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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역사 칼럼

환단고기, 그것은 정말 위서인가?

by 광명인 2026. 1. 8.

2025년 12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을 순방하며 환단고기를 언급했다. 그 순간부터 강단 사학계와 정치인, 언론인들이 일제히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이라는 사람이 창작한 가짜 역사책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한사랑 윤창열 이사장은 이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지를 명확한 증거들로 반박한다. [이 글은 대한사랑 윤창열 이사장님의 환단고기 진서론 유튜브 강의를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 1

3세 어린아이가 창작했다는 모순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인물이 5권의 책을 합본해 30부를 인쇄했고, 그 중 한 권이 이유립에게 전해져 1979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단사학계는 이것이 5권의 책을 합본한 것이 아니고, 이유립 개인의 창작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2014년 10월 강화군청이 주관한 개천대축제에서 놀라운 물건이 전시되었다. 최현호라는 수집가가 내놓은 오래된 등사본 환단고기였다. 이것은 이후 운룡 도서관장 이명우최현호씨의 공저로 2020년에 『1909년 환단고기』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담겨 있었다.

이 등사본에는 "이기 주왈"이라는 형태의 주석이 13군데나 달려 있다. 삼성열기 부분에 5개, 단군세기 부분에 8개의 주석이다. 이 주석을 단 이기 선생1909년 7월 13일 나라가 쇠망해 가는 것을 비통해하며 경성의 한 여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서 간단한 산수가 나온다. 이유립은 1907년생이다. 1909년이면 겨우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어떻게 세 살짜리가 방대한 역사서를 창작하고, 그것에 이미 고인이 된 이기 선생의 주석까지 달 수 있단 말인가?

1924년, 이미 학계에 알려진 환단고기

시간을 조금 더 흘러가 보자. 이고선(1906~1982)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생 역사를 연구했고, 1981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연구를 모아 『심당전서』라는 책을 펴냈다. 그 안에 「환단세감」이라는 챕터가 있는데, 서문을 보면 "갑자년 10월 길달에,,,"라고 적혀 있다. 갑자년은 1924년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환단"이라는 말 자체가 1911년 환단고기가 출간된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 신조어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이 용어를 쓰지 않았다. 1924년에 이고선이 환단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히 환단고기를 보았다는 뜻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이 환단세감에는 7대 환인의 이름이 나온다.

  • 제1세 환인: 거발한
  • 제2세 환인: 혁서
  • 제3세 환인: 고시리
  • 제4세 환인: 주우양
  • 제5세 환인: 석제임
  • 제6세 환인: 구을리
  • 제7세 환인: 지위리

이 내용은 오직 환단고기의 삼성기하에만 나오는 독특한 기록이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고선이 환단고기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인 것이다.

1949년, 한 학자의 정성스런 필사

1949년 봄, 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한학자 오형기강화도 마니산에 들어갔다. 그는 본관이 동복이고 호가 해양인 선비였다. 어려서부터 약헌 조종근과 겸산 홍치유라는 학자 밑에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해남에서 해양서당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3월 16일,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을 만났다. 이유립은 그에게 부탁했다. "환단고기를 정성껏 베껴 써 주시오." 오형기는 붓을 들었다. 그의 장남 오영상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큰 글씨는 잘 못 썼지만 세필은, 즉 작은 글씨만큼은 인쇄한 것처럼 정갈하게 썼다고 한다.

두 달간의 작업 끝에 1949년 5월 상순, 오형기는 환단고기 전체를 필사하고 발문을 썼다.

"신시개천 5,846년 기축년(1949년) 5월 상순, 동복 오형기 발하다."

이 필사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오형기의 며느리 백순옥은 후일 이 필사본을 보고 즉시 알아봤다고 한다. "이건 우리 시아버지 글씨가 맞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붓글씨를 쓸 때 옆에서 몇 시간씩 먹을 갈아드렸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오형기가 쓴 다른 작품, 삼일신고 병풍도 현존한다. 환단고기 위서론자 중 한 명인 이문영오형기를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폄하했지만, 그는 후일 이유립 선생의 장례에서 장례위원장까지 맡았던 실존 인물이었다.

1967년, 무릎 꿇고 배운 제자의 증언

단단학회 회장을 지낸 양종현(고인)1967년부터 10여 년간 대전에 있는 이유립 선생의 댁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공부했던 교재는 바로 인쇄본 환단고기였다.

"우리는 인쇄된 환단고기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 귀중한 인쇄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유립 선생은 평생 책만 보다 보니 눈이 나빠져 의정부 근처에서 생활하다가 군산 공안과에서 몇 일간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사이 전세집 주인은 이유립 선생이 월세도 못 내고 야반도주했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주인은 이유립 선생의 집에 남아 있던 모든 책을 책 장수에게 팔아버렸다. 30부밖에 없었던 귀중한 인쇄본 환단고기 1권이 그렇게 사라지게 된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시간의 증언

이제 연대기를 정리해 보자.

  • 1897년경: 계연수와 이기가 만났다. 계연수 집안에 내려오던 삼성기상을 스승 이기에게 보였다.
  • 1909년 이전: 이기가 주석을 단 등사본 환단고기가 존재했다.
  • 1911년: 계연수가 5권을 합본해 30부를 인쇄했다.
  • 1924년: 이고선이 환단고기를 읽고 환단세감을 저술했다.
  • 1949년: 오형기가 환단고기 전체를 필사했다.
  • 1967~1977년: 양종현 등 제자들이 인쇄본으로 공부했다.
  • 1979년: 이유립이 일반 대중에게 환단고기를 출판했다.

이유립은 1907년에 태어나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1909년 당시 그는 세 살이었다. 1924년에는 열일곱 살이었다. 1949년에는 마흔두 살이었다. 1967년에는 예순 살이었다.

세 살 때 이미 존재했고, 열일곱 때 이미 학계에 알려졌으며, 마흔두 살 때 필사본이 만들어졌고, 예순 살 때 제자들을 가르쳤던 책을, 어떻게 이유립이 창작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윤창열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말 이 사태를 보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흑백 논리에 빠져 진실을 외면한 채 진실을 호도하고 비판하고 비아냥거릴 수 있는지, 그들이 정말 학자인지 의문이 듭니다."

환단고기이유립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계연수, 이기, 이고선, 오형기, 양종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고 전해진 역사의 증언이다. 그 안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뿌리가 담겨 있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의 창작이다"라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시간이 증언하고, 사람이 증언하며, 물증이 증언한다. 진실은 언제나 어둠을 이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