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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문화

증산(甑山) 상제님의 대도통

by 광명인 2024. 8. 18.

증산께서 본댁에 돌아오신 뒤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시루산은 호남서신사명(湖南西神司命)을 관장하는 주인산(主人山)이라.” 하시니라. 이후로 항상 시루산 상봉에서 머리를 풀고 공부하시는데 이따금 산밑에 있는 샘이너머에서 산천이 흔들리도록 크게 우시니 한번은 성부께서 밥을 가지고 시루산에 오르시다가 그 광경을 보시니라.

어느 날 증산께서 시루산 정상의 바위에 호둔(虎遁)하고 앉아 계시니 마침 나무꾼들이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보고 기겁하여 성부께 아뢰거늘 성부께서 크게 놀라 시루산에 올라가 보시니 범은 보이지 않고 증산께서 태연히 앉아 수도하고 계시더라. 시루산에서 공부하실 때 목에 붉은 수건을 거신 채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와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를 찾으시며 “도통줄 나온다! 도통줄 나온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니라.

공부하시다가 밤이 되면 이따금 유덕안의 집에 내려오시어 쥐눈이콩 한 줌을 얻어 냉수와 함께 잡수시거늘 이 때 덕안의 아들 칠룡(七龍)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구나.” 하시니라.
어느 날 시루산에서 진법주를 외우시고 오방신장(五方神將)과 48장(四十八將), 28장(二十八將)을 들여세워 도수를 보시고는 쌍정리(雙丁里) 김기진(金基鎭)의 집에 가시어 그날 보신 도수에 대해 말씀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78)

오방신장

증산께서 공부하신다는 소문이 나돌자 고부 관아에서는 ‘요술공부를 한다.’ 하며 혈안이 되어 증산을 잡으려 하거늘 하루는 순검이 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삿갓을 쓰고 길가에 앉아서 안개를 지으시니 순검들이 몰라보고 지나가니라. 또 증산께서 삿갓을 쓰고 주막에 앉아 술을 드시는데, 순검들이 바로 옆 상에서 요기를 하면서도 못 보고 가는 일이 여러 번이더라.
(증산도 道典 1:79)

전라도 함평(咸平) 사람 김경수가 천지에 서원(誓願)하기를 “내가 50년의 공부로 반드시 뜻을 이루리라.” 하고 공부에 전념하더니 49년 만에 신령한 기운이 열리는 가운데 태을주(太乙呪)를 얻고 미륵불의 용화낙원 세계가 도래할 것을 깨달으니라. 이에 미륵불의 강세와 광구창생을 기원하며 미륵신앙의 본원인 금산사를 자주 찾던 중 금산사에서 우연히 증산을 뵙고 인사를 올린 뒤 말씀을 나누니라.
이 뒤에 하루는 증산께서 경수를 부르시니 경수가 그 날로 객망리에 찾아오니라. 이에 증산께서 정씨 부인의 시봉으로 경수와 함께 저녁진지를 드시며 경수와 도담을 나누시거늘 이 때 경수가 태을주를 읽어 증산께 전해 올리니라. 증산께서 경수와 더불어 주무시고 이튿날 아침에 집으로 돌려보내시니 경수는 마음 속으로 ‘젊은 증산이 내 제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되니라.
(증산도 道典 1:80)

증산께서 하루는 해남(海南) 바닷가에 가시어 망망대해를 바라 보며 탄식하시기를
부모에게서 빈손 쥐고 이 조선 땅에 나와 왜 천황(天皇)으로 천지 주름을 삼는가….” 하시니
옆에서 낚시질을 하던 한 선관이 이르기를 “꽃 같으면 이제 막 씨를 뿌린 것인데, 어찌 피우지도 못하여 처량한 마음을 먹으시는가?” 하니라.
이에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처량하다니…, 내 어찌 처량한 마음을 먹으리오!” 하시니
선관이 “그대가 천지일월을 아니 천황으로서 도는 것 아니오?” 하거늘
증산께서 답하시기를 “인간에서 인간을 찾으니 물도 내려가다 막히는 곳이 있듯이 마음이 소란스러워진다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선천에는 소릿길만을 찾아 왔으나, 이제 천지 대동길을 찾아야 하는데….” 하시니라.
이에 선관이 이르기를 “천지 대동길 평평한 천지의 한길이라오. 하늘이 어디 두 조각 난 곳을 보시었소?
깊고 얕음이 있을 뿐 똑같은 하늘이 끝없이 이어진 것이지요.” 하고 홀연히 사라지니라.
(증산도 道典 1:81)

증산께서 여러 해 동안 각지를 유력하시며 친히 만상(萬相)을 둘러보신 후에 신축(辛丑 : 道紀 31, 1901)년에 이르러 ‘이제 천하의 대세가 종전의 알며 행한 모든 법술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다.’ 생각하시고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조화권능(造化權能)이 아니고서는 광구천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깨달으시고 수도(修道)에 더욱 정진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1)

객망리 시루산

증산께서 신축년 6월 초에 시루산(甑山)에서 14일 동안 수도하시니 정씨 부인이 수종 드니라. 이 때 항상 남방에 자리를 잡으시고 청수상(淸水床)은 정(淨)한 자리에 놓으시며 하루에 세 번 천지인(天地人) 삼위(三位)로 메 세 그릇씩 올려놓고 공부하시니라. 부인이 그 때마다 메를 새로 지어 올리는데 매번 목욕재계하고 옷을 갈아입고 시봉하거늘 이 때 가세가 심히 어려워 옷이 한 벌뿐인지라 단벌 의복을 하루에 세 번씩 갈아입자니 홑치마를 입고 옷을 빨아 입는데 비 오는 날은 화로에 말려 입으니라.
하루는 메를 지어 공부막으로 떠날 무렵, 뇌성이 치고 큰비가 내려 촌보(寸步)를 옮길 수 없거늘 주저하다가 때를 어기지 않으려고 처마끝을 나서는데, 눈을 꽉 감고 한 발을 내디디니 순간 “눈을 뜨라.” 하시는 증산의 말씀이 들리는지라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이미 공부하시는 자리에 당도하여 있더라.
증산께서 “고생하네.” 하며 위로하시거늘, 부인이 메를 올리면서 보니 그릇이 조금도 비에 젖지 않았더라.
증산께서 메를 상에 올려놓으신 후 “즉시 돌아가소.” 하시매 부인이 문밖에 나서니 어느덧 댁에 이르러 있더라.
정씨 부인의 시봉으로 공부를 마치시고 그 날로 대원사(大願寺)에 가시니라.
(증산도 道典 2:2)

강증산 상제님께서 1901년 음력 7월 7일 대도통을 하신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

6월 16일에 객망리 댁을 떠나 전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에 이르시어 칠성각(七星閣)에서 도를 닦으시니라. 이 때 겹겹이 싸인 깊은 숙연(宿緣)을 닦으시고 미래의 세상을 살피시어 장차 온 천하가 대개벽기의 운세에 닥쳐 멸망당할 것을 걱정하시며 무궁한 조화의 법을 통하시어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앉아 수일을 지내기도 하시고, 천지의 풍운변화의 조화법을 시험하기도 하시니라.
증산께서 대원사로 가실 때에 공중에서 동서양 각국 제왕신(帝王神)과 24장(將)이 “강 천자(姜天子)!” 하고 외쳤으나 듣지 못하신 듯 가시더니 공부를 마치시고 도문(道門)을 여신 뒤에 각국 제왕신과 24장을 부르시어 충북 청주군 청천면(淸州郡 靑川面) 만동묘(萬東廟)에 응집시켜 놓으시고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금후 이 자리가 쑥대밭이 되면, 이 제왕신과 24장이 모두 금산사(金山寺)에 와서 옹위하리니 이 신명들을 잘 대접하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3)

대원사에서 공부하실 때, 정남기(鄭湳綺)의 아들 영태(榮珆)가 쌀을 져다 드리고, 주지 박금곡(朴錦谷)이 시봉하니라. 금곡은 원래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 있었는데 산불로 절이 소실되자 함수산(咸水山)과 함께 삼남 지방을 유력하다가 서른네 살 되던 정해(丁亥 : 道紀 17, 1887)년에 퇴락한 대원사에 이르러 발심하여 절을 중수(重修)하고, 신축년에 증산을 시봉하니 이 때 나이 마흔여덟이라.
금곡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천신(天神)이 강림하셨다.” 하고 공부하시는 뒤를 일일이 수종 들며 그 절에 있는 여러 중들 가운데 함수산, 자신의 조카 박영춘과 함께 증산을 천신으로 대접하고 공경하니라.
(증산도 道典 2:4)

모악산 대원사의 가을 풍경

사람들의 근접을 일절 금하고 공부하시던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대작하고 불칼이 내리치는 가운데 크게 호령하시는 소리가 들리거늘 금곡이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고 증산께 아뢰기를 “칠성각에 봉안(奉安)된 진묵대사(震黙大師)의 영정(影幀)이 마당에 떨어져 있고 칠성각의 방향이 옆으로 틀어져 있습니다.” 하니 증산께서 “그러냐.” 하고 답하시는 순간 당우(堂宇)의 방향이 원래대로 돌아오니라.
(증산도 道典 2:5)

증산께서 공부하시는 중에 담(痰)을 많이 토하시는데, 하루는 두루마기와 바지저고리에 담이 가득 묻었는지라. 그 옷을 벗으시고 알몸으로 앉아 공부하시다가 금곡에게 “옷을 빨아 오라.” 하시거늘 금곡이 그 옷을 본즉 손을 대지 못할 정도이므로 막대기로 끌어내어 냇물에 담가 놓고 돌아와 무심하게 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무니라.
한밤중에 곤히 잠을 자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돌이 구르며 물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하므로 금곡이 놀라 일어나 황급히 나가 보니 그 옷이 깨끗하게 빨린 채 넓은 바위 위에 놓여 있거늘 금곡이 크게 감탄하니라.
이 때 증산께서 토하시는 담을 감당할 수 없어 방짱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담을 토하며 공부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6)

대원사 윗쪽에 위치한 대원사의 수왕암

증산께서 수도에 일심하실 때, 때로는 한밤중에 뜰로 나오시어 천둥 같은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시고 다섯 길이 넘는 감나무를 훌쩍 뛰어넘기도 하시며 또 절벽을 올라 산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시고 수왕암(水王庵)에 가시어 목욕을 하기도 하시니라. 하루는 금곡이 칠성각 안을 슬며시 들여다보니 방안에 연기가 자욱한데 증산께서 종이에다 무슨 글을 써서 계속 불사르고 계시더라.
(증산도 道典 2:7)

하루는 금곡이 아뢰기를 “제가 평생 이 절에 주지로 있게 해 주옵소서.” 하고 청하니 증산께서 이를 허락하시니라.
금곡이 다시 아뢰기를 “저의 일을 말씀해 주사이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 바 그 후신(後身)으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금곡이 다시 간절히 여쭈기를 “구십 세까지만 살게 해 주옵소서.” 하거늘
이도 허락하시며 “네가 죽을 때에는 본병이 도져서 죽으리라.” 하시니라.
금곡이 또 아뢰기를 “대원사에 감나무가 많으나 감이 하나도 열지 않으니 감이 잘 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이는 진묵이 원한을 품은 연고라. 명년부터는 감이 잘 열리리라.” 하시거늘 과연 그 후로 감이 풍성하게 열리니라.
그 후 금곡은 한평생 대원사 주지로 있다가 93세가 되매 다친 허리가 재발하여 죽으니라.
(증산도 道典 2:10)

증산께서 대원사에 가신 지 보름 만인 7월 초하루부터 식음을 전폐하시고, 한번 앉으신 자리를 잠시도 떠나지 않으신 채 이레 동안 수도에만 일심하시니라.
대원사 칠성각에서 공부하신 지 스무하루 만인 신축년 7월 7일에 천둥과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상서로운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무상의 대도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여시니 이로부터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시고 우주의 조화권능을 뜻대로 행하시니라.  

금산사 미륵전

도통하시기 전날 깊은 밤에 증산께서 금곡에게 명하여 “산 너머 금산사에 가서 미륵전(彌勒殿)을 지키라.” 하시거늘 금곡이 대원사를 떠날 때 보니 찬란한 불기둥이 하늘로부터 칠성각 지붕으로 내리뻗쳐 있더라. 미륵전을 지키고 있을 때,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여 미륵불과 미륵전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니
금곡이 두려워 정신을 차릴 수 없고 몸조차 가눌 수 없어 미륵전 기둥을 잡고 견디는데 오히려 기분은 황홀하여지더라.
날이 밝자 금곡이 대원사로 돌아와 간밤의 일을 아뢴즉 그 때가 바로 증산께서 도를 통하신 시각이더라.

상제님께서 금곡에게 “미음 한 그릇을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올리매 다 드시고 나서 “금곡아! 이 천지가 뉘 천지인고?” 하시거늘 금곡이 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니 상제님께서 천둥 같은 음성으로 “내 천지로다! 나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니라.” 하시고 크게 웃으시니라.
이 때 금곡이 보니 방안이 대낮처럼 환하고 상제님의 용안(龍顔)이 해와 같이 빛나시는지라 저도 모르게 합장 부복하니라.
(증산도 道典 2:11)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니라.
이제 인존시대를 당하여 사람이 천지대세를 바로잡느니라.
예로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달지리(下達地理)는 있었으나 중통인의(中通人義)는 없었나니 내가 비로소 인의(人義)를 통하였노라.
(증산도 道典 2:22)

상제님께서 공부를 마치시고 대원사를 나서려 하시매 금곡이 보니 입고 계신 옷이 너무 남루한지라
사람을 시켜 고부 본댁에 가서 새 옷을 가져오게 하니
정씨 부인이 상제님께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으심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옷을 가지러 온 사람에게 불평하며 새 옷을 내주거늘금곡이 옷을 올리매 상제님께서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 옷을 가져다 버리라. 계집의 방정이 붙어 있느니라.” 하시고 입지 않으시니라.
이에 금곡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정씨 부인에게 그 사유를 전하니 비로소 부인이 뉘우치고 다시 새 옷을 올리니라.
상제님께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대원사를 나서시니
갑자기 골짜기의 온갖 새와 짐승들이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거늘
이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느냐?”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지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하시매 수많은 금수들이 그 말씀을 좇더라.
그 길로 전주 풍남문(豊南門)에 오르시어 천지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하며 노래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12)

전주 풍남문

증산 상제님께서 객망리로 돌아오신 후, 집안 대대로 전하여 오던 진천군 교지(敎旨)와 공명첩(空名帖), 족보, 문집 등 일체의 문서와 서책을 가져다 불사르시며
내 세상에는 천하의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를 다시 시작하리라.” 하시니 부모님과 수십 호 문중의 노소가 모여들어 만류하는지라
상제님께서 “앞세상에는 이런 것에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시고
유도(儒道)의 구습을 없애고 새 세상을 열어야 할진대 유도에서는 범절(凡節)밖에 취할 것이 없도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내려오면서 하늘과 땅의 정사(政事)천상의 조정(天朝)에 명하여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신축년 이후로는 내가 친히 다스리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13)

하루는 밤에 모악산 비장골의 냇가 바위에 앉아 쉬시니 16세 된 금산사 중 오금해(吳錦海)가 시중을 드니라.
상제님께서 금해에게 “물 한 그릇 떠 오라.” 하시므로 금해가 명을 받고 물을 뜨러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바위 위에 앉아 계신 상제님께서 태양과 같이 찬연한 불덩이로 빛나시거늘 그 광명이 얼마나 밝은지 기어가는 개미까지도 보일 정도더라.
금해가 하도 눈이 부시어 감히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니라.
(증산도 道典 2:14) 

지식인들은 상제를 심볼리즘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조선의 성리학 그리고 현 지식인들의 한계이다.

이제 온 천하가 큰 병(大病)이 들었나니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仙境)을 건설하려 하노라.
나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니라.
(증산도 道典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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