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한쪽에서는 "허무맹랑한 위서"라며 일축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 고대사의 진실"이라며 옹호합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대표적 석학이 이 책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고(故) 한영우 교수님입니다. (이 내용은 아래 최명희 박사의 유튜브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영우 교수, 그는 누구인가?
한영우 교수는 단순한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서울대 문리과 대학 사범대 국사과를 모두 졸업하시고, 한국문화연구소장, 규장각 관장, 인문대 학장을 거친 정통 사학자이십니다. 특히 한국의 사학사(역사학의 역사)를 평생 연구하신 분으로,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국내외에서 한국사의 표준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읽히는 책이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다시 찾아야 할 우리 역사"가 있다고 믿었던 학자입니다.
실제로 그의 연표를 보면 한국사가 고조선부터가 아니라 홍산문화부터 시작됩니다. 고조선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명시하고, 그 이전 시대부터 우리 역사로 인정하는 자주적 역사관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데, 환단고기는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닙니다. 약 1000여년에 걸쳐 다섯 분에 의해 쓰여진 네 권의 책을 모은 편찬서입니다.
첫 번째, 삼성기(三聖記)
환인-환웅-단군, 이 세 분의 성인 시대를 다룬 책입니다. 신라 말 승려 안함로가 쓴 상편과, 고려 말 원동중이 쓴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군세기(檀君世紀) - 오늘의 핵심
고려 말 고위 관료였던 행촌 이암이 저술한 책입니다. 단군이 한 분이 아니라 47대에 걸쳐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각 단군의 이름과 업적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세 번째, 북부여기(北扶餘記)
고려 말 범장이라는 학자가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역사를 정리한 책입니다.
네 번째, 태백일사(太白逸史)
조선 중종 때 이맥이 저술했습니다. 이분은 행촌 이암의 5대손으로, 가문에 전해오던 장서와 자신이 관직에서 본 옛 전적들을 종합해 방대한 역사서를 남겼습니다. 환단고기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만큼 분량이 많습니다.
이 네 권의 책은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 선생이 만주에서 하나로 엮어 발간했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등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수만 필사되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1979년 이유립 선생이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왜 이제야 알려졌을까? - 조선시대의 역사 탄압
"그렇게 중요한 책이면 왜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에 나오지 않나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조선시대의 참혹한 역사 탄압에 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과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았습니다. 자주적인 우리 역사를 기록한 책들은 철저히 탄압받았죠.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들이 가득합니다.
태종 12년: 『신비집(神祕集)』이라는 역사책을 강제로 불태웠습니다.
태종 17년: "요서(妖書, 요사스러운 책)"라는 이름으로 고대 역사책을 규정하고, 이를 소장한 사람을 밀고하도록 장려했습니다. 밀고한 사람에게는 그 집안의 재산을 상으로 주었고, 숨긴 사람은 참형에 처했습니다.
예종실록: 역사책을 바친 사람에게는 2품계를 올려주고, 노비에게는 면포 50필을 주었습니다. 반대로 숨기는 사람은 참형, 즉 목을 베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내가 노비라면, 주인이 금지된 역사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밀고하면 그 집안의 재산을 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인은 목숨을 잃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고대 역사책을 보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행촌 이암의 후손인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이 책들을 수백 년 동안 극비리에 은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문의 노비조차 모르게, 대대로 물려가며 목숨을 걸고 지켜온 것입니다.
행촌 이암, 그는 누구인가?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1297-1364)은 고려 말의 대표적 정치가입니다.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수문하시중까지 오른 최고위 관료였죠. 6명의 왕을 거치며 재상과 원로대신 역할을 했고, 충의왕 때부터 신임받아 원나라에서도 활약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도 대단합니다. 『단군세기』 외에도 『태백진훈』(단군 시대의 사상서), 『농상집요』(농업서) 등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조맹부체의 대가로 알려진 당대의 명필이었습니다. 교우 관계도 화려합니다. 이색(묘지명을 써준 제자), 조준(손녀사위, 조선 초 토지개혁 주도), 정몽주, 권근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쟁쟁한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한영우 교수는 고려 말 사상계를 두 갈래로 분류합니다.
- 순정 성리학자 - 친중국적이고 교조적
- 민족사상과 절충된 성리학자 - 자주적이고 개방적
행촌 이암은 두 번째 부류였습니다. 강화도에서 활동하며 고려의 자주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이죠. 그런데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이런 계파의 학자들은 역사에서 점점 잊혀졌습니다. 우리가 정몽주나 이색은 잘 알지만 행촌 이암을 잘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영우 교수의 검증 - 그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한영우 교수는 2002년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단군세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증거: 가문의 공식 기록
고성 이씨 가문에 전해오는 『행촌 선생 연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67세 10월에 단제세기(檀帝世紀)를 썼다"
단재기는 단군세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것은 야사가 아닌 가문의 공식 기록입니다.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정리하며 남긴 신뢰도 높은 자료인 것이죠.
두 번째 증거: 세 문헌의 비교 분석
한영우 교수는 단군 관련 세 가지 문헌을 비교 분석했습니다.
| 단군세기 | 단기고사 | 규원사화 | |
| 단군 수 | 47세 | 47세 | 47세 |
| 재위 기간 | 2,096년 | 2,096년 | 1,195년 |
| 특징 | 소략함, 현대적 감각 적음 | 윤색됨, 현대적 표현 많음 | 전조선/후조선 구분 |
놀라운 점은 세 책 모두 47대 단군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책이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영우 교수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단군세기가 가장 원형에 가깝고, 단기고사는 단군세기를 토대로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규원사화는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귀중본으로 등록되었고, 고서심의위원회에서 조선 숙종 때의 진본으로 확인된 책입니다. 위서 논란이 거의 없는 책이죠.
세 번째: 서문 문제와 균형잡힌 결론
한영우 교수는 학자로서 정직하게 문제점도 지적합니다. 현재 전해지는 단군세기의 서문에는 "고려의 도가 없어지니 몽골이 침입했다"는 등 현대적 표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려 관료가 "고려"나 "몽골"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문은 후대의 이기(해학), 계연수, 이유립 등이 일부 윤색했을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의 최종 결론은 이렇습니다.
"설사 후세인들의 손을 거쳐 윤색, 가필되었다는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전적으로 위서로 판정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단군세기도 행촌이 지은 모본을 토대로 후세인들이 중첩적으로 가필,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즉,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의 모본(母本)을 지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쓸 수 있었나?
한영우 교수는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김부식이 참고했던 구삼국사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단군본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행촌 이암의 시대까지 전승되었습니다. 또한 삼성기 같은 고서들도 존재했습니다.
행촌 이암은 이런 고서들을 참고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국무총리급 관료로서 각종 사료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연, 이승유 같은 선배 학자들의 단군 기록도 볼 수 있었죠.
한영우 교수는 이렇게 추론합니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원형은 일연, 이승유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행촌은 후대 인물이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단군 기록보다 한 단계 더 자세한 내용을 담았을 것이며, 그래서 1세 단군에 머물지 않고 47세 단군의 왕계표를 작성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영우 교수의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첫째,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라
조선이나 고려시대 기록에 책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위서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선시대의 혹독한 역사 탄압을 고려하면, 오히려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학술적 검증을 존중하라
환단고기를 무조건 신봉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양극단은 모두 문제입니다. 한영우 교수 같은 석학의 신중하고 균형잡힌 연구를 참고해야 합니다.
셋째, 관점의 중요성을 인식하라
역사는 관점의 학문입니다.
- 조선의 유교학자들은 중화주의 사관으로 역사를 봤습니다
-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자주적 사관이 필요합니다
한영우 교수는 말합니다.
"야사에서는 행촌이 단군세기와 태백진훈 등의 저술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책들이 일제시대 애국지사들의 손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과연 행촌이 그러한 저술을 남겼는지는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도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행촌의 생애와 사상에 그러한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후세인들이 연면히 계승해서 확대 발전시켜 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지성사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며
환단고기는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수백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온 역사적 기억입니다. 조선시대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도, 누군가는 이 책을 지키고 전했습니다.
물론 현재 전해지는 환단고기에 후대의 가필이나 윤색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영우 교수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그 핵심에는 행촌 이암이라는 고려 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가 남긴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허무맹랑한 위서"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보지도 않고 판단하지 말고, 읽어보지도 않고 비판하지 맙시다. 대신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고,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우리 나름의 자주적 역사관을 세워갑시다. 환단고기 논쟁은 단순한 책 한 권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한영우 교수의 연구는 그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참고문헌
- 한영우,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2002
-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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