차이 나는 이 기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 학자들의 고민
조선시대 학자들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484년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이런 논평이 등장한다.
"1048세를 살았다고 하는 설은 의심스럽다. 임금이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린다 해도 50~60년을 넘지 않는데, 어찌 단군이 홀로 1048년간 장수하면서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옛 선배들이 이르기를, '1048년이라고 하는 것은 단군이 대대로 전한 역년의 숫자이지 한 사람의 수명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거정은 1048년을 '고조선의 역년', 즉 나라가 존속한 기간으로 해석했다. 남양 홍씨의 명문가인 채몽(蔡夢)이 지은 『금남집(錦南集)』과 실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그렇다면 1908년은 무엇인가? 서거정 이후 조선 학자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회피했다. 두 숫자를 동시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명쾌한 해답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펼치면, 500년 가까이 조선 학자들을 괴롭혔던 이 수수께끼가 단번에 풀린다. 비밀은 바로 고조선 3왕조 체계에 있다. [단군세기 전문보기]
제1왕조: 삼한(三韓) 시대 - 1048년
초대 단군왕검(기원전 2333년) 즉위부터 21대 소태(蘇台) 단군(기원전 1286년)까지. 이 시기 수도는 하얼빈 지역으로 추정되며, 진한(辰韓)·번한(番韓)·마한(馬韓)의 삼한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다.
계산해보자.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286년 = 정확히 1048년
이것이 『세종실록』과 『동국통감』이 말한 1048년의 정체다.
제2왕조: 삼조선(三朝鮮) 시대 - 860년
22대 색불루(索弗婁) 단군(기원전 1285년)은 국가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수도를 백악산 아사달(지금의 장춘 지역)로 옮기고, 삼한을 진조선(辰朝鮮)·번조선(番朝鮮)·막조선(莫朝鮮)의 삼조선으로 개칭했다. 이 체제는 43대 물리(勿理) 단군(기원전 426년)까지 이어졌다.
계산해보자.
기원전 1285년 ~ 기원전 426년 = 860년
해답의 완성
이제 수수께끼가 풀린다.
- 제1왕조(삼한 시대): 1048년
- 제1왕조 + 제2왕조(삼조선 시대): 1048년 + 860년 = 1908년
『세종실록』의 1048년은 제1왕조 삼한 시대의 기간이고, 『삼국유사』의 1908년은 제1왕조와 제2왕조를 합친 기간이었던 것이다. 두 기록 모두 정확했다. 다만 조선시대 학자들은 단군조선이 왕조 교체를 거쳤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제3왕조: 대부여(大夫餘) 시대 - 188년
참고로, 44대 구물(丘勿) 단군(기원전 425년)은 국호를 아예 '대부여'로 바꾸었다. 이 체제는 47대 고열가(古列加) 단군(기원전 238년)까지 188년간 지속되었다. 대부여 말기인 기원전 239년, 해모수가 북쪽에서 새 나라를 세우면서 '북부여(北夫餘)'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남쪽에 대부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북부여는 광개토태왕비에도 "시조추모왕 출자북부여(始祖鄒牟王 出自北夫餘)" - "시조 고추모성제께서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강단사학계는 북부여를 국호가 아닌 '부여의 북쪽 지역'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환단고기 없이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세종대왕 시대의 학자들도, 동국통감을 편찬한 서거정도, 실학자 안정복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은 1048년이 한 사람의 수명이 아닌 왕조의 기간임을 간파했지만, 1908년을 설명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만이 이 500년 묵은 수수께끼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제1왕조 1048년, 제2왕조 860년이라는 구체적 연대와 왕조 교체의 역사적 맥락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환단고기가 근대의 위작이라면, 어떻게 조선시대 사서들에 흩어져 있던 1048년과 1908년이라는 숫자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역사 체계를 창작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그 계산이 단 1년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는 것은, 이것이 실제로 전승되어 온 역사 기록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독립운동가의 유산을 지켜야 할 때
환단고기는 이유립, 계연수, 홍범도,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들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이기 선생은 독립운동 중 순국했고, 계연수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사지가 잘린 채 압록강에 던져졌다. 이유립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마산대에 들어가 독립투쟁에 헌신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우리의 진정한 역사, 환국-배달-조선-부여로 이어지는 9,000년 역사의 맥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계승한 강단사학계는 이 위대한 유산을 '유사역사학'으로 매도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키려 했던 역사를 그들의 제자들이 짓밟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진서론 증명의 지름길은 이처럼 명확하다. 환단고기가 기존 학계의 난제를 하나씩 풀어나갈 때마다, 그 진정성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단군 역년 1048년과 1908년의 수수께끼는 그 세 번째 증거이자, 독립운동가들의 혼이 담긴 증거다.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47대 단군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제1왕조 1048년, 제2왕조 860년, 제3왕조 188년. 이 명확한 연대 체계가 조선시대 사서의 1048년과 1908년 기록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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