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5일 서울대 인문대학 일대에서 이른바, ‘전국역사학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인문대학 7동 106호실에서 ‘사이비역사학 및 뉴라이트 역사학 비판’을 주제로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학연구회가 발표회를 열었다.
타이틀은 '전국역사학대회'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민족사학을 사이비역사학으로 매도하고 식민사학에 발을 들여놓은 전국의 식민사학 학도들을 모아놓고 궐기, 단합을 촉구하는 ‘부흥성회’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첫 번째 강사는 경향신문에서 2016년에 대대적으로 띄워준 안정준(서울시립대 교수)이 “극우 기반의 사이비 역사, 어떻게 ‘진보’로 둔갑했나” 라는 강연 제목으로 맡았다.

그는 “낙랑군은 한(漢) 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중심지였던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에 두었던 행정 명칭인데, 4세기 전반까지 420여 년간 중국 왕조의 지배하에 유지되었다. 일제는 이를 ‘중국인’에 의해 ‘한국인’이 지배된 낙랑군의 역사로 상정했으며, 이를 근거로 ‘외세의 개입과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사의 타율적인 고대사상’을 창출하였다.”라고 언급하며, 이것이 일제가 주장하는 역사 내용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독립투사들과 북한을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낙랑군이 한반도에 위치했다는 사실 자체를 수용하지 않는 가운데, 근거로 제시된 관련 고고 발굴 조사의 결과마저 부정했다...북한의 역사학도 이러한 20세기 전반 민족주의 사가들의 낙랑군 이해를 그대로 답습했다.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고고 자료가 낙랑군의 것임을 부정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 말에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곧 낙랑군은 평양에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나라 행정기관이었고 중국 본토에서 한나라(기원전 202년~ 서기 220년)가 망했거나 말았거나, 본국과 상관없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무려 420년간 존속하였는데 지배 세력은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즉, 낙랑군은 식민기관이 평양에 설치된 것은 맞지만 실제로 지배한 것은 조선인이 대부분이었으니 실상은 중국 한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구 식민 지배를 친일파들이 식민지 자치론으로 희석하는 것과 맥이 같다. 더 확장하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낙랑군이 420년간 본국(한나라)이 망하고 수많은 나라(서한, 신나라, 동한)가 명멸하였는데도 계속 존속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위 주장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들이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낙랑군 420년 존속은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서기전 108년과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했다는 해인 서기 313년을 합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美川王) 14년(서기 313년) 조에 따르면, 미천왕은 낙랑군(이 낙랑군은 한 무제가 설치한 군현이 아니라 최씨 낙랑국의 군대임)을 서기 313년에 침공하여 포로로 2천여 명을 잡았을 뿐이다. 결코 멸망시키거나 이른바 북한 평양에 있다는 낙랑군을 축출한 적이 없다(十四年 冬十月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안정준과 같은 식민사학자들은 사실이 이러한 데도 사료까지 제멋대로 창작하여 중국 1차 사료에 나오는 중국 하북성 갈석산 낙랑군은 서기 313년에 북한 평양에서 망한 낙랑군의 유민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자치통감>에서 따온 이른바 '낙랑군교치설론(낙랑군이 고구려 침공 후 요동 지역으로 이동·개편되었다는 설)'이다. 물론 그들의 스승, 왜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외운 것이다. 참고로, 자치통감의 사료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夏四月,樂浪太守張統率所部千餘家降於慕容廆,廆表置樂浪郡,以統爲太守,王俊爲參軍事." (여름 4월, 낙랑 태수 장통이 부하 천여 호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항복하니, 모용외가 표해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한편, 북한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망했다는 서기 313년 전후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진서지리지>에는 "한나라 때 설치한 낙랑군 속현인 수성현이 중국 진장성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고 한다"(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渾彌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駟望). 이외에 같은 시기의 <진태강지리지>와 이외에 <통전>에도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의 진나라 장성과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평양에 한나라 무제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식민사학계의 헛소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중국측 사료기록이다.

더 분명한 것은 <한서> ‘가연지열전’에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와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東過碣石以玄菟樂浪為郡).”고 하였다. 이 기록은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처음부터 평양이 아니라 중국 갈석산 언저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서>는 위만조선을 멸망하고 낙랑군을 설치한 한나라 무제의 업적도 기록된, 낙랑군의 위치를 낙랑군 설치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기록한 1차 사료다. 따라서 여기엔 이마니시류(今西龍)가 내놓은 “낙랑군교치설”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한국 식민고고학계의 중견학자로 알려진 영남대학 정인성 교수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2018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평양에 위만조선 왕검성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며, 요동 언저리에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였다.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함락하고 세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낙랑군은 평양이 될 수 없고 요동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준은 이날 식민사학자들이 낙랑군 북한 평양설을 만들기 위해 조작 날조한 유물도 끌어다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점재현신사비', '낙랑군현별호구부', '나무 판자때기' 등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고고 유물이라고 내놨다. 그러나 이것도 일제가 날조, 위조한 것임을 이미 중국에서 학위를 받은 문성재 박사 등이 모두 논문과 책으로 증명한 바 있다. 심지어 서울방송에서도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역사 전쟁, 금지된 장난’이라는 제목으로 왜구의 낙랑군 고고유물 조작을 폭로한 바 있다.
더구나 당시 세키노다다시(関野貞)도 자기가 쓴 <관야정일기>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거액을 돈을 받고 북경 유리창 일대에서 한나라 시대 낙랑출토 유물을 “미친 듯이 힘을 다하여[極力]” 매집하여 가져왔다고 실토한 바 있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맹종하는 안정준과 같은 식민사학자들은 역사 진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국민과 식민사학 초년생들을 대상으로 왜곡된 역사로 세뇌하고 선동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낙랑군이 중국에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와 증언을 모조리 감추고 한나라 식민 통치기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이다.
역사학은 사료가 먼저다. 고고 유물유적은 나중이다. 식민사관의 원조이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친일 사학자, 두계 이병도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 1차 사료를 깡그리 무시한다. 반면에 저들이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비난하는 민족사학은 위에 제시한 중국 1차 사료를 제일 앞에 내세운다. 1차 사료를 취급하지 않으면 그건 역사학이 아니다. 따라서 안정준과 같은 식민사학자들이야말로 사이비역사학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준은 이날 민족사학이 지난 8월 28일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역사바로세우기 범국민전진대회’에 몰래 침투하여 염탐한 것을 대견스럽게 자랑하였다. 대회 현장에서 민족사학 편인 것처럼 위장하고 “식민사관청산”, “뉴라이트 척결!” 등 푯말을 들고 찍은 사진을 발표 화면에 띄워놓고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놨다.
특히 이종찬 광복회장과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사이비역사학을 퍼뜨리는 수괴’ 취급하며 이들을 크게 확대한 사진에 붉은 동그라미를 칠하여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인양 매도하였다. 이에 참석자들이 통쾌하다는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도저히 양식 있는 학자나 교수라고는 볼 수 없는 비열한 짓을 벌였다.

이종찬 회장은 "친일사관에 물든 저열한 역사인식이 판을 치고 있다" , "피로 쓴 역사, 혀로 못 덮어" 라며 역사광복투쟁에 매진해 왔다. 이덕일 소장도 수십년째 식민사관 청산 투쟁을 해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이들 스스로 토착왜구이고 밀정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들이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는 위협적인 존재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이날 현장에 선배나 지도교수들의 권유로 참석했을 이제 막 식민사학에 입문한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원 초년생들에게는 이종찬, 이덕일 두 사람이 아주나쁜 인물로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거의 백지상태에서 각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나쁜 인상이 이들의 학문에서 평생 이어질 것이다.
출처: [한가람뉴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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