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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수행법/마음공부

금강경 사구게-마음공부

by 광명인 2024. 5. 30.

[금강경이 전하는 핵심 내용은 모든 현상은 시시각각 변화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형상고정된 실체가 있다거나 어떤 법영원한 진리라는 생각은 모두 헛된 망상이다. 심지어 부처님이 설하신 법조차 땟목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형상이나 소리, 냄새, 맛, 촉각이나 어떤 법에 끄달리지 말 것을 강조한다. 또한 철저히 아상(我相)을 무너뜨려야 함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아(無我)를 강조한 것은 윤회하는 영혼이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기 보다는 아상(我相)을 깨뜨려야 물아일체하고 자타불이도道의 중심자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금강경의 메세지는 마치 노자의 도덕경 1장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과 같은 의미구조이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므로 도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영원히 변화하는 그 상도(常道)가 아니며, 개념지어 고정된 이름은 영원히 변화하는 그 이름의 실체(常名)가 아님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도덕경은 무명 천지지시(無名 天地之始) 유명 만물지모(有名 萬物之母)라 하여 무유無有가 각각의 쓰임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무욕無欲으로 천지변화가 일어나는 그 미묘한 자리를 볼 수 있지만, 유욕有欲으로 그 변화가 나아갈 바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 서문의 다음 말씀과도 연결이 된다. 已形已見者 可以言知(이형이현자 가이언지) 未形未見者는 不可以名求니(미형미현자 불가이명구), 즉 괘와 효를 얻어 이미 형상이 있고 드러난 것은 안다고 말할 수가 있지만, 형상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무어라 명(名)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유무有無허조虛粗가 혼합되어 변화해간다. 그리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시시각각 변화해 가지만, 그 변화는 결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고 일정한 변화의 이법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다. 그러나 변화의 지엽에서 보면 비록 순간적인 환상이라 할지라도 만물은 제 각각 다채로운 변화를 지어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천부경은 이러한 무유無有의 전체 변화과정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해서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의 순환 변화의 패턴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는 셋으로 나누어져 태극의 구조를 이루어 무한한 변화를 지어내는데, 1에서 10으로 커졌다가 또다시 1로 수렴되어 하나의 주기를 마치게 되면 새로운 주기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이러한 순환 변화의 목적은 인간의 진화에 있다. 즉 성숙의 시간대에 천지의 심법과 합일된 태일의 인간을 배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천지와 합일한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런한 측면에서 금강경은 정말 위대한 경전이라 할 수 있겠다.] 

[금강경 사구게]

사구게는 슐로카(śloka)라는 인도의 시 형식으로 8음절1구(句)로 하여 4구(四句), 즉 32음절로 된 게송을 말한다. 대개 네 구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구게(四句偈)라고 말해지며, 경전의 한 내용이 끝나는 부분이나 맨 끝에 보이는 것이 상례이다. 본 게송에는 불교의 인생관, 진리관이 총망라되어 있어 예로부터 불교의 대의가 여실히 나타나 있는 부분으로 칭송되어 오고 있다. 특히 금강경의 사구게는 경전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게송으로 나타낸 부분이 네 부분이나 있기 때문에 이 사구게의 뜻을 잘 이해하면 그 경전의 전체 뜻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基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색신(色身)으로써 나(부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작위적인 법은 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해설: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것은 현실계에 드러난 모든 형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환상과 같은 것으로 허망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인연법에 따라 임시로 나타나게 된 것인데 우리들의 허망한 분별의식으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형상들이 형상 아닌 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형상들이 보기에는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공하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즉 진실로 비었을 때 모든 것이 구족하다는 것이다. 모든 형상들이 실제로는 공하다는 것을 알 때, 여래를 본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한다는 뜻이니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므로 그 허망한 것올바르게 이해할 때에 진리를 발견하고 참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금강경 주요 문구들]

*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 '나(我相)'라는 생각, '남(人相)'이라는 생각, '중생(衆生相) '이라는 생각, '오래 사는 자(壽者相)'는 생각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 바 모든 현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 만일 진리란 생각을 취하여도 라는 생각, 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사는 자는 생각에 걸리게 되며, 그릇된 법이란 생각을 취하여도 곧 라는 생각, 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사는 자라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를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것이니,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희 비구는 내가 말한 법땟목과 같은 줄을 알라."하였으니 진리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랴. 

*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찢기울 적에 내가 그 때에 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이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오래 사는 자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니,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찢기고 끊길 그 때 만약 나에게 라는 생각, 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사는 자는 생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 

*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관념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지니, 형상에 끄달리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 냄새, 맛, 닿는 것과 어떤 법에도 끄달리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 수보리야, 보살이 만약 마음을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 가운데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만약 마음을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햇빛이 밝게 비칠적에 밝은 눈으로 갖가지 온갖 물체를 분별해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 수보리야,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한다고 말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실로 여래에게는 제도한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여래에게 중생이 있고 또 여래가 제도함이 있다면 여래는 곧 라는 생각, 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사는 자는 생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1) 아상(我相, atman samina)
아상이란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나(我)' 혹은 ‘자아(自我)'라는 생각을 말한다. 여기서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주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 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이르러 보니 우주만의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각은 생주이멸 (生住離滅)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면서 자아를 신[브라흐만]에게 종속시키는 범아일여(凡我一如)의 신중심사회(神中心社會)로서 인간이 신의 노예로 전락해 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본중심의 새로운 사상을 세우고, 인연의 법칙에 의해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펼쳤다. 그리하여 아상을 여의라고 하셨다. 즉 아상이란 오온(五蘊;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나, 나의 것, 자아"라는 상을 가지고 집착하는 것이라 했고, 모든 괴로움이란 한 마디로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 이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다른 상(相)들도 모두 이 아상으로 인해 비롯된다. 즉, 인상, 수자상, 중생상은 아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4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 하나가 바로 아상(我相)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존재의 상에 빠지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아상을 못 여읜다면 범부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되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려서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가 돼야 비로소 해탈이 된다. 즉, 아상이 부서지면 모든 상이 다 부서지고, 아상을 버리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2)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ina)
붓다는 바라문들이 윤회의 주체라고 한 아트만(atman)을 현실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한 가공의 망상이라고 부정했다. 그러나 부파 불교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불명 후 300년 경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독립한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생사 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 했다. 즉,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뿌드갈라란 중생에게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어떤 실체가 '개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뿌드갈라를 구마 라습은 인(人)으로 옮겼고 현장은 보특가라(補特伽羅)로 음사했다.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조작된 허구임을 모르고 몸과 마음속에 따로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고 여기는 그릇된 착각인상(人相)이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연속성은 있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뿌드갈라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로 상정돼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뿌드갈라의 존재라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인간이 축생에 비해 우월하지만 천상의 여러 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미천한 인간이지만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고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을 해서 교만하다.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그 교만한 마음의 인상(개아)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해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해석에서는 인상(人相)아상(我相)처럼 집착하는 모습의 하나로서, '남'을 의식하는 데에서 오는 행동과 생각이라 말해왔다. 이와 같이 개아(인상)나와 남을 갈라놓는 분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我相)의 연장이라 하겠다.

즉, 개아는 진아(眞我)와 대비되는 아상으로서 진아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기(개아)를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자기(개아)를 버림은 곧 망심과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움[공(空)]을 말함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독자부의 뿌드갈라(pudgala)를 부정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비약이다. 왜냐하면 뿌드갈라를 제시한 독자부가 생긴 것은 불멸 후 300년이 경과한 후의 일이기 때문에 석존께서 직접 뿌드 갈라를 지적하셨다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3)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ina)
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이것을 구마라습은 중생(衆生)으로 현장은 유정(有情)으로 번역했다. 이 중생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일컫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미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둘째: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난다. 즉 별다른 수행도 없이 고(苦)가 없는 천계(天界)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심이다. 비슷하게 기복불교(祈福佛敎)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다.
    셋째 :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이다.
    넷째 :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오온(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我相)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이다.
    다섯째 :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즉, 본래 하나인 자성(自性)을 각득하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퇴굴심을 내는 것이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有情-중생)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부처와 다른 실재가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 같다.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기 비하적인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부처와 중생들을 분별해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 한다거나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 그것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4) 수자상(壽者相, jiva samina)
수자상의 원어인 jiva는 영혼, 목숨, 생명이라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생사를 초월한 존재 또는 영원불멸의 ‘순수영혼’이 있다는 견해로서, 구마라습은 수(壽)로 현장은 명(命)으로 번역했다.

오온(五蘊)은 모두가 실체가 없어 한시도 머물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영생불멸의 윤회하는 주체로서 순수영혼이 있어서 오온은 사라져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릇된 착각을 한다. 그것이 수자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설'을 반박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교설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헌데 종전에는 이 수자상을 '목숨'으로 이해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이라 해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의 존재설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상과 같이 아상(我相)· 민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말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주장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잘못된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4상을 극복할 때 비로소 해탈을 성취할 수 있으련만 어리석은 중생이 어찌 4상이라는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출처: 단순한 일상의 풍요 블러그 https://blog.naver.com/karsamo/220838222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