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통 10년이 기록된 동제불상 발견
2016년 4월 중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정명호 교수는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 고씨(高氏)를 만났다. 고씨는 재일교포로, 그의 선대는 일제시대까지 한국의 저명한 대부호 가문이었다. 일본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한 그는 오랫동안 가문에 전해 내려온 고미술품들을 소장해왔다. 현재 리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명한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도 그의 집안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고씨가 정 교수에게 보여준 것은 높이 29센티미터의 동제불상이었다. 청동보다 홍동(Copper)에 가까운 붉은색을 띤 이 불상은 도금 흔적이 없었고, 적어도 1934년 이전부터 그의 집안에 소장되어 온 것이었다. 나무 상자 바닥에 깔린 1934년 신문지가 그 증거였다. 정 교수가 광배(光背) 뒷면을 살펴보는 순간, 4행으로 새겨진 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天統十年 / 十二月二十 / 五日佛祖 / 一尊供養"
"천통 10년 12월 25일, 불조(석가모니불) 한 분을 공양하기 위해 조성하다."
천통(天統) 10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708년이다. 이 명문이 역사학계에 던진 파장은 작지 않았다.

천자를 상징하는 연호(年號)
연호는 단순한 연도 표기가 아니다. 연호를 제정한다는 것은 곧 황제의 권한을 의미한다.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원전 140년 '건원(建元)'이라는 최초의 연호를 선포한 이래, 연호는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늘의 운행 질서를 땅에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은 천명(天命)을 받은 황제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연호는 황제의 이상과 포부를 담았다.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 영원한 즐거움)', 신라 법흥왕의 '건원(建元, 근원을 세움)', 고려 광종의 '광덕(光德, 빛나는 덕)'처럼 각 군주는 연호에 자신의 시대정신을 새겼다.
반대로 말하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주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조선이 명·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스스로 제후국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선이 독자적 연호(개국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였다. 조약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라는 문구 때문에 청나라 연호를 그대로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천통 연호의 세 가지 사례
정명호 교수는 중국 역대 왕조를 조사했다. '천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세 차례 발견되었다.
첫 번째: 북위시대 형고(邢杲)의 한(漢), 528~529년
양 무제 7년인 대통(大統) 2년(528)에 하간인(河間人) 형고가 반기를 들고 한(漢)이라는 나라를 세우며 '천통' 연호를 사용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과 1년가량만 사용했다. 따라서 '천통 10년'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북제(北齊) 후주(後主) 고위(高緯), 565~569년
북제의 고위가 이 연호를 5년간 사용했다. 565년부터 569년까지다. '천통 5년'까지만 존재한다. 역시 '천통 10년'은 없다.
세 번째: 원나라 말기 명왕진(明王珍)의 명하(明夏), 1363~1366년
사천성 지방에서 명왕진이 세운 하(夏)나라에서 4년간 사용했다. 1363년부터 1366년까지다. 이 역시 '천통 10년'에 미치지 못한다.
결론은 명확했다. 중국 어느 왕조도 '천통 10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세 사례 모두 5년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와의 조우
불상의 편년을 둘러싸고 고심하던 정 교수에게 문득 몇 년 전 우연히 보았던 책이 떠올랐다. 『환단고기(桓檀古記)』였다. 그곳에서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본 기억이 있었다. 서가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확인했다. 천통(天統)이라는 연호가 발해(대진국) 창업주 대조영(大祚榮)의 연호로 기록되어 있었다.
『환단고기』 기록: "國號定爲大震 年號曰天統(국호를 대진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구당서』나 『신당서』 등 어떤 사서에도 이 천통 연호가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환단고기만이 이 연호를 기록하고 있었다.
사라진 나라, 대진국
우리는 이 나라를 '발해(渤海)'로 부른다. 교과서도, 방송도, 학계도 모두 발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진(震). 아버지 대중상이 세운 후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진국(大震國)'이라 불렀다. 천하 사방을 진동시킨다는 의미였다. 환단고기는 대중상과 대조영 두 황제의 연호를 명확히 기록한다.
『환단고기』 『대진국본기』:
- 1대 세조 대중상: "稱國後高句麗 建元重光(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이라 세우다)"
- 2대 태조 대조영: "國號定爲大震 年號曰天統(국호를 대진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다)"
대진국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남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했고, 서로는 당나라, 북으로는 말갈족과 경계를 이루었다. 동쪽 끝은 바다였다. 강역이 5천 리에 달했고, 광대한 영토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문명 대국이었다. 천하는 대진국을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의 성대한 나라라 불렀다. 당나라도, 신라도, 일본도 대진국을 두려워했다. "발해삼인 당호랑(渤海三人 當虎狼)" - 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나라를 '발해'로 부르는가?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713년, 당 현종은 대조영에게 사신을 보내 "발해 지역의 군왕"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중국 입장에서 대진국은 자국 영토 내 지방 정권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대진국이 아닌 '발해'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동의하는 셈이다.
강단사학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 부족장'으로 격하시키고, 대진국을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번국(蕃國)'으로 취급한다. 중국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대조영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강단사학계는 대조영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무위키의 설명을 보자.
"한편 고왕(대조영)의 연호라고 전해지는 천통은 역사서가 아닌 환단고기 및 태씨족보에만 실려 있으므로 신빙성이 낮다. 『신당서』에 따르면 무왕(대조영의 아들)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사사로이 고쳤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무왕 때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므로, 고왕(대조영) 대에는 연호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리는 이렇다. 『신당서』가 "무왕이 연호를 바꿨다"고 했으니, 그 이전 대조영은 연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연호를 바꿨다"는 것은 이전에 연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연호가 없었다면 '새로 제정했다'고 썼을 것이다. 더욱이 환단고기는 대조영의 연호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의 연호 '천통'은 다른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삼일신고(三一神誥)』 대야발(대조영의 동생) 서문: "천통 17년(715) 반란군 신학 야발은 삼가 임금님의 분부를 받들어 소문을 적나이다."
『삼일신고』 대조영 어찬(御撰): 천통 16년(714) 10월 초하루 작성
『규원사화(揆園史話)』: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을 천통이라 하였다"
영순 택씨족보: "고왕 대조영의 재위 기간은 21년이다. 기해년(699)이 천통 원년이다"
그러나 강단사학계는 이 모든 기록을 부정했다. "환단고기는 위서이므로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2016년 발견된 불상 하나가 이 논쟁에 답을 제시했다.
뒤집힌 논리
강단사학계의 주장을 정리해보자.
주장: "대조영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환단고기는 위서이므로 천통 연호는 신빙성이 없다."
반박: 천통 10년 명문 동제불상 출토. 중국 어떤 왕조도 천통 10년을 사용하지 않았음. 유일한 가능성은 대진국 대조영.
결론: 환단고기의 기록이 정확했다. 대조영은 독자적 연호 '천통'을 사용했다.
논리가 완전히 뒤집혔다. 환단고기를 부정하기 위한 논거가 오히려 환단고기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 것이다. 정명호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천통 10년 석가모니불상은 대진국 대조영의 연호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의 의미
대조영이 '천통'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칭제건원(稱帝建元).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세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자주국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당나라가 아무리 '발해군왕'이라는 작위를 내렸어도, 대조영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이 대진국의 실체다.
환단고기만이 이 역사적 진실을 온전히 기록하고 있었다. 『신당서』는 무왕 이후의 연호만 기록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대진국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오직 환단고기만이 세조 대중상부터 애제 대인선까지 15대에 걸친 대진국의 완전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
대위해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환단고기는 또 하나의 역사 왜곡도 바로잡는다.
강단사학계는 대진국 황제를 15명으로 보면서도, 14대 명종 대현석(경황제)과 15대 애제 대인선 사이에 '대위해왕'이라는 황제를 한 명 더 넣는다. 중국 학자 김유불(金毓黻)이 『발해국지장편』에서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명확히 기록한다.
14대 명종 경황제: 901년 사망
15대 애제 대인선: 901년 즉위
중간에 대위해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학자의 오류를 한국 강단사학계가 교과서에까지 실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이름
대진국(大震國). 발해가 아니라 대진국이다. 속말말갈의 지방 정권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국이다. 당나라의 번국이 아니라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제국이다. 환단고기가 기록한 대진국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2016년 발견된 '천통 10년 명문 동제불상'은 이 기록이 정확했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했다.
정명호 교수는 논문 말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천통 연호는 오직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 지금 주류학계가 위서로 몰아넣는 역사서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환단고기의 가치 규명에 중요한 유물이다. 주류학계는 이에 대해 무시하고 침묵하는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비판하기를 바란다. 거짓으로 쌓은 탑은 언젠가 무너진다. 역사가 사실을 기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대진국을 자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그 논리적 근거는 '발해'라는 이름과 '당나라의 책봉'이다. 우리가 스스로 대진국을 발해로 부르고,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으로 가르치는 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없다.
환단고기는 대진국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이제 그 진실을 되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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