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역사 용어에 숨겨진 의도
조선 후기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용어 자체가 노론의 역사 왜곡을 담고 있습니다. 영조 시대는 노론이 주도한 시대였고, 정조 시대는 소외되었던 남인과 소론을 정국에 끌어들여 개혁 정치를 펼친 시대였습니다. 이 두 시대는 성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어 정조의 개혁적 행보를 축소하고 영조 시대의 연장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 노론은 조선의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장악했으며, 1910년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행위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 마지막 당수가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덕일 소장의 아래 유튜브 강의를 요약정리 한 것인데, 어떤 이들에겐 상당히 불편한 진실로 들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1. 윤휴의 개혁과 노론의 저항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하자, 놀랍게도 숙종은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남인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했습니다. 이때 윤휴가 드디어 조정에 나오게 됩니다.
윤휴의 주요 개혁 정책:
북벌 추진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한 군사력 강화를 주장했습니다.
신분제 완화 - 지패법(紙牌法) 당시 조선에서는 2품 이상 벼슬아치는 상아로 된 호패를, 양반은 뿔로 된 호패를, 일반 상민은 나무로 된 호패를 차고 다녔습니다. 호패의 재질만 봐도 신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휴는 이를 예로 들며 신분제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정묘호란 때 청나라군이 평안도 안주성을 포위했을 때, 평안도 관찰사 윤훤이 군사들에게 나가 싸우자고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나무 호패를 쌓아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병사들은 "임진왜란 때 신분제를 해체할 것처럼 하다가 전쟁 끝나고 또 우리를 천민으로 만들었다. 저들(양반)이나 보고 나가 싸우라"고 항변했던 것입니다.
윤휴는 이러한 신분 차별을 없애기 위해 모두에게 종이로 된 호패를 주자는 지패법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전차(戰車) 도입 조선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전차 제작을 주장했으며,
만인과(萬人科) 실시 무과 시험에서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든 이에게 응시 자격을 주자고 주장했고,
호포법(戶布法) 양반들도 병역세를 내게 하자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병역세를 면제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들로 인해 서인들은 윤휴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2. 송시열의 주자학 유일사상
윤휴가 사형당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송시열이 주도한 주자학 유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송시열의 사상은 단순했습니다. 그는 《송자대전》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주자(주희)가 만세도통으로 다 밝혀놓았기 때문에 그냥 주자의 말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식민사학이 "공부할 필요 없다. 일본인 스승님들이 다 밝혀놓았으니 그냥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구조입니다.
사서(四書) 중 《중용》과 《대학》은 원래 《예기》라는 책의 49편 중 각각 한 편씩이었는데, 주희가 이를 따로 떼어내어 독립된 책인 것처럼 만들고 장과 절을 구분하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은 이 주석을 외우는 것이 학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윤휴가 공부하다 보니 주희의 장절 구분과 주석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따로 장절을 구분하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에 송시열이 찾아와 "네가 감히 주자의 주석을 없는 것으로 하고 주석으로 바꿀 수 있느냐"고 추궁하자, 윤휴는 멋진 대답을 했습니다.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만약 주자가 다시 살아나면 자기가 맞다고 하겠지만, 자사(《중용》의 원저자)가 다시 태어나면 내가 맞다고 할 것이다."
나중에 윤휴가 사형당할 때 남긴 말도 유명합니다.
"국가에서 유학자로 선비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건 뭐가 있느냐?"
송시열은 나중에 자기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윤휴가 왜 사형당했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이 여러 답변을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자를 능멸했기 때문이다. 바로 주자를 능멸했기 때문에 사형당한 것이다."
송시열과 윤휴의 관계는 현대로 치면 양김(김영삼-김대중) 관계 비슷했습니다. 한 명을 주자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3. 주자학 외의 학문은 이단
조선에서는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하면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주자는 남송 때 사람으로 1200년경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로부터 3~40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주자학만을 고수하니 사상 체계가 맞을 리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왕양명이 나와 양명학을 발전시켰지만, 조선에서는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래서 양명학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양명학을 믿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곡 정제두는 자신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강화도로 가서 공개적으로 양명학을 주장했고, 그의 제자들이 강화도와 충청북도 진천에서 양명학의 맥을 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반면 노론은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송시열파가 고착화시킨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 때문에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이 많이 사형당했고, 수운 최제우 선생이 사형당했으며, 동학 교도들이 탄압받았습니다.
4. 경신환국과 정치 공작의 옹호
숙종 6년(1680년) 경신년에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합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았습니다. '출척'이란 소인배가 쫓겨나고 군자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앞에 '대(大)'자까지 붙여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것을 마치 정의가 실현된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신분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북벌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무슨 '대출척'입니까? 저는 중립적인 용어가 없을까 찾아보다가 환국(換局)이라는 조선의 정치 용어를 찾아냈습니다. '국면이 전환되었다'는 뜻으로 정권 교체를 의미합니다. 제가 이 용어를 쓰기 시작한 후로 요즘은 대부분 '환국'으로 씁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들은 윤휴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윤휴를 죽일 죄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서인들은 숙종에게 "죽일 죄는 없지만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 죽이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 노론과 소론의 분열
숙종 27년(1701년)에 남인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정치 공작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정치 공작임이 밝혀지면서 전국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실제로 역모를 하지 않았는데 역모로 몰아 죽였으니, 이것이 더 나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숙종은 송시열, 윤증, 박세채 세 사람의 견해를 듣고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서인의 재야 원로 학자들이었습니다. 젊은 서인들은 송시열이 여주에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습니다. "대로(大老, 큰 노인)께서 조정에 나타나면 정치 공작을 한 놈들을 전부 사형시키고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인 대신들이 송시열을 만나 "선생님, 그것은 다 우리 당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송시열은 숙종을 만나 정치 공작을 옹호했습니다.
여기에서 분노한 젊은 서인들이 뛰쳐나갔고, 이들을 젊을 소(少)자를 써서 소론(少論)이라 불렀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정치 공작을 옹호하는 나이 많은 당파는 노론(老論)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남인들은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완전히 몰락했고, 조선의 당쟁은 노론과 소론의 싸움으로 전개되었습니다.
6. 경종을 향한 노론의 압박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이 되자, 노론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또다시 정치 공작을 펼쳤습니다.
어느 날 육품에 불과한 이종서라는 인물이 상소문을 올려 "후사를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경종은 당시 서른 살이었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태종 임금 때 같았으면 이런 상소를 올린 사람은 삼족이 멸했을 것입니다.
이종서는 대궐문이 오후 6시에 닫히는데 5시 50분에 상소를 올렸습니다. 노론들은 사전에 통보를 받아 "오늘 퇴근하면 안 된다. 오늘이 디데이다"라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소론들은 퇴근한 상태였습니다.
경종이 "그러면 누구로 할 것인가"라고 묻자, 당시 조선에는 삼종의 혈맥(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세 왕의 혈통)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경종과 연잉군(후의 영조) 둘뿐이었습니다. 경종은 연잉군을 계속 옹호했고,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달쯤 후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상소를 올려 "세제 대리청정을 시켜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태종 때 같았으면 신하들이 3박 4일이고 5박 6일이고 대궐에 꿇어앉아 "아니되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 신하는 오히려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퇴근 시간 직전인 5시 50분에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소론도 한 번 당해봤으니 정보망을 통해 듣고 달려와 "아니되옵니다"라고 막아섰고, 경종은 상소를 거두어들였습니다.
7. 신축소(辛丑疏)와 신축환국
경종 1년(1721년) 신축년, 김일경이라는 인물이 유명한 신축소를 올렸습니다. 그는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 네 흉악한 자)이라고 부르며 "저 사흉의 욕심은 길가의 돌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일곱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런 역적질에 상소를 연명하는 사람이 고작 일곱 명밖에 없었다는 것이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전부 식민사학으로 뭉쳐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갑자기 정권을 갈아치우고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신록(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 전하는 신하들과 농담도 안 하고 전부 '예스'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날 하루 아침에 건단(乾斷, 하늘의 칼)을 휘둘러 태풍처럼 몰아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도회(韜晦, 뜻을 감추고 있다가 때를 기다림)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경종은 결국 독살설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집권했습니다.

8.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의 함정
우리는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를 배워왔지만, 영조 시대와 정조 시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영조 시대는 영조를 왕으로 만든 노론이 주도한 시대였습니다. 정조 시대는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을 정국에 끌어들여 다당제 정치를 운용한 시대였습니다.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를 만든 것은 노론들입니다. 정조를 영조의 부속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정조의 개혁적 정치를 축소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요즘에는 정조를 세종과 비교할 정도로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합니다. 제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종은 아버지가 빵빵해서 강남 8학군에서 고액 과외를 듬뿍 받아 100점을 맞았고, 정조는 공부하려 하면 책을 태워버리고 학교도 못 가게 하는 상황에서 몰래 공부해서 88점을 맞았다면, 누가 더 잘한 것인가?"
정조는 남인들을 끌어들여 다당제를 지향했다가 재위 24년 만에 독살설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9. 세도정치: 노론 중 극소수 가문의 권력 독점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세도정치란 서인 노론이 계속 집권하다가 정조 사후에는 노론 중에서도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달성 서씨 등 극소수 몇 개 가문만이 정권을 완전히 좌지우지한 것을 말합니다.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강화도령(철종)의 경우, 노론이 그의 형을 죽였는데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저 왕은 허수아비니 뭘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이 한번 나라를 살리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대원군의 문제는 개혁은 했지만 거꾸로 성리학 사회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10.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종로에 가면 전봉준 장군 동상이 있는데, 체포되어 죽으러 끌려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전봉준 장군에게 "이 동상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면 좋아하겠습니까? 차라리 백산 창의문을 선포하는 모습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위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을 물리치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괴롭힘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 백산창의문을 선포하며 죽창을 든 모습을 세워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조선은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고, 결국 노론이 마지막으로 나라를 팔아먹게 됩니다.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었습니다.

11. 1910년, 나라를 판 76명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팔아먹고, 10월 7일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에게 나라를 판 76명에게 귀족 작위를 주고 막대한 돈을 주었습니다.
이를 분석해 보면:
- 왕족: 12명
- 당파별 (64명):
- 남인: 0명
- 북인: 2명
- 소론: 6명
- 노론: 56명 (87.5%)
결국 노론이란 당파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입니다. 일제 시대 상해 뒷골목에서 남인과 소론 계열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고량주를 한잔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는 노론이 팔아먹고, 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어물전의 꼴두기처럼 뛰어다니는 것은 우리 소론과 남인이다."
결론: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외국인들은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나중에 잘 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해방되었을 때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파들을 다시 중용하는 바람에 또 잘못되었습니다.
역사학계는 어떻습니까? 역사학계 태두라는 이병도는 이완용의 손자뻘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완용의 관이 원광대에 있었는데, 이병도가 "국사계 태두"라는 명분으로 원광대 관장에게 "이완용 관 내놔"라고 해서 불태워버렸습니다. 학자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유물을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노론의 역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을 하나로 합쳐 정설인 것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권이 바뀌어도 별로 기쁘지 않고 조금 비스무리하게 흘러가는 근본 이유는 역사관이 잘못되어서입니다. 이 나라 역사를 바꿔야 한국이 정의로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핵심 메시지
- 노론은 300년간 권력을 장악하며 개혁을 막았다
- 주자학 유일사상으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87.5%가 노론 출신이었다
- 노론의 역사관이 현재 한국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 진정한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역사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1: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참고자료 2: [나라를 망가뜨린 노론 조작정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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