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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

환단고기가 밝혀낸 연개소문 가문의 비밀

by 광명인 2026. 1. 13.

땅속에서 나온 증거

1923년 봄,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묻히면 귀신도 부러워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대로부터 귀족들의 무덤이 즐비했던 이 산에서, 한 점의 거대한 묘지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방형 석판, 가로세로 각 92센티미터. 묘지 덮개에는 전서체(篆書體)로 **"大唐故特進泉君墓誌(대당고특진천군묘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본 묘지석에는 해서체로 47행, 행당 47자, 총 2,209자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찬자(撰者)는 당나라 중서시랑 왕덕진(王德眞), 서자(書者)는 명필 구양통(歐陽通). 당대 최고의 문인과 서예가가 정성을 다해 만든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천남생(泉男生),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의 장남이었다.

천남생 묘지석 묘지 덮개(좌측)와 연개소문과 부, 조부의 이름(우측)

천(泉)으로 바뀐 성씨의 비밀

묘지명을 읽던 학자들은 곧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의 성씨가 묘지명에는 '천(泉)'으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당 고조(高祖)의 이름이 **이연(李淵)**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는 피휘(避諱) 제도가 엄격했다. 연(淵)자를 쓸 수 없었던 당나라 사람들은 의미가 비슷한 천(泉, 샘)자로 바꾸어 불렀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천개소문', 연남생은 '천남생'이 되었다.

묘지명이 밝힌 연개소문 가문의 4대

묘지명의 핵심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曾祖子遊 祖太祚 竝任莫離支 父蓋金任太大對盧" "증조(曾祖)는 자유(子遊), 조(祖)는 태조(太祚), 아울러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 부(父) 개금(蓋金)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

천남생(연남생)의 입장에서 보면:

  • 증조부(고조할아버지): 자유(子遊) - 막리지
  • 조부(증조할아버지): 태조(太祚) - 막리지
  • 부(할아버지): 개금(蓋金) - 태대대로 (즉 연개소문)

연개소문의 본명이 '개금(蓋金)'이고, 그의 아버지가 태조(太祚), 할아버지가 자유(子游)였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중국의 어떤 정사에도, 한국의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았던 정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강단사학계의 '결정적 증거'

1979년 환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자, 강단사학계는 이 천남생 묘지명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1923년에야 출토된 묘지명의 내용이 환단고기에 그대로 나온다. 환단고기가 이 묘지명을 베꼈다는 명백한 증거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1923년 이후에 조작된 위서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다른 어떤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연개소문 가계의 상세한 정보가 환단고기와 묘지명에 동일하게 나타난다면, 의심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숨어 있었다.

첫 번째 불가능: 죽은 사람은 책을 쓸 수 없다

환단고기는 계연수(桂延壽, 1864~1920) 선생이 1911년 홍범도, 오동진 장군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다섯 권의 사료들을 하나로 엮어 편찬한 책이다. 그렇다면 계연수 선생이 1923년에 출토된 묘지명을 베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그가 최소한 1923년 이후까지 살아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계연수 선생은 1920년 5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당했다.

1923년, 계연수 선생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죽은 사람이 3년 후에 발굴될 묘지명을 보고 책을 썼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두 번째 불가능: 접근할 수 없는 정보

대부분의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와 같다.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 1979년 환단고기를 출판하면서 1923년 묘지명 내용을 추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하다.

천남생 묘지명1923년 중국에서 출토되었지만, 그 내용이 한국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0~80년대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묘지명은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완전히 단절된 시대적 상황에서, 일개 재야 사학자가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묘지명 내용을 입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욱이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의 제자로서 스승이 남긴 필사본을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지, 새로운 내용을 창작하거나 추가한 것이 아니었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연개소문 가계 기록은 1911년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원본에 이미 존재했던 내용이다.

결정적 증거: 묘지명에 없는 정보

그러나 진짜 결정적인 증거는 따로 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국본기』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면서 연개소문의 가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父)의 이름은 태조(太祚), 조(祖)의 이름은 자유(子游), 증조(曾祖)의 이름은 광(廣)" [환단고기 원문보기]

천남생 묘지명과 비교해보자.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

  • 증조부(연남생의 증조부,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 ✓
  • 조부(연남생의 할아버지, 연개소문의 아버지): 태조 ✓
  • 부(연남생의 아버지, 연개소문): 개금 ✓

묘지명에 없는 내용:

  • 고조부(연남생의 고조부, 연개소문의 증조부): 광(廣)

환단고기는 천남생 묘지명에 전혀 나오지 않는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 '광(廣)'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환단고기가 정말 묘지명을 베꼈다면, 묘지명에 없는 '광(廣)'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가져왔단 말인가?

조대기(朝代記)라는 독립적 사료

환단고기는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조대기朝代記에 왈曰,,,"

조대기는 대진국(발해)이 멸망하면서 고려로 전래된 책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아닌 발해 계통의 독립적 역사서였다. 이 책은 후에 『진역유기(震域遺記)』의 저본이 되었고, 진역유기는 다시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저본이 되었다.

환단고기는 이 조대기를 인용했기 때문에, 천남생 묘지명에는 없지만 발해의 역사 전승에는 남아 있던 '광廣'이라는 이름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뒤집힌 논리

강단사학계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주장 1: "묘지명과 같은 내용이 환단고기에 있으니 베낀 것이다" → 반박: 계연수는 1920년 사망, 묘지명은 1923년 출토. 시간적으로 불가능.

주장 2: "그렇다면 이유립이 1979년에 추가했을 것이다" → 반박: 묘지명 내용은 1970~80년대까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음. 접근 불가능.

결정타: "환단고기에는 묘지명에 없는 '연광' 정보가 있다" → 결론: 환단고기는 묘지명이 아닌 독립적 사료인 조대기를 인용했다.

논리가 완전히 뒤집혔다. 환단고기가 묘지명을 베낀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와 묘지명은 각각 독립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1923년 출토된 천남생 묘지명은 환단고기의 기록이 정확했음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되었다.

진서의 품격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환단고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그저 "위서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진짜 위서라면 어떻게 했을까? 1923년 출토된 묘지명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넣고, 거기에 없는 '광廣'이라는 이름은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가 없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은 위작자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당당히 '광廣'을 기록했고, 출처를 『조대기』라고 밝혔다. 이것이 바로 진서(眞書)의 품격이다.

천남생 묘지명은 환단고기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환단고기의 진정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땅속에 1,300년 동안 묻혀 있던 돌이, 2,000년을 전승되어 온 역사서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진서론 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