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환단고기 논란, 그 이면의 질문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환빠'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많은 언론인들이 환단고기를 읽어보지도 않고 "위서다, 사이비다"라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는 과연 '상식적'일까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최근 박사학위를 받은 소대봉 박사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다닐 때는 이런 궁금증이 전혀 없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다시 공부하면서 너무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다"고 말입니다. 그가 발견한 '이상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환단고기 논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래는 소대봉 박사의 강의를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1부: 동쪽이 남쪽이 되고, 발해가 황해가 되는 마법
상식이 통하지 않는 두 가지 문장
소대봉 박사는 한국사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두 문장을 제시합니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첫 번째: "從齊浮渤海(종제부발해)" "제나라 땅에서 배를 띄워 발해를 건넜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 누선장군 양복을 보냈습니다. 제나라(지금의 산동성) 땅에서 배를 띄워 발해를 건너 고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발해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름이 바뀐 적 없는 바다입니다. 지금도 발해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바다죠.
만약 발해를 건넜다면 천진이나 하북성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뭐라고 배웠나요? "한나라 군대가 평양으로 쳐들어갔다"고 배웠습니다. 산동에서 평양으로 가려면? 발해가 아니라 황해를 건너야 합니다. 원사료에는 분명히 발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황해를 건넌 것으로 해석할까요?
두 번째: "東之辰國(동지진국)"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고조선 우거왕 때, 신하 역계경이 왕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자기 부하 2천 호를 이끌고 "동쪽의 진국"으로 망명합니다. 만약 왕검성(고조선 수도)이 평양이었다면 "동쪽"은 어디일까요? 함경남도 원산 방향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진국이 어디에 있었다고 배웠나요? 전라도입니다. 평양에서 보면 남쪽입니다.
동쪽은 동쪽이고, 남쪽은 남쪽입니다. 이건 헷갈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동쪽으로 갔다는 기록을 남쪽으로 간 것으로 해석할까요?

상식이 안 통하면 무조건 외워야 한다
소대봉 박사는 말합니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니까 역사가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 무조건 외워야 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대신 '암기'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역사는 원래 어려운 거야", "전문가한테 맡겨야 해"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가 원래 어려운 게 아닙니다. 상식과 맞지 않는 해석을 강요받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2부: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 모든 논쟁의 출발점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지도
한국 고대사의 모든 논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현재 한국 사회에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지도가 공존합니다.

지도 A: 현재 모든 교과서에 실린 지도
- 낙랑군: 평양
- 한사군 모두 한반도 북부에 위치
- 이병도 박사의 『국사대관』 이래 확립된 통설
지도 B: 재야 사학계의 지도
- 낙랑군: 요서(遼西) 지역, 지금의 하북성 일대
-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 서쪽을 의미
- 근거: 『사기』, 『한서』, 『진서』, 『위서』 등 중국 정사(正史)들
두 지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은 우리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키고, 다른 쪽은 만주와 요동까지 확장합니다.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고조선은 작은 소국이었고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하지만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은 훨씬 더 큰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었고, 한나라의 식민지배는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지리 논쟁이 아닌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3부: 최근 10년, 반복되는 역사 전쟁
소대봉 박사는 최근 10년간 반복적으로 일어난 역사 논쟁들을 소개합니다. 놀랍게도 모두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사건 1: 2014년 '고대한국 프로젝트' 파동
동북아역사재단이 국민 세금 10억 원을 들여 미국인 교수 마크 바잉턴(Mark E. Byington)에게 한국 고대사 연구를 맡깁니다. 그가 썼던 책의 제목은?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 (한국 초기 역사에서의 한사군)

책 제목부터 충격적입니다. '한국 고대사'가 아니라 '한사군'에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한사군은 한나라가 설치한 식민 통치 기구입니다. 우리 역사를 식민지배에서부터 서술하겠다는 거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것이 1915년 조선총독부가 만들려던 『조선반도사』와 똑같은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100년 전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틀을, 2014년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세금으로, 영어로 만들어 전 세계에 퍼뜨리려 했던 것입니다. (현재 하와이 대학 출판부에서 판매중임, 링크 참조)
사건 2: 2016년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굴욕
47억 원의 예산, 60명의 역사학자, 8년의 작업. 그 결과물을 국회에서 중간 검토했을 때 드러난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 조조의 위나라가 경기도 북부까지 점령했다고 표기
- 4세기까지 신라와 백제가 없었다고 기술
- 중국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1982)을 거의 복사
- 독도가 빠져 있었음
출판사에서 일했던 소대봉 박사는 말합니다. "지금도 교과서 심사에서 두 가지는 무조건 탈락입니다. 태극기 훼손, 독도 누락. 다른 내용이 좋든 나쁘든 무조건 탈락이에요." 독도를 그려 넣으라고 두 번, 세 번 요청했는데도 안 그려왔다고 합니다. 의도적이었던 것이죠. 결국 사업은 탈락했습니다.
사건 3: 2023년 가야고분군과 일본서기의 그림자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남원을 '己汶國(기문국)', 합천을 '多羅國(다라국)'으로 표기했던 것입니다.
왜 문제일까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런 나라 이름이 없습니다. 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같은 이름은 있지만 '기문국', '다라국'은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나올까요? 일본서기에만 나옵니다.
720년에 만들어진 『일본서기』는 일본 학자들조차 "반은 진짜, 반은 가짜"(쓰다 소키치)라고 평가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에 없는 이름을 『일본서기』에서 가져다 쓴 것입니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기문국이란 말이냐? 우리 선조들이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일본군에게 얼마나 많이 학살당했는데, 우리를 일본의 후예로 만드는 거냐?"
결국 유네스코가 개입했습니다. "기문, 다라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름을 바꾸시오." 그래서 '운봉고원 가야 정치체', '쌍책의 가라 정치체'로 바꾸고 나서야 등재됐습니다.

사건 4: 2024년 전라도천년사의 좌초
광주, 전남, 전북이 5년간 24억 원을 들여 213명의 학자가 집필한 『전라도천년사』. 인쇄하고 배포하려는 순간, 시민들이 내용을 확인하고 경악했습니다.
- 『일본서기』의 일본식 지명으로 전라도 고대사 기술
- 고조선을 기원전 7세기 이전에는 없었다고 서술
- 장수를 '반파국', 해남·강진을 '침미다례국'으로 표기 (모두 일본서기 출전)
전라도 시민단체들이 치열하게 싸운 끝에, 2024년 12월 배포가 중단됐습니다.
위 사건들의 패턴이 보십니까?
이제 이 모든 사건에서 공통점이 보입니다:
- 정부나 지자체 예산으로 진행
- 수십 명의 '전문' 역사학자 참여
-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키고, 고조선 역사 축소
- 중국이나 일본 사료를 우리 사료보다 우선시
- 시민사회가 문제 제기하면 "사이비", "학문적 테러"라고 비난
- 결국 시민들의 힘으로 중단
4부: "남인실학자"라는 방패막이
"우리는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정약용을 따랐다"
이런 논쟁이 반복되자, 비판받는 쪽에서 재미있는 반론을 내놓습니다. 가톨릭대 기경량 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제대로 된 학자라면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논쟁이 끝났다."
100년 전? 2024년 기준으로 100년 전은 1924년입니다. 일제강점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논쟁이 끝났다"는 말은 곧 "조선총독부 학자들이 정리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당연히 비판이 쏟아집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식민사학자라는 거 아니냐?"
그러자 기경량이 말을 바꿉니다:
"좋다. 그럼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쟁을 끝냈다고 하자."
그리고 이름을 거론합니다:
- 안정복 - 『동사강목』을 쓴 학자
- 정약용 - 『아방강역고』(우리나라 강역 고찰)를 쓴 학자
- 한진서, 한치윤 - 『해동역사』를 쓴 학자들
"이렇게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남인 실학자들이 200년 전에 다 정리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이비 역사학자다!"
실학자를 방패로 삼는 이유
왜 갑자기 '남인실학자'를 들고 나왔을까요? 소대봉 박사는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
일제는 우리를 식민지배하면서 세 가지 논리를 폈습니다:
- 정체성론: 조선은 역사가 정체돼 있어서 스스로 발전 못 함
- 타율성론: 조선은 늘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음
- 당파성론: 조선은 파벌싸움만 하다가 망함
독립운동가들(정인보, 최남선, 안재홍)은 이 논리를 깨뜨릴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실학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화 요소가 있었다!" "신분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우리도 주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안재홍은 정약용을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자", "근세 자유주의의 거대한 조종"이라고까지 평가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실학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실학 = 민족의 자랑'이라는 인식이 확립됩니다.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무기가 실학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역설:
그런데 지금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이 '실학'을 방패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따른 게 아니야!" "우리는 정약용, 안정복 같은 위대한 실학자들을 따른 거야!" "실학자를 비판하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야!" 식민사학 극복의 무기였던 실학이, 역설적으로 식민사학을 보호하는 방패가 된 것입니다.

5부: 정말 논쟁은 끝났는가?
계승관계의 환상
주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그들 역사관의 계승관계는 이렇습니다:
중국 사서 주석가들 (위진남북조~청나라, 1000년 이상)
↓
남인 실학자들 (조선 후기, 200년 전)
↓
일제 식민사학자들 (1910~1945)
↓
현재 주류 강단사학
"1000년 이상 중국의 모든 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했고, 우리 실학자들도 동의했고, 일본 학자들도 그렇게 했으니, 이건 정설이다!"
소대봉 박사는 묻습니다: "정말 그런가?"
그의 박사논문과 곧 나올 책 『남인실학자와 식민사학』은 바로 이 계승관계가 허구임을 밝히려는 작업입니다.
확인해야 할 세 가지 질문 (이 부분은 밑에서 추가적으로 논의 하겠습니다)
- 중국 사서 주석가들이 정말 모두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켰나?
- 『사기』, 『한서』, 『진서』, 『위서』의 원문과 주석을 다시 살펴봐야
- 남인 실학자들의 역사지리 연구방법론이 타당한가?
- 그들은 어떤 근거로 낙랑군을 평양에 비정했나?
- 그 방법론에 문제는 없었나?
- 이것이 정말 식민사학과 무관한가?
- 남인 실학자의 견해와 조선총독부의 견해가 어떻게 일치하게 됐나?
소대봉 박사는 말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료가 디지털화됐고, ChatGPT는 한문을 거의 정확하게 번역해줍니다. 관점만 정확히 가지면 됩니다."
6부: 역사학의 민주화 - 전문가 독점 시대의 종말
"전문가한테 맡겨라"는 말의 함정
역사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재야에서 뭘 아느냐? 우리처럼 박사학위를 받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전문가들이 잘 알지. 전문가한테 맡겨라."
소대봉 박사는 반문합니다:
"맡기고 싶은데,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고 설명도 못 하는 걸 전문가한테 맡겨라? 문제가 있죠."
그는 최근 한국 사회의 사례를 듭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문제되는 게 전문가한테 맡겨라 하고 검찰한테 맡겨 놨더니 지금 검찰청이 없어질 지경이 됐죠. 판사한테 다 맡겨 놨더니 윤석열을 풀어줬단 말이에요." 지금은 전문가의 권위가 더 이상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역사 민주화의 조건들
과거에는 전문가 독점이 불가피했습니다:
- 사료가 독점돼 있었음
- 한문 해석이 어려웠음
- 자료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음
하지만 지금은?
- 모든 사료가 디지털 데이터로 인터넷에 공개
- ChatGPT가 한문을 거의 정확하게 번역
- 누구나 원사료를 확인하고 검증 가능
소대봉 박사는 선언합니다:
"이제는 역사도 확실하게 대중화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춰졌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뉴 미디어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조건과 환경이 됐다."
필요한 것은 "상식적인 올바른 관점"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점만 정확히 가지면 됩니다. 어떤 관점으로 역사를 다시 해석해 볼 것인가, 그게 중요하겠죠."
그 관점이란 무엇일까요?
- 상식을 존중하라
- 동쪽은 동쪽이고 남쪽은 남쪽이다
- 발해는 발해고 황해는 황해다
- 말이 안 되면 다시 질문하라
- 원사료를 직접 확인하라
- 누군가의 해석을 믿기 전에 원문을 봐라
- "전문가가 그렇게 말했다"는 권위에 기대지 마라
- 일관성을 따져라
- 왜 일본서기는 믿으면서 환단고기는 의심하나?
- 왜 중국 주석은 무조건 믿으면서 한국 사서는 부정하나?

에필로그: 환단고기 논란으로 다시 돌아가며
이제 우리는 환단고기 논란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정말 '사이비'인가?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 "1911년에 갑자기 나타난 책"
- "역사적 근거가 없다"
- "과장되고 황당하다"
하지만 소대봉 박사의 강의는 이렇게 반문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정말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까?"
- 발해를 황해로 바꿔 해석하는 것은 황당하지 않나요?
- 동쪽을 남쪽으로 바꿔 읽는 것은 과장이 아닌가요?
- 삼국사기에 없는 이름을 일본서기에서 가져오는 것은 근거가 있나요?
진짜 문제는 '이중잣대'
환단고기 논란의 본질은 책의 진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역사를 대하는 이중잣대입니다.
- 720년에 쓰인 일본서기는 믿으면서, 1911년에 공개된 환단고기는 의심한다
- 중국 사서의 주석은 무조건 따르면서, 한국 고유 사서는 부정한다
-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정설"이고,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이비"다
홍익인간 vs 중화사관
소대봉 박사의 연구 주제를 기억해봅시다: "한국 선도의 홍익 정치 전통과 삼균주의의 미래" 그는 "선도의 홍익 사관"과 "유교의 중화사관"을 대비시킵니다.
- 중화사관: 중국이 세계의 중심, 주변은 오랑캐
- 홍익사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 모든 민족이 평등
환단고기가 다루는 것이 바로 이 홍익인간 이념의 역사입니다.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홍익이화의 전통 말입니다.주류 강단사학이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히 한 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홍익인간 중심의 역사관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낙랑군 위치가 결정하는 것
기경량 교수의 말을 기억합니다: "관건은 낙랑군의 위치 문제다."
맞습니다. 낙랑군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의 작은 소국
- 우리는 일찍부터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음
- 환단고기는 말도 안 되는 과장
- 우리 역사는 기껏해야 2000년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면:
- 고조선은 만주와 요동을 아우른 강대국
- 한나라의 영향은 제한적
- 환단고기가 말하는 광대한 영토가 개연성을 얻음
- 우리 역사는 환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
결론: 읽어보지도 않고 떠들지 마라
소대봉 박사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을 '전문가'라는 권위로 강요하지 말라"
환단고기 논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읽어보지도 않고, 내용도 모르면서, 권위만으로 위서라고 단정하지 마라"
환단고기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최소한 이런 질문은 먼저 해야 합니다:
- 나는 환단고기를 직접 읽어봤는가?
- 환단고기가 말하는 내용을 정확히 아는가?
-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근거가 일관성 있는가?
- 나는 교과서에 실린 역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소대봉 박사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도 10년 후에야 "이상하다"고 느낀 것처럼, 우리도 당연하게 여긴 것들을 다시 질문해야 할 때입니다. 진실은 권위가 아니라 상식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는 전문가의 독점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할 권리는 국민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제는 역사를 확실하게 대중화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관점만 정확히 가지면 됩니다."
확인해야 할 세 가지 질문 - 추가 설명
1. 중국 사서 주석들이 모두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켰나?
실상은 훨씬 복잡합니다:
- 일치하지 않는 기록들: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는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들어 패수가 평양의 대동강"이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원본인 『수경(水經)』 자체는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과 정반대입니다.
- 요동/요서설도 존재: 『요사(遼史)』 등 일부 중국 사서는 낙랑군이 만주 서부(요동 혹은 요서)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 2015년 중국 발굴: 베이징 천안문에서 남서쪽 20km 지점에서 동위(東魏, 539년) 시대 묘비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낙랑군 조선현 출신"이라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이는 6세기까지도 중국 대륙에 낙랑군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 "1000년 이상 중국의 모든 학자들이 한반도에 위치시켰다"는 주장은 과장입니다.
2. 남인실학자들의 역사지리 연구방법론이 타당한가?
실학자들의 연구 배경:
- 안정복 『동사강목』(1778):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 한국 사서를 근거로 패수를 대동강으로, 낙랑군을 평양으로 비정했습니다.
- 정약용 『아방강역고』(1811-1813): 유배지 강진에서 10년간 문헌 고증으로 작성. "이경증경(以經證經)" 방법 - 이 사서로 저 사서를 증명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방법론의 한계:
- 문헌 중심, 실증 부재: 실지 답사나 고고학적 검증 없이 오직 문헌만으로 연구
- 한중 사서의 선택적 인용: 자신의 가설에 맞는 사료만 선택적으로 채택
- 상반되는 기록 처리 미흡: 『수경』처럼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기록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불분명
- 중화사관의 영향: 조선 후기는 중화사관이 극도로 심화된 시기였으며, 중국 사서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경향
핵심 문제: 강의에서 소대봉 박사가 제기한 "從齊浮渤海"(발해를 건넘)와 "東之辰國"(동쪽의 진국) 같은 명백한 모순을 실학자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3. 강단사학은 정말 식민사학과 무관한가?
복잡한 계승관계:
조선총독부의 역사 왜곡 구조:
- 조선사편수회(1925-1945):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35권의 『조선사』 편찬
- 원래 명칭은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를 반도에 가두려는 의도가 드러남
- 1915년 기획 단계의 목차: 1장이 "한사군의 설치", 1절이 "사군의 건치와 강역"
이병도의 역할:
- 1925-1927: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 1927-1938: 촉탁(무급)으로 계속 활동
- 해방 후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장, 문교부 장관 역임
- 그의 제자들이 현재 한국 사학계의 주류를 형성
이병도의 변명: "낙랑군=평양설은 일제로부터 배운 게 아니라 조선 실학자들로부터 계승받은 것이다."
진실은?
- 실학자들이 먼저 주장한 것은 맞습니다 - 200년 전 실학자들이 낙랑군을 평양으로 비정
- 하지만 일제가 이를 적극 활용: 실학자들의 권위를 빌려 식민사관을 정당화
- 결정적 차이: 실학자들은 고조선을 부정하지 않았고, 단군을 존중했습니다. 반면 일제는 고조선을 신화로 격하하고, "한반도 북부는 중국 식민지, 남부는 일본 식민지"라는 틀을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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