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시간의 오랜 의문
8조 금법.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다. 고조선의 법률로서 우리 역사책에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정작 그 실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연조(燕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낙랑에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있다"
분명히 '여덟 조목의 금법'이라 했건만, 정작 전해지는 내용은 단 세 가지뿐이었다.
제1조: 상살이당시상살(相殺以當時償殺)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제2조: 상상이곡상(相傷以穀償)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
제3조: 상도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 욕자속자인오십만(相盜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 들어가 노예가 된다. 자속(自贖, 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
나머지 다섯 조목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완전한 진실
환단고기 『번한세가(番韓世家) 하(下)』에는 놀라운 기록이 담겨 있다. 8조 금법의 전문(全文)이 완벽하게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법을 제정한 주체와 시기까지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색부루 4년 기해(단군조선 22세 색부루 단군 재위 4년, 기원전 1282년)에 진조선이 천왕의 칙문으로 전하기를, '위로는 삼신을 받들고 백성들을 잘 교화하라. 이로써 백성을 가르치되 예의로써 가르치고, 누에를 치고 베를 짜며, 활과 화살을 만들고, 문자를 만들라' 하시고, 백성을 위하여 금법 8조를 제정하셨다."[원문보기 클릭]
이어서 8조 금법의 전문이 등장한다.
제1조: 상살이당시상살(相殺以當時償殺) "살인을 저지른 자는 바로 사형에 처한다"
제2조: 상상이곡상(相傷以穀償) "남을 상해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형량을 치른다"
제3조: 상도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相盜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 "도적질한 자의 경우 남자는 그 집의 노예로, 여자는 노비로 삼는다"
제4조: 훼소도자금고(毁蘇塗者禁錮) "소도(蘇塗)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에 처한다"
제5조: 실예의자복군(失禮義者服軍) "예의를 지키지 않는 자는 군에 복무케 한다"
제6조: 불근로자징공(不勤勞者徵公) "게으른 자는 부역을 보낸다"
제7조: 작사음자태형(作邪淫者笞刑) "요사스럽고 음탕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을 가한다"
제8조: 행사기자훈방(行詐欺者訓放) "사기를 친 자는 훈방한다"
2000년 만에 마침내 8조 금법의 완전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소도(蘇塗)와 덕치(德治)의 사회
8조 금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군조선이 어떤 사회였는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제4조의 '소도(蘇塗)'는 고대 한민족의 신성한 제천(祭天) 공간이었다. 소도 앞에 세운 장대 위에는 새(주로 까마귀나 독수리) 조각을 올려놓았는데, 이를 '소도(蘇塗)'라 불렀다. 이곳은 삼신상제(三神上帝)께 제사를 지내는 성역으로, 죄인이라도 소도에 들어가면 체포할 수 없었다. 중세 유럽의 성당이 피난처 역할을 한 것과 유사한 전통이다. 이러한 소도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고형이라는 중형으로 다스렸다는 것은, 단군조선이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8개 조문 중 4개(제5조~제8조)가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의를 잃거나, 게으르거나, 음란하거나, 사기를 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명문화되어 있다. 특히 제8조의 경우 사기를 쳤어도 '훈방(訓放)', 즉 타일러서 돌려보낸다는 온건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단군조선이 법치(法治)보다는 덕치(德治)를 지향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생명과 재산에 대한 범죄는 엄중히 다스렸지만, 윤리적 일탈에 대해서는 교화와 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환단고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러한 8조 금법으로 인해 죄를 지은 자들은 스스로 죗값을 치르고 비록 용서받아 떳떳한 공민이 될 수 있기는 하나, 풍속이 오히려 이를 부끄러이 여겨 결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어 문을 잠그는 일이 없어졌고, 부인들은 음란하지 않아 정절을 지키게 되었다."
법보다 풍속이, 처벌보다 수치심이 더 강력한 사회 통제 기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기자조선 신화의 붕괴
8조 금법을 둘러싼 또 하나의 왜곡이 있다. 중국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예조(濊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적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팔조교(八條敎)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기자가 8조 금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오랫동안 '기자조선설'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기록은 이것이 명백한 왜곡임을 증명한다.
8조 금법은 기원전 1282년, 색부루 단군이 제정한 법이다. 이는 은(殷)나라 말기보다도 앞선 시기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은 기원전 1122년경으로 추정되는데, 8조 금법은 이보다 160년이나 앞선다.
더 나아가 환단고기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자는 우리나라에 온 적이 없으며, 기자조선 자체가 허구라고. 중국 측 사서가 고조선의 위대한 법률을 중국인의 업적으로 둔갑시킨 전형적인 역사 왜곡인 것이다.
환단고기가 증명하는 진실
환단고기 비판론자들은 묻는다. "왜 환단고기의 내용을 믿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8조 금법의 나머지 다섯 조목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서』에 "범금팔조가 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그 내용을 기록한 중국이나 한국의 다른 어떤 사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환단고기가 기록한 단 하나의 완전한 법전 - 8조 금법 전문 - 이 2000년간 역사학계를 괴롭혀온 미스터리를 일거에 해결했다.
만약 이것이 근대의 위작이라면, 어떻게 『한서』에 암시만 되어 있던 8조 금법의 완전한 조문을 복원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그 내용이 고대 사회의 법률로서 완벽한 체계와 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이것이 실제로 전승되어 온 고대 법전임을 방증한다.
환단고기 진서론 증명의 지름길은 이처럼 명확하다. 환단고기가 기존 학계의 난제를 하나씩 풀어나갈 때마다, 그 진정성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8조 금법은 그 두 번째 증거이자, 가장 강력한 증거다.
환단고기 『번한세가 하』에 기록된 8조 금법 전문은, 단군조선이 체계적 법률을 갖춘 고대 문명국가였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환단고기가 고대로부터 전승된 역사서임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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